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3 - 성역과 금기에 도전한다
강준만 외 지음 / 개마고원 / 1997년 6월
평점 :
품절


요사이 대형서점을 가보면, 사회과학분야에서 비교적 '댄디한' 겉 표지에 선정적인(?) 주제를 다루는 일련들의 책들이 출간되어 독자 들의 시선을 끈다. 그것도 그 일련의 시리즈가 오로지 단 한명의 필자에 의해 기획되고 저술되었다는 것과, 그가 다루는 책의 주제 가 현역에서 활동중인 우리나라의 유명인사들에 대한 지지와 비난 인 점을 고려해보면, 놀랍고 파격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김대중 죽이기]의 저자인 현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강준만'씨이다.

그가 現 김대중 대통령의 솔직한 지지자 를 공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는 비교 적 정직한 지식인 이라는 인식을 갖게된다. 참고로 얘기하면 그는 서울대 천국--혹은 명문대 지상주의를 비꼰-- [서울대의 나라]라는 저서도 출판한 만큰, 현재 우리의 피부에 와닿는 '현실적인 문제' 들을 주요 안건으로 삼고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가 현재 제 5권까지 출간한 [ 인물과 사상 ]의 3권을 여기서 소 개하는데, 내 예상컨대 3권이 비교적 많은 인기를 얻지나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하게한다. 왜냐면 다른 시리즈에서도 흥미로운 '인사' 들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어쩐지 3권에서 다뤄진 인물들은 지식계 나 대중들에게도 익히 알려진 괴짜들이 몇명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 다. 우선 '우리들의 일그러진 이문열'이라는 제목으로 '이문열'이 다뤄지고 있으며, '위선적 언어에 도전하는 김용옥의 화려한 투쟁 '이라는 이름으로 '김용옥'이 다뤄진다.

그리고 '민족의 미래를 사겠다는 장사꾼 최명재'라는 제목으로 전 파스퇴르 우유의 창립자가 다뤄진다. 그외에도 우리나라의 장애인 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고발하는 글과 젊은 지식인 김영민의 새로 운 글쓰기에 대한 지지, 그리고 PD수첩에 대한 지지등이 담겨져있 다. 이문열에 대한 비판은 말할 나위없이, 그간 이문열에게 쏟아진 비 난을 근거로 하고있다. 요컨대, 보수주의자, 교양주의자....등이 그것인데, 이문열에 대한 비난은 당시에 가장 큰 사회적 문제로 심 화되었던 소설, [선택]을 둘러싸고, 그를 비난했던 공지영이나, 전 여옥의 반박문을 예로 들어 이문열의 오류를 지적한다.

이책은 강준만 자신의 입장이 초지일관 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주제에 있어서, 문제가 된 사람이 그동안 언론/출판을 통해서 발표 한 글들과 그에 반하는 이들의 발표문을 인용해 가며, 결과적으로 강준만씨가 결론을 매듭짓는 형태를 띄고 있다. 그가 결론내린 이문열은 시대의 권력의 생리에 영악하게 교합한 거대한 '문화권력'의 횡포로 규정하고 있다. 즉 이문열이라는 고유 명사가 아닌, 이문열이라는 일반명사로서 모든 문화권력속에 침투 되어 반대세력의 입장을 잠식시키는 무시할 수 없는 권위가 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하나의 요지부동의 권력이 라는 요지 이다.

김용옥에 대해서는 그의 치기와 언론플레이는 유치하고 파격적이 지만 그가 보여주는 새로운 지식인 상은 구태의연한 한국지식계에 대한 대안으로서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글에서 강준만은 김용옥이 과거에 '학벌 컴플렉스'에 시달려서 여러 유수 의 명문대학을 전전한 것과 컴플렉스에서 오는 과장스럽기 까지한 자기 과시를 변호한다. 좌우지간 저자는 김용옥의 용기와 새로운 학문방식은 옳게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기술한다.

