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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작가의 '창백한 불꽃'은 읽는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처음 접하는 형식의 책이라서 보는 내내 머릿속에 물음표가 떴고 내가 모르는 게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그렇구나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 책이라 할 수 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더라
'창백한 불꽃'은 머리말, 시, 주석, 색인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이렇게 보면 시만 본문이고 나머지는 그냥 작가의 말 정도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머리말에 들어간 순간부터 그 생각은 깨지고 만다 이미 나보코프의 책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머리말에서는 존 셰이드라는 시인이 시를 썼다고 한다 게다가 그 시인은 실제로는 없는 인물이다 뭔가 이상하다 머리말을 쓴 사람도 나보코프가 아니라 킨보트라는 사람이고 그가 말하는 방식도 일반적이지 않다 굉장히 불만스러우면서도 자기 얘기를 많이 한다 마치 킨보트가 모든 걸 쓴 것처럼 느껴진다 주석 먼저 보고 시를 읽으라고까지 했지만 순서대로 읽는 걸 좋아해서 무시하고 그냥 읽었다 주석 먼저 읽거나 시와 주석을 번갈이 읽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다시 읽기에는 지쳐서 나중에 기운이 나면 번갈아 읽어 볼까 싶다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시 부분 역시 보통의 시랑은 다른 느낌이다 시보단 짧은 단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완벽하게 소설같다고 할 수 도 없다 솔직히 잘 이해를 못하겠는 내용이다 총 4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 생각에는 존 셰이드 시인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제 2편 부분이 제일 기억에 남는데 존과 시빌의 딸인 그애가 공감도 가고 안타깝기도 씁쓸하기도 하다 아마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남들이랑 어울리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저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건가 싶다 얼굴을 보고 데이트를 안 하다니 비참하다 그럴거면 나오지나 말지 소개해준 제인이라는 사람에게도 실망이다 이래서 소개는 신중해야 한다 그저 활자일 뿐인데도 짠하다
시를 지나고 나면 주석이 있는데 이 부분이 책의 한 3분의 2정도를 차지한다 보통의 소설들은 절대로 이런 구조가 아니다 시를 막 썼다는 건 아니지만 사실상 주석 부분이 책의 핵심으로 보인다 시와 주석이 연결이 바로 바로 되지도 않는데 그건 킨보트가 자기 멋대로 주석을 썼다는 걸 반증하는 걸까 내가 이해를 잘 못하는 걸까 고민된다 주석이 일관적이지 않은데 킨보트와 존과의 우정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만난 이야기들을 해주다가도 중요 포인트인 젬블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딴 이야기를 하고 그런다 그래서 상당히 정신사나운 편이다
주석에서 풀어내는 젬블라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운 편이다 솔직히 시에서 어거지로 끌어낸, 그러니까 시는 그런 내용을 쓰려고 한 게 아닌데 킨보트가 끼어맞췄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튼 젬블라 이야기는 재미있는 편이다 물론 젬블라 이야기도 굉장히 섬세하고 많은 미사여구와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주석 내용보다는 덜 복잡하다 이것만 단독으로 소설로 냈으면 더 집중도 잘 되고 이해도 쉬웠을 거라는 생각이다 카를2세가 탈출하기 까지 두근두근해서 이야기가 딴쪽으로 넘어가면 못참고 뒤를 넘겨보고 싶었지만 잘 참았다 그런데 아 읽고 보면 뒤로 넘겨봐도 됐을 것 같다 각각의 이야기들을 새로 묶어서 읽어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젬블라는 젬블라대로 읽고 존의 이야기는 존대로 읽고 그런 식으로 말이다 나중에는 연결되는 부분이 나오니까 괜찮은 읽기 방법이다 나중에 책 내용이 희미해지면 다시 도전해보련다
책의 화자는 시를 쓴 존과 머리말, 주석을 쓴 킨보트인데 끝까지 다 읽고 나면 킨보트에 대한 의심이 어떤 방식으로든 생기기 마련이라 어쩌면 시도 킨보트가 쓰고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 경우일 수도 있다 워낙 책에 보이는 킨보트의 모습이 망상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시인 존에게 굉장히 집착하면서 존의 아내인 시빌에게는 적개심을 갖고 있다 마치 자신과 존 사이의 방해물인 것처럼 시빌을 생각하는데 소름이 끼친다 둘, 정확히는 존을 염탐하는 겸 시빌도 하는 거지만 아무튼 둘을 지켜보고 접근하려고 하는데 킨보트가 화자임에도 불구하고 징그럽게 느껴진다 마치 롤리타를 읽을 때 험버트를 보는 기분이다 그정도로 혐오스럽지는 않지만 비슷한 느낌이다 자신의 일을 포장해가면서 쓰는 데도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겠고 추잡하다는 게 느껴지는 그런 인물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시빌은 물론이거니와 존도 킨보트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 같은데 마치 절친인것처럼 말하는 게 우습다 존의 시 역시 킨보트가 알려준 젬블라에 대해서 쓴 거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데 주석에서 우기는 모습도 역시 망상증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나보코프 작가는 등장인물의 생각을 의심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생각하게 하고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다 나오는 주요 인물이 어느 면에서는 박식하고 겉모습도 괜찮게 묘사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에 정이 간다거나 좋아하게 되지 않는다 싫어하게 되기는 한다 읽은 거라곤 ‘롤리타’와 ‘창백한 불꽃’뿐이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특정 생각이나 행동을 냉소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 책을 썼다고 본다 그것도 온갖 형식을 파괴하면서 썼다 존이 죽으면서(실존인물은 아니지만) 미완성이 되어 버린 시를 내놓은데다가 그 시의 형태도 특이하다 주석을 말도 안되게 길게 하는 등 소설의 형식 역시 파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라는 생각은 든다 개인적으로 정신없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특이해서 기억에 오래 남을 작품이다
책에 “인간의 삶이란 난해한 미완성 시에 붙인 주석 같은 것”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따로 적어뒀다 이 책에 잘 맞는 문장이다 난해한 미완성 시에 붙인 주석이란 표현 자체가 ‘창백한 불꽃’에 나온 주석이랑 딱 맞아 떨어진다 그렇게 보면 이 책 자체가 인간의 삶에 대해서 썼다고 볼 수 있기도 하다 다양한 인간군상과 얽혀 있고 아름답지만은 않고 때로는 과대하게, 또 때로는 과소하게 생각하게 되기도 하는 인간의 삶 그 자체다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지도 모르겠고 내가 잘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끝이 나도 끝이 아니라는 생각과 결국 진실은 뭘까? 진실이 있기는 한가? 의문점을 남긴다는 점이 더욱 인간의 삶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