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로르샤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DC코믹스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왓치맨', 심지어 코믹스북은 아니고 코믹스북을 바탕으로 영화화한 영상 작품에서였습니다. 해당 작품에서는 로르샤흐와 같은 스펠링인 Rorschach를 쓰면서도 영어식 발음인 '로어셰크'로 불리게 되죠.
흑백으로 이루어진 기괴하고 매혹적인 가면은 끊임없이 변하는, 하지만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는 데칼코마니의 얼룩 모양으로 표현되어 로어셰크라는 인물(히어로)의 고뇌와 불안정함, 갈팡질팡하는 인간스러운 면을 잘 나타냅니다.
원작이나 영화에서는 비록 영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하는 로어셰크이지만, 사실상 해당 작품의 주인공이자 작가의 분신으로서 작품의 메세지를 직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그는, 당연하게도 작가의 의해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지므로 그에게 매료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잉크 얼룩 가면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겠죠.
로어셰크에 대한 관심은, 좌우 대칭의 잉크 얼룩 가면으로, 그리고 실제 로르샤흐 검사로 관심의 영역을 넓혀 나갑니다. 하지만 그러한 저의 관심은 적극적이지 않았고, 본격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2차 전공으로 심리학 강의를 수료할 때조차도 말입니다. 물론 심리학 수업에서도 로르샤흐 검사에 대한 언급이나 비중은 정신 분석의 프로이트나 융, 인본주의 심리학의 칼 로저스 등에 비해 현저하게 적었고, 수업 자료 혹은 전공 서적의 한 꼭지를 채울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시험이나 과제로도 출제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로르샤흐에 대한 관심도 멀어져 갔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로르샤흐 검사에는 뚜렷한 정답이 없다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로르샤흐에 대한 호기심이나 갈망은 잊혀지지 않고 마음 기저에, 강렬하지만 은근하고 조심스럽게 자리잡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수년을 조용히 묻혀있던 녀석이, 로르샤흐라는 책을 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저 마음의 기저에서 표면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나 방대한 양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의 당혹감과 압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로르샤흐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을 이 책이 충분히 채워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