* 나는 개인적으로 강준만을 잘 모르지만, 그가 발표한 일련의 인물비평시리즈는 현재 학계의 고답적인 분위기로 보아서는 아주 신선하고 용기있는 시도라고 보고 싶다. 사실 이론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어느분야건, 우리나라는 비평문화가 거의 부재해 있 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가 현실과 학문과의 연대에 주 안을 두고 시도하는 지금의 용기있는 시도는 그러한 구태의연을 타파하는 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술사의 기초개념
하인리히 뵐플린 지음, 박지형 옮김 / 시공사 / 1994년 6월
평점 :
품절


어딜가나 고전이라는 것이 있다. 미술서에도 고전이라는 것이 있다. 본서는 시공사에서 < Classic File: 예술학의 고전 >이름 으로 출간한 미술사의 고전이다. 그리스 미술의 르네상스에 대한 영향력을 기술한 논문이 빙켈만의 [ 그리스 미술 모방론 ]이라면 근세미술에 대한 개괄과 더불어 그야 말로 미술의 르네상스와 바 로크라는 양대 산맥을 비교한 소중한 글이 바로, 뵐플린의 [미술 사의 기초개념]이다.

이책의 중요성만으로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데, 또 역자의 번역도 비교적 충실해서 미술사에 대한 기본 적인 이해가 있는 독자들에겐 무리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는 책이 라서 여기에 소개한다. 책 서언에서 저자는 '시각방식'에 관해 일갈을 하고서 들어간 다. 즉, 이것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체처럼 생장하며, 미 술사가들은 늘 이런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충고가 그것이다.

마치, 존 버거의 [ Ways of Seeing ]의 1장의 요약일 수 있는 '사람은 원하는대로 본다'는 것과 흡사해보인다. 이 충고, 곧 ' 인간은 언제나 보기 원하는 대로 보아왔다는 말은 너무도 지당하 다.'는 문맥으로 이어지고 있다. 저자는 각 시대별로 작품이 제 작되고 감상되어지는 '방식'이 엄존했다는 점을 하고 싶었던 것 이다. ' 모든 것이 모든 시대에 가능할 수는 없다.' 또 이 책을 통해 저자가 관찰/개진하려는 요지--미술사를 통해 등장하는 상 반되는 두가지의 주도적인 경향--을 서문에서 간략히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본문에서 수도 없이 반복강조되고 있다.

작가마다 개인양식이 존재하나, 그것은 곧 유파와 민족양식/정서로 복속되 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양식 → 민족양식 → 시대양 식 →'이라는 절차를 통해, '양식'의 흐름를 살펴보고 있다. 여 기서 다루는 그 2가지 상반된 양식이란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 스와 17세기 북유럽 바로크 양식을 이르는 것이다. 이 두 양식의 대비는 5가지로 구분되어진다.

첫째: 선적인 것 → 회화적인 것 둘째: 평면적인 것 → 깊이감을 주는 것 세째: 폐쇄적인 것 → 개방적인 것 넷째: 다원적인 것 → 통일적인 것 다섯째: 명료한 것 → 불명료한 것 이상의 다섯개의 대조되는 항목들은 사실 크게 2개로 나뉘어서 서로 대비되는 성질을 띄게 된다. 1.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 전술한대로 선적인 것은 16세기를 대변하고, 회화적인 것은 17 세기의 속성이다. 좌우지간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의 차이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여기선 '선적인 것'이란, 촉각적-- 만질 수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뚜렷한 성질--이고 조각적인 속 성을 지닌 작품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미술은 결코 표현의 역사라고 단정하는 것은 일면적 오류를 범하 는 것이라고 결론부는 시작한다. 그게 무슨 얘기인가. 즉 각기 다른 시대의 양식을 나란히 비교 평가하는 것은 미술사에선 불가 능하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것들은 각기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 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은 늘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표현하고,감 상해왔다. 따라서 회화의 역사는 부수적 의미가 아니라, 본질적 의미에서 '장식사'이다. 새로운 제 형식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 에 대한 단면을 드러낸다. 민족적 특성에 따라, 남유럽의 전통 은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보기에, 선, 평면, 입방체등은 모두 인간중심적 사고의 반영이며, 북유럽 고딕의 전통은, 인간적 척 도르 초월하는 불가사이한 생동감으로 충만한다. ' 새로운 직관 양식에는 의례 새로운 세계상이 반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뇌내혁명 - 뇌 분비 호르몬이 당신의 인생을 바꾼다
하루야마 시게오 지음, 반광식 옮김 / 사람과책 / 199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96,97년경, 본고장인 일본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비소설분야 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腦內 革命』은 제목에서도 암시되듯 이,인간이 동물과 차별화되는 메리트로서의 뇌의 기능을 십분발 휘해서 '살맛나는 인생'을 살아보자는 내용을 담고있는 책이다. 일반 단행본들에 비해, 책의 사이즈도 작고 깜찍하게 디자인 되었 을 뿐 아니라 그에 비해 큰 활자에, 하드장정으로 덮인 이 책은 매력적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내가 이 책을 접하게 된 것도 어찌보면 일반 독자들과 엇비슷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우연히 「시사저널」7월초 에 발간된 어느 특집을 보니, 「뇌호흡」이라는 책과 그것을 창 안한 사람의 강의로 인해, 국내의 몇몇 소아들이 그 책을 탐독한 결과,'투시'능력을 연마해서 눈가리고도 책을 읽어내리는 장면이 도판으로 수록되어있었던 것이다.

