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성법 지음 / 민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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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법스님을 처음 알게된 것은 2006년경에 해인사에서 구입했던 한권의 책이 인연이 되었다. 그책은 성법스님의 저서는 아니었고, 만현이라는 사이비 중이 스스로를 부처라 칭하며 자신의 가르침(?)을 써낸 "21세기 붓다의 메세지"라는 책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불교에 대해서 매력과 호기심 그리고 두려움이 뒤섞인 관심을 가지고 왕성하게 불교와 관련된 모든 것은 다 찾아보려고 애쓰던 시기였다. 만현이라는 자가 썼던 책은 아주 상식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아도 사이비 처럼 여겨졌으나 - 2014년에 누군가가 자신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스스로를 재림예수 혹은 재림붓다라고 칭한다면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 해인사 경내에 있는 서적 코너에서 당당하게 팔리고 있었고, 서점에서 그 책을 판매하는 보살님께 여쭈어 보아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해인사가 어떤 절인가? 한국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법보사찰" 이라고 불리우는 절이다. 그 상징성을 생각해볼 때 그런책이 해인사 경내에서 당당히 팔리고 있다는 사실은 참 맥이 빠지는 일 아닌가? 기독교는 워낙에 수많은 종파가 있으니 비교가 힘들지만, 명동성당 서점에서 재림예수라 칭하는 자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 당당히 팔리고 있고 그 누구하나 그 책에 대해서 비판조차 없다고 생각해 보면 이건 뭔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것이다.  인터넷으로 그 책에 대한 내용을 검증해 보던 중 그 책과 저자에 대해서 조목 조목 비판을 하고 있던 스님이 유일하게 한분 계셨는데 그 분이 성법스님이었다. 또한 세존싸이트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때도 그렇지만 한국불교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서 이미 대중은 거의 승가의 부패에 무감각해져 버린 듯한 2014년의 지금까지 한국 불교에 대해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스님을 찾기가 힘들다. 달콤한 사탕발림이나 그럴 듯한 현실도피와 신비주의로 포장되지 않은, 석가모니라는 실존했던 한 인간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를 당당하게 스스로의 목소리로 말하는 분도 극히 드물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성법스님의 가르침을 신뢰했고 보다 많은 사람이 스님의 가르침에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절실히 바란다. 이제 막 불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 냉철한 이성으로 깨달음이라는 신비주의를 경계하지만 부처의 위대한 가르침과 지혜는 무엇이었는지 진실로 궁금한 그 어떤 사람도 성법스님의 신간에서 바른 이정표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스님의 신간을 아래와 같이 간추려 본다. 성법스님의 신간은 300페이지가 넘는다. 보다 많은 이들이 스님의 가르침에 인연이 닿기를 바란다.


14p. 불교는 끊임없는 자기반조와 참다운 가치에 대한 의문을 통해 인간의 본능을 극복하고 깨달음에 도달해야 한다는 반 염세적인 메시지를 핵심으로 삼는 다는 말씀입니다.


16p. 붓다께서는 염세적인 출발에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깨달음이라는 극적반전으로 낙관적 회향을 보여 주셨지만, 이들은 "네가 부처다" 라는 낙관적 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부처가 맞다는 당연한 회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 이들의 근본적인 한계인 것입니다. 이렇듯 理의 세계인 진여문에서 한국불교의 착시 현상은 매우 심각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事의 세계인 생멸문에서의 착시현상은 어떨까요? 한마디로 표현하면 돈으로 공덕도 살 수 있고 악업은 보시를 해서 소멸시킬 수 있고, 앞으로 받아야 될 업도 지금 보시를 하면 다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법당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면 공덕중의 공덕으로 삼대가 복을 받는다고 자신합니다. 이것 역시 낙관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신도들과 늘 같이 독송하는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붓다의 가르침은 이것과 정반대로 일체가 空함을 강조하는 데도 스님들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사실이든 사실과 다르든 낙관주의적 착시를 신도들에게 오염시켜야 신도들의 보시가 많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37p. 우주적 진리인 연기를 관하신 붓다께서는 그 마음의 여운을 간직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5비구에게 자신이 방금 깨달은 경지를 자신 있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가 5비구에게 설한 내용은 4성제 였습니다. 붓다께서 이들에게 12연기를 처음 설하셨다는 단 한 줄의 증거도 없습니다. 이건 상식에 어긋납니다. 즉, 5비구에게 설한 첫 가르침이 12연기법이어야 기존의 주장에 맞는데 실상은 4성제를 설하신 것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합니다. 12연기가 아니라 4성제를 최초로 설하셨다고 전해지는 이유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찾은 해결 방법은 12연기는 후대에 조합된 것이고, 연기적 고-집-멸-도라는 사성제를 설하셨다고 결론짓는 겁입니다. 붓다께서는 5비구에게 12연기가 아닌 법계의 '연기성'을 언어적이 아니라, 4성제라는 의미적으로 재차 확인해 주신 것이라고 이해하면 접근이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좀 더 과감한 추론을 한다면, 붓다께서는 연기법의 부분인 '인과'가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부분에 상당한 고민을 하셨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연기에는 의도나 선악이 없지만, 세상은 인과에 의도와 선악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44p. 실제로 붓다의 깨달음은 퍼펙트한 것이었고, 그 후 오늘날까지 붓다의 퍼펙트에 1~10%만 가까이 다가서도 보통의 인간의 사유를 단번에 넘어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붓다의 온전한 깨달음은 12연기가 아니라, 우주의 理와 事의 근본 원리인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 는 상의 상관 관계의 원리인 군더더기 없는 緣起입니다.

