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개장의 용도
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1월
평점 :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자개장의 용도〉
자개장으로 들어서면 상상하는 어떠한 곳으로든 갈 수 있다. 갈 수는 있지만, 자개장을 통해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 주인공은 늘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고 자개장을 열지만, 사실 자개장의 진짜 용도는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떠나는 데 있다.
이 작품은 떠나는 일에 대한 환상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함께 말한다. 자개장은 도피의 도구처럼 보이지만, 선택의 결과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함을 보여준다. 결국 ‘용도’란 사물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음을 드러낸다.
〈구유로〉
함께 걸그룹을 준비하던 네 명 중 주인공이 탈퇴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은 독일에서 파리까지 걸어간 소설 속 남자의 이야기를 읽고, 행사 날 무대가 열리는 장소까지 직접 걸어간다. 이 장면은 삶의 힘든 과정을 ‘걷는 일’로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난을 이겨내고 동료들을 찾아간 주인공을 통해, 서로가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이해가 생길 때 비로소 진정한 우정이 가능해짐을 느꼈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이해할 수 있는 깊이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며, 나 역시 내 좁은 시야로 이해하지 못했던 친구는 없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강가〉
같이 일하던 외국인 동료의 권유로, 그 동료의 고향에 ‘남자를 사러’ 가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다. 그곳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게 되면서, 정작 가까이에 있던 동료의 일을 도와주지 못했던 죄책감이 더욱 선명하게 대비된다.
강가에 서 있는 시간은 과거를 씻어내고 싶은 마음을 상징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 정화의 공간처럼 보였던 강은 결국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수호자〉
괴롭힘을 당했던 학창 시절과 힘든 유학생활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언제나 지켜주겠다는 친구의 말을 가볍게 여기던 주인공 앞에, 그 친구의 진심이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장면은 타인의 진심을 함부로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남긴다.
〈규칙의 세계〉
한국의 여러 미신을 맹신하는 셰어하우스에 머무는 외국인들의 이야기다. 한국인 매니저를 중심으로 미신은 점점 ‘규칙’이 된다.
하지만 마지막에 거울을 집 안에 두는 장면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신보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규칙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나쁜 물〉
우연히 구해준 사람이 연쇄살인범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다. 주인공의 죄책감은 귀신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는 죄책감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귀신이든 유령이든 어떤 형태로든 끝까지 따라붙는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귀신들에게 허락을 구하는 장면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만 진정한 사죄만이 용서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어 특히 인상 깊었다.
〈천사들(가제)〉
친구의 죽음 이후, 장례식장을 향하는 기차 안에서 꿈을 꾸는 이야기다. 꿈과 현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장면들은 진한 슬픔과 애도로 다가온다.
하지 못했던 말들, 하고 싶었던 말들, 함께하고 싶었던 시간들을 꿈속에서나마 바란다는 설정이, 슬픔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오래 마음에 남는다.
함윤이 소설집 『자개장의 용도』는 환상적인 장치들이 도피처가 아니라 현실을 더 또렷하게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한다. 인물의 심리를 설명하기보다 행동과 상황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특히 인상 깊다.
단편집임에도 불구하고 각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 선택의 무게, 그리고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는 자리까지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