그 만큼 뇌의 활용을 집중시켜서, 주의력을 한곳에 모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나처럼 산만하고 집중력 빵점인 사람은 솔깃하 지 않을 수 없는 기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뇌호 흡」말고도, 지금 소개하는 『腦內 革命』이라는 일본 著者의 책 도 간단히 소개되어 있었던 것이었고, 나도 일전에 서점에서 몇 번 뒤적인 기억이 있었기에(* 뒤적이기만 하고 구입하지 않았던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표지만 깔끔하고,,기존에 나온 뇌운동이 니, 우뇌발달촉진법 운운하는 책과 크게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 다.)다시 나를 충동질 한 것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병에 걸리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중요 하다. 2.뇌의 모르핀이 삶을 즐겁게 하고, 건강을 유지시켜주는 데, 모르핀 분비를위해서는 삶을 '긍정적'으로 사고하라. 3.술과 담배를 하더라도, 부담감(건강에 해롭다라는 생각)을 갖고 대하 지 않으면, 뇌에서 모르핀이 나온다. 4.격렬한 운동은 몸에 해로 우니, 가벼운 맨손체조를 익히자. 5.고단백질,저 칼로리인 음식 을 섭취하라.? 저자가 강변하는 내용은 하나도 새로울게 없는 건강수칙들이 다. 더 나아가, 한가지 문제삼을 것은 책 제목에 기대어서 괜히 수험생들이 읽기에 적당한 책으로 오인해선 안된다는 것. 왜냐면 뇌의 활용과는 그다지 상관없이 이 책은 일반적인 건강지침서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있기 때문이다.

또, 책중간중간에 예고없이 (?) 튀어나오는 '조물주가 어쩌고...' '창조주의 의지가 작용하 고...'하는 식의 종교적 발언은 특히 눈에 거슬린다. 그렇다. 이 책은 해악은 종교적 교훈주의를 본문속에서 수시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인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요새 교내폭력이 니, 인륜의 붕괴니 하는 것을 한탄하면서 그런것을 바로 잡기위 해서라도 긍정적인 플러스(+)사고와 정신건강이 필요하다는 식으 로 윤리적인 차원의 문제들을 자신의 건강증진법의 사례에 끌어 들여서 논의를 진행시킨다는 점이다. 저자의 요지는 간단하다.

삶의 모순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고,( 즉 비판의지를 최대한 억 제하고) 나쁜것도 좋게 보아 넘길때,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 다는 것이다. 정말로 건강이 이 세상의 지상과제인 50-70대 중,노년층에게 적 합한 설법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건강은 중요하다. 하지만 저 자는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다. 그가 강변하는 건강은 외면상 드 러나는 '육체적 안정감', 그 이상은 아니다.