 

45p. 물질(事)과 정신 혹은 마음(理)은 상호 緣起 관계에 있다는 말입니다. 인.연.과는 간단 없는 이와 사의 한 단면을 '사건적'으로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46p. "연기는 내(여래)가 태어나기 이전이나, 내(여래)가 멸한 후라도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고 하셨습니다. 이 연기에 확철한 경계라는 것은, 인간의 욕심과 작위로 인한  인因과 연緣을 엮어 가서 만들어 내는 과果라는 것을, 아주 미미하고 소소한 일로 여길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마음의 무한 팽창을 이룩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인간이 어떤 문제에 자신의 마음의 10%쯤 빼앗기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것을 반인 5%로 줄여 집착과 번뇌 역시 반으로 줄이는 일도 가능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10배로 확장 시킨 다면 이 역시 빼앗기는 마음을 10%에서 1%로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뜻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마음을 극대화시켜 인간이 갖는 모든 욕망을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낮추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감각기관을 다스리는 초기 수행의 방법론이며, 번뇌의 불을 다른 곳으로 번지지 못하게 단속한 붓다의 열반의 경지였던 것입니다. 고타마 붓다도 곳곳에서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을 야단치고, 우열도 가리고, 갈증이 일 때는 목말라 하며, 늙고 병드는 육체적 고통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연기의 관점에서는 마치 태양에 물 한방울 더한 것과 같은의미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48p. 대부분의 경전과 논서들에서 인과는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불이 있으면 뜨거우니, 인과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생에 가난한 인은 과거생에 인색하기 살았기 때문이다"라는 모범적인 경전적 해석과 의존은, 붓다의 연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원죄론적 인과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는 것입니다. 연기 자체에는 선악이 없습니다. 인과에도 선악이 없습니다.

 

50p. 세상의 시공의 변화와 관계없는 영원한 가치는 오직 연기를 체득하여 세상의 고와 낙, 생과 사를 무상으로 인식하며, 집착과 오욕을 일으키는 자신의 마음이 실은 무아無我(空我)라는 진리라고 '느끼라' 한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전부입니다. 이 '느끼라'의 방법론(수행법)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발생하게 되니 지금과 같이 불교가 아주 번잡스러워진 것입니다. '번잡'이라는 것은 문화적.시대적 다양성으로 이해해 줄 수도 있지만, 지금의 한국불교는 단순히 수행론의 번잡만이 아닌,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인 연기는 망각하고 오직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로 퇴락해 버린 것이 문제 입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신앙성을 배제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신앙성 즉, '믿음'은 연기라는 진리에 나 자신도 한 축을 담당하고 있어 법계의 일원이라는 믿음, 법계에 편재한 곧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룬 후 느낀, 바로 그 마음의 파장에 나도 하나가 되어 같은 파장을 이룰 수 있다는, 법신불法身佛에 대한 귀의와 발원이 불교의 종교성이 되어야만 합니다.

 

53p. '불법이 무상.무아에 해당이 되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저는 해당이 된다는 견해입니다. 무상은 제행무상의 줄임이고, 무아는 제법무아의 줄임입니다. 제행무상은 연기를 사事의 논리로 표출한 것이고, 제법무아는 연기를 이理의 논리로 표출한 것입니다. 이 구별은 사실 삼법인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이와 사가 원융되고 다시 진아와 합일되는 안팎세계의 불이가 바로 궁극적 깨달음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모조리 연기 자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67p. 그 '무엇'은 바로 연기라는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업과 윤회도 연기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이러우지고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12연기가 아닌 그냥'연기'이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깊이 새겨야 할 화두인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불교는 상당 부분 붓다 이전의 업과 윤회의 개념으로 신도를 유인하고, 신도들은 고달픈 길인 깨달음으로 향하기 보다는 내 욕심을 빨리 또 손쉽게 얻으려는 심사로 불교를 믿는다는, 참으로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내친김에 첨언하면, 아무런 대안 없이 '지식'을 깨달음의 장애로 매도하는 禪병에 대해 인간의 지성과 통찰력을 확신하는 저로서는, 선은 물론 지식을 포함한 모든 사상과 존재가 연기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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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세 2016-04-18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헌지사 불자로써 점수로 매긴다면 10점도 줄수가 없네요 ...
중간 중간 어디서 주워듣고 짜집기하고 직접읽어보고 경을 읽어 사실 확인도 하고 해야지
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