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날 탐구과목 시험을 앞둔 주말. 도무지 집중이 안되어 책이라도 읽자 싶어 전에 사놓은 이 책을 읽었다. 시험 기간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배제하고서도 이 책은 틀림없이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평소에도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랑에 대한 환상이 커서였을지도 모르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이 책에서는 어떠한 강렬하고 열렬한 사랑도 시간 앞에 영원할 수 없음이 드러난다. 그렇게 사랑이 무력해지는 과정에 슬픔이 다가왔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나이 차가 적었다면 괜찮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소설에 끝에서 그 슬픔과 동승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없이 죽는다. 허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족하다." 라는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족하지 아니, 차고 넘치지" 상실을 위해선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 사랑을 잃고 시들어가더라도 강렬한 사랑을 품은 기억이 있다면, 그것을 가져갈 수만 있다면 나는 족하고도 남는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내가 남기는 미숙한 다짐이다.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을 읽고 난 후에는 필연적으로 한 가지 질문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개츠비는 왜 위대한 것인가?"하는 질문. 사실 내 관점에서 제이 개츠비는 위대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줄곧 지켜봐왔고, 이를 서술해준 사람, 닉 캐러웨이에게 개츠비는 위대해야만 했다. 소설의 서술자인 닉이 작 중 계속해 유지하려는 태도는 "냉소" 혹은 "객관적"이다. 닉의 톰에 대한 묘사만으로도 우리는 톰이 부정적 인물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개츠비에 대한 묘사도 사실 썩 긍정적이지는 않다. 최소와 최대 사이에서 거리를 조율하려고 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닉은 어떤 사건에도 빠지지 않고 있다. 주도적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분명 아니겠으나, 톰의 외도 현장을 목격했음에도(톰은 닉의 사촌 데이지의 남편이다!) 말리기는 커녕 같이 여자를 끼고, 분위기에 취해버리는 등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한 여름 뉴욕을 이루는 사건들이 점점 서로 뒤엉켜가며 무언가 긴박해져 갈 즈음에 결국 개츠비는 죽게 된다. 매일같이 호화로운 파티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개츠비, 아니 정확히는 개츠비의 돈이었다라는 사실을 드러내며 그의 쓸쓸한 장례식이 치뤄지며 닉의 한여름 뉴욕 일기는 끝을 맺는다. 닉은 벗어나야만 했다. 자신의 여름 일기는 완전히 부정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서 서술자 닉이 할 수 있는 단일한 것은 그의 여름에 동행한 개츠비를 격상시키는 것. Good, nice, excellent 따위의 수식어구가 아닌 '위대한'이라는 great만이 그를 괜찮게 할 수 있는 표현이지 않았을까. 잃어버린 세대에서 방황하는 지식인 피츠제럴드에게는 그것만이 괜찮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