그에게 절망이니, 좌절이니, 자살욕구니, 하는 것은 한 켠에 몰아넣고는 인생에 있 어서 불필요한 요소로서, 설레임 없이 이분해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에서 본받아야 마땅한 삶의 사례나, 인물상을 보면, 그들도 모두 하나같이 긍정적인 삶만을 추구했는가? 니체는 어떤가? 보들레르는 또 어떤가? 쇼펜하우어는 어떤가? 그들의 비관주의와 허무주의는 '건강에 해롭다는 이유만으로 거 세되어야 하는가? 『腦內 革命』의 著者가 지향하는 인간상은 그야말로 비판의지가 최대한 거세된 수동적인 인간상의 전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 기억에 「월간미술」97년 4월호인지 5월호인지에, '한국의 미술비평가들은 누구인가?' 뭐 대충 이런 제목을 달고 특집기사 가 수록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우리나라에서 소위 미술이론/미 술비평/미술사/미학...등에 종사하는 학자,직업인들로부터 설문 조사를 한 가운데, 영향받은 책이란 것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 소개하는 하우저의 『 文學과 藝術의 社會史 』이다. 이책은 51년 런던에서 출간된 것을 처음으로 전 세계적으로 번 역출간되었는데, 국내에서는 「창작과 비평」66년 가을호에까지 번역소개되어다가, 이후 단행본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이 책의 특징은 제목대로 문학과 예술장르 전역을 당대의 사회 학적 입장에서 풀이해석 한 것인데, 일단 여기 소개하는 '현대 편'만을 두고 볼때, 호락호락한 책은 아니라는 것. 하물며, 국내 의 학자들이 너도 나도 좋다는데, 나만 어렵다고 발뺌할 수는 없 는 노릇. 이 책은 총 5장으로 나뉘어있는데, 특히 1장과 2장에서 는 19세기의 기점을 1830년 프랑스 7월혁명으로 상정해야하는 이 유와 그 당시의 문학계 사정 요컨대 연재소설과 문학의 통속화등 이 다뤄지고 있으며, 1845년 나폴레옹 집정후, 문학과 예술의 제 경향에 두드러지는 '자연주의'(사실주의와 엇비슷한 경향)경향을 분석한다. (* 솔직히 내용을 정리해야 옳으나, 내가 벌써 내용을 다 까먹고 말았다!!)

흥미있는 것은 4장 '印象主義'와 5장 '映畵의 時代' 인데, 인상주의의 등장을 당시 자본사회의 등장과 결부해서 설명 하는 법이나, '지금 여기'의 동시대에 대한 집착이 인상주의와 결부되는 과정, 인상주의의 우연성과 순간포착능력이 미술이나 문학에서 반영된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19세기를 인상주의라는 큰 우산속에 있었다고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장의 결말에 가서는 니체와 프로이트식의 심리학과 허무주의 역시, 현재에 대한 불안과 리비도의 충동등은 인상주의식의 사고 방식(순간,착각,우연에 관한)에 기인했다고 결론내린다. 영화의 시대를 읽어보면 한편으론 재미난 부분도 많다. 왜냐면 하우저 자신이 이 책을 저술한 시기는 50년대초반인 반면, 2000년을 눈 앞에 둔 영화의 역사는 계속 진보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40여년 전 내린 영화에 대한 정의는 그다지 새롭게 보이진 않으며, 어떤 면에선 지금의 정황과 비교해볼때, 어긋나는 점도 눈에 띄기 때 문이다. 가령 다른 예술장르는 그만의 어법이 있는반면 영화는 아무나 와서 봐도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얘기가 있다. 물론 그것은 당 대의 영화에게는 적합한 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영화어법이 구사 되는 현대의 영화에서는 쉽게 재단하기 힘든 대목이다.

하지만 하우저는 명석하다!! 그는 그런 문장 바로 아래에 '다음세데에만 가도 영화의 표현수단을 다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르며, 이 분 야에서도 전문가와 문외한을 가르는 분열이 조만간 생길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예고하기 때문이다. 영화로 인해, 동시성과 세계주의의 시대가 개막했고 그것은 시 대적으로 베르그송의 시간개념과 결부된다는 등의 얘기가 거론된 다.

그는 제목에서 처럼 영화의 시대가 왔고, 영화로 인해, 대 중들이 예술에 동참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으며, ' 우리의 과제는 다수 대중의 현재 시야에 맞게 예술을 제약할 것이 아니 라 대중의 시야를 될 수 있는 한 넓히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는 '예술의 판단능력을 기르고 훈련하는데' 그 방법이 있다고 한 다. ' 발전을 자의적으로 중단하는 것은 항상 해결해야 할 문제의 회 피가 되고 만다는 데에 큰 난점이 있다.

