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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 시네마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평점 :
상상천재 작가의 가장 트렌디한 단편소설,
육교 시네마
프랑스의 철학자 쥘 드 고티에는 상상력이 현실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온다 리쿠는 핵무기를 장착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 단편으로 읽기 미안하고 아까울 정도로 기발한 소재들이 폭발하는 단편집이었다. 뛰어난 소재에 이를 뛰어넘는 상상력의 만남이라니.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인간의 일반적 사상과 행동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이 더해져 난해한 내용마저 해석하고 싶도록 안달나게 만들었다. 읽는 내내 스산하고, 소름 끼치고, 전율했다. 작가님 정말 가둬 놓고 글만 쓰게 해주고 싶다.
표지부터 살펴볼까. 는 사실 책을 거의 다 읽어가는 시점까지 건물에 비친 그림자가 거대한 뱀이 입을 쩌억 벌리는 모습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고래였던 것. 잔혹한 뱀의 이빨과 솟아오르는 몽환적 고래가 딱 ‘몽환 속 공포’를 다루는 <육교 시네마>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가령, ‘구근’이 그랬다. 튤립이 겨울을 버텨 내기 위해 품은 파리한 구근을 보고 야하다고 하다니. 소름 끼치고 미친 것 같았다. 미친 사람을 표방하는 작가는 그저 경이로웠다. 작가는 판타지 레버에 수치를 조정해가며 일상 속, 상상 속 스산함을 선사한다. ‘트와이라이트’는 신들의 세계를 끔직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비춰내는 판타지 수 치 100짜리 소설이라면 ‘보리의 바다에 뜬 우리’는 음산한 현실 속 어딘가, 정말 미친 사람들이 미친 사람들을 모으면 이런 곳이 존재할 수 있을 듯한 판타리 레벨 30쯤의 소설이었다. 물론 극히 정상이라 자부하는 나 스스로는 읽는 내내 육성으로 경탄을 금치 못했지만. ‘황궁 앞 광장의 회전’은 판타지 레벨 0이지만 작은 상상에서 비롯된 예술의 전경이 펼쳐져 작가의 이전 작품인 <꿀벌과 천둥>을 연상케 했다.
작가는 단편집은 마치 하나의 초콜릿 박스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소설은 지나치게 쌉쌀하게, 또 어떤 소설을 달콤해 황홀하고, 어떤 소설은 그저 내 입맛에 꼭 맞는. <육교 시네마>라는 초콜릿 박스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초콜릿은 ‘비가 와도 맑아도’라는 단편이었다. 본격 미스터리 소설급 서사에 완벽한 수미상관 구조의 기승전결. 짧으나마 쏟아지는 떡밥과 깔끔한 회수, 더불어 만족스럽게 맞아떨어지는 의문에 대한 해결책. 더 음미하고 싶은데 감질나게 혀끝을 떠나버리는 단 맛에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구골나무와 태양’은 크리스마스라 불리지 못하는 시대의 크리스마스가 담겨 있었는데 한 문장 한 문장 정말 작가의 천재성에 감탄스러웠다. 언어 유희와 적절한 근거가 버무러진 초월적 재해석이라니. 아래는 감탄을 넘어선 경악을 자아냈던 본문의 일부다.
“빨간 옷을 입고 흰 자루를 멘 노인이 동지 축젯날 밤에 집에 침입한다는 습관은 너무 부조리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아멘 惡面 (나쁜 아이가 게 있느냐!)
그렇게 외치며 찾아오는 산타 三田라는 이름의 노인은, 실은 삼대에 걸쳐 논밭을 비옥하게 해주는 고마운 내방신이라는 이야기를…”
단편 하나하나 너무 소중한 초콜릿이었다. 온다 리쿠의 단편을 또 하나의 박스에 담아 선물로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