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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마타, 이탈리아
이금이 지음 / 사계절 / 2021년 9월
평점 :
"이금이 작가님의 첫 에세이"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읽어 보고 싶은 이유가 된다.
그동안 <너도 하늘말나리야>, <소희의 방>, <숨은 길 찾기>, <알로하, 나의 엄마들> 등을 읽으면서, 그리고 이금이작가님과의 북토크를 겪으면서
인간 '이금이'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어지고 궁금해졌었다.
그리고 이 시국에 여행 에세이라니.
끌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이탈리아!!! 크으...
해외여행 못 가본 지가 체감으로는 십 년은 넘은 것 같은 지경..
여행 책을 읽으며 대리만족하기도 딱 좋다.
북토크 중에 느꼈던 이금이 작가님의 매력은
에세이 속에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에 있는 '페르마타'라는 말도 여행기 중에 나온다.
할머니가 내린 정류장 표지판엔 페르마타라고 씌어 있었다. '페르마타'는 '정류장', '잠시 멈춤'이란 뜻이기도 하지만 악보의 늘임표를 부르는 단어이기도 하다. 음표나 쉼표에 늘임표 기호가 있으면 본래 박자보다 두세 배 길게 늘여 연주해야 한다. 페르마타라는 단어에 여행의 본질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잠시 멈추어 평소엔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것들을 여유 있게 생각하는 것. 실은 평소 일상에서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들이다. (143쪽)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나는 그 역할을 통해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느꼈으며 인간으로서도 많은 성장을 했다. 하지만 책임이나 의무가 버거워 벗어버리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페르마타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도 모르는 새 역할에 맞추었던 옷이나 가면을 시나브로 벗어버리고 있었다. (145쪽)
그리고 '여행'과 '인생'에 대한 철학.
'글쓰기'에 대한 생각.
'작가'에 대한 생각이 여행기 곳곳에 녹아 있다.
환갑이 되기 전에 친구와 떠난 여행.
문득 나의 50대, 60대를 가늠해본다.
이렇게 멋진 인생선배가 앞길을 알려주니 조금은 마음 느긋하게
내 길을 걸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
*인상 깊었던 구절들
p99 남의 자식이 해서 멋진 일이면 내 자식이 해도 응원해줄 일이다. 내 아이들에게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유예하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청년처럼 현재를 누리며 살라고 해줘야지.
p118 신화를 접하면 일단 마음이 웅혼해진다. 관계나 일상의 자잘한 문제, 그로 인한 부대낌이 별일 아니게 여겨지고 좁아졌던 가슴도 한껏 펴진다. 택시가 에트나산을 바라보며 이오니아 해안도로를 달리는 동안 진에게 삐죽삐죽 솟았던 감정들도 가라앉았다. 아무리 진에게 불만스러운 점이 있어도 함께 와서 좋다는 생각이 더 컸다. 진도 그러했으리라.
p123 누군가 말하긴 어떤 일이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다. 이탈리아에서 보내는 진과 나의 일상도 밤마다 뜨는 달빛에 물들며 우리의 신화가 돼가고 있었다.
p156 작가는 실패나 실수를 해도 글감이 생겼다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의 상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작가다.
p175 나는 그 아침, 아무리 짙을지라도 안개는 그 속으로 발길을 내딛는 사람에게 길을 내어준다는 것을 경험했다. 겁내거나 주저하는 사람에게는 벽처럼 견고하지만 용기 내어 다가가는 사람에게는 바늘귀만 한 틈이라도 내어주는 안개는 우리가 사는 세상, 그리고 인생과 닮았다.
p187 글쓰기가 여행과 다른 점은 퇴고를 통해 잘못됐거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고칠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 속에 있는 여행은 수정할 수 없다. 그래서 한 번 살면 그뿐인 인생과 닮은 부분이 있다. 다행인 건 그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삶이나 다음 여행에 반영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