즉 문제가 생기지 않는 상태를 조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해결책을 발견하는 일을 연기 하는 것 밖에 안된다는 것이다.'라고 충고한다. 일전에 영화 검 열철폐와 관련하여,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씨가 검열이 없이는 퇴폐,저질영화를 나을지도 모른다는 각개의 '우려'에 대해, '제 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걱정보다 한번이라도 우리 영화(혹은 문 화활동 전반)에게 기회를 줘보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한 것이 새삼 떠오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의 제2복음 1
주제 사라마구 지음 / 문학수첩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더러 읽어두긴 해야겠는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신문이나 잡지의 관심/해당부분 을 오려서 보관해둔 경험이 대개들 있을 것이다. 나도 그때 읽으면 될 것을 훗날을 기약하며 대책없이 방치해두는 일이 자주 있다. 그러던 어느날, 캐비넷을 정리하 다가, 이미 며칠이 지나버린, 동아일보 문화란을 발견했는데, 내가 처박아둘 당시,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눈 여겨둔 사라마구의 [ 예수의 제2 복음 ] 기사를 발견했 다.

소설인 이 책은 제목으로 얼추 보기엔, 무슨 정통 기독교 강론을 소설화한 것 이 아닐까 짐작케 할런 지 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자, 로마 교황청에서 유감을 표시 했다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보면, '그게 아니다'라는 걸 알게된다. 내가 이 책을 보 고 있는 걸 누가 보더니, ' 이 책, [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같은 거 아닌가?'라고 묻는다. 내가 그 책을 안 봤으니, 알 턱이 없지만, 교회에서 '적'으로 규정하고 있 으며 신성모독적 글쓰기를 수행했다는 측면에선 공통점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저자, 사라마구는 한때 공산당원이었으며 부단히 권력과 부패한 종교집단 에 긴장관계를 유지해온 지식인이다. 그런 그의 눈에, 논리적 '모순투성'인, 성경(聖經)이 온전히 수용되었을 턱이 없 었을 것은 당연한 이치. 최근 무신론Atheism과 불가지론Agnosticism에 관심을 기울 이고 있는 내게, 픽션화되어 성경을 공격한 글이 있다는 것은 무게있는 수확이다. 내가 이해를 잘못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문열의 [ 사람의 아들 ]의 경우도, 내 가 치관 수정을 급진전 시키는데 일조했음은 부인할 수 없고, 나는 그것을 일종의 athe ism의 문학화된 표현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좌우간 이 소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성경에서 흔히 봉착하게 되는 여러 의문사 항들-그것을 의문시했을 경우, 통상 '신성모독'으로 내몰리기 마련인-에 대해, 상식 을 지닌 객관적 시선을 통해 재번안해낸 점일 것이다. 그러한 작가 사라마가의 검열 되지 않은 의심과 상상력이 교단을 긴장시켰을 거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 이 소설에선, 수태고지 비슷한 것을 받는 장면이 나오긴 하나, 사전에, 남편 요셉과 성관계를 먼저 갖도록 설정함으로서, '아기' 예수가 태어날 생물학적 근거를 전제시 키고 있다.

또 아버지 요셉이 헤롯왕의 지시(3살 미만의 아이던가??를 전부 몰살시 키라는 명령)를 미리 알아차리고는 자신의 아내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피난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아서, 무고한 생명들이 요셉의 침묵으로 죽음 을 당하게 만든 것 또한 이 소설에서 예수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즉 수많은 희 생을 통해 자신이 이 땅에 살아있음에 대한 죄책감-과 이기적 부친에 대한 극복의지 와 같은 끊임없는 딜레마로 작용한다. 그 밖에, 예수가 막달아 마리아와 동거를 하는 대목, 총각(?)이던 예수가 마리아 를 통해 성(性)에 대해 깨닫게되고, 그것을 통해 한층 성숙하게 된다는 소설 플롯은 인간적이다.

부분 부분 예수가 그의 제 2의 아버지(?)인 하느님에게 회의를 드러 내고, 의문을 제기하는 대목, 하느님보다 악마의 논리가 보다 인간적인 대목등도 눈 여겨 볼 만하다. 특히 성경에서 설정하고 있는 '이기적인 신'에 대해, 소설에선 예 수가 어린 양을 불쌍이 여겨, 제물로 바칠 것을 거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아래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들(경배자)은 모두 같은 제물을 바치고, 천상의 하느님 은 이 모든 학살의 향기를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들이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번역자의 번역은 좀 거칠고 너무 직역이어서 읽는데 방해가 된다.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난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