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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 쓸개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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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은 참으로 할 말이 많은 듯하다. 어찌나 할 말이 많은지 첫 소설집을 낸 2005년부터 2011년까지 매년 1년에 한 권 이상 우리에게 소설집이나 장편 소설을 들이밀었다. 이토록 열정적이고 성실한 작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 잡설은 이만 줄이고, 김숨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자. 김숨의 소설은 우리가 즐겨하는 여타의 많은 소설들과 달리 별로 희망적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대다수의 작품에서 그는 철저히 희망을 배제했다. 유쾌함은 물론 찾아볼 수 없고, 잠시 떠오르는 미소조차 그는 지우려고 든다. 그의 소설은 그로테스크하고, 그의 소설은 환상적이며의 소설은 그러나 슬프게도 암울하다. 그러한 점에 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이 암울하기 때문에 현실이 불행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현실이 암울하기 때문에 소설도 암울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 김숨의 소설은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투영이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철저히 희망이 배제된 그의 세계 속에서, ‘환상’조차 긍정이나 낙관을 이끌어내는 출구로서가 아니라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돋보기로서 사용된다.─결코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검은 길만으로 세상과 이어진, 아나와 글로리아가 갇혀 사는 소재불명의 숲이라든지(「지진과 박쥐의 숲」), 사당이 불탄 곳에서 나타난, 소년 소녀의 화신인 검은 염소들이라든지(「검은 염소 세 마리」), 현실의 ‘나’는 결코 만날 수도, 직접 실현할 수도 없는 머나먼 아랍의 ‘유리눈물을 흘리는 소녀’(「유리눈물을 흘리는 소녀」) 같은 것들─

때문에 김숨의 소설은 그로테스크할 수밖에 없다. 현실에 없는 그로테스크한 부분을 그는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다. 모두 현실에서 갓 튀어나온 그로테스크이기에 우리는 그토록 직시하기 불편해지는 것이다. 눈앞에 있었으나 애써 없는 것처럼 눈 돌리며 살아왔던 것들을 그는 부각하고 확대하여 우리에게 들이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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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죄인들 문지 푸른 문학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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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몇 권의 책을 출판하는 동안 경험치가 쌓여서일까, 작가의 역량이 훌쩍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장은 매끄럽고 화소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짤막, 짤막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구성을 취했음에도 쉽게 잘 읽힌다.

청소년 소설, 성장 소설로 분류되는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은 김숨의 소설 중에는 조금 이레귤러다. 물론 청소년 소설이라는 밝고 유쾌한 분류를 뒤집어쓰고 있으면서도 이처럼 ‘절망뿐인 생의 단면’을, 그로테스크하지만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소설은 “역시 김숨!” 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다만 이 소설에는 김숨의 다른 소설들에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배제되었을, ‘그러나 희망이 들어찬 또 다른 생의 단면’ 또한 그려내고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장편에서 김숨의 다른 소설이 아니라 이 소설을 다루기로 했다. 김숨의 시선이 단지 절망만을 직시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우리가 많이 보아온 인물들을 저변에 깔고 시작된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시골 할머니 댁에 맡겨진 화자 동화(冬花). 백 밤만 자면 돌아온다는 아버지. 집 나간 어머니. 괴팍하고 성질 더러운 할머니, 동화의 이름을 뱉고는 쓰러졌다는 할아버지……. 일곱 살 어린 동화의 순수한 눈에 비치는 현실은 그러나 너무도 독하다. 때문에 동화도 독해진다. 쉴 새 없이 까야 하는 마늘 독이 오르는 만큼, 그리고 떠나가는 사람들의 수만큼. 그러니 독해진 이 소녀를 그 누가 미워할 수 있으랴.

 

떠나지도 죽지도 못하고 형의 담배 농사를 짓는 지랄병 환자 장대 아저씨.

죽은 아들을 산 여자와 결혼시키려 하는 인자 아줌마.

수많은 삶과 죽음을 반복해왔다는 옥천 할마.

죄가 됨을 알고 있으면서 사랑밖에 할 수 없는 춘자 고모.

문둥병자 아버지를 가진, 제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무서워하는 방앗간 집 색시.

혼란스러운 폭력 속에, 소통하지 못하는 외지의 삶을 사는 축사 사람들.

태내의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미혼모 정희 언니.

 

……작가의 말에 언급된 것처럼, 이 소설은 ‘목숨’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나 그들이 두려워하는 ‘목숨’이란 죽는 것만이 아니다. 죽음 또한 그렇지만, 그들은 죽기를 두려워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살기를 두려워한다. 살아간, 살아가는, 살아갈 사람들을 그들은 너무나도 두려워한다. 살아있기에 그들은 죄인이다. 그들에게 있어 삶이란 ‘죄’이자 ‘벌’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죄와 벌의 세계에서 그들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생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죽음조차 그들에게 안식을 주지 않는다. 단 한 사람, 하루 같은 백년의 생을 딱 채우고 죽은 옥천 할마를 제외하고 안식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말에까지 장대 아저씨는 여태 신작로 위에서 헤매고 있으며, 인자 아줌마는 누구의 이해도 위안도 받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춘자 고모는 결국 공장 인부와 눈이 맞아 달아났으며, 정희 언니는 결국 구미에서인가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그 답답하고 절망적인 이미지를, 동화는 이렇게 드러낸다.

 

나는 거울을 닦는 동안 마을 사람 전부가 실은 거울 속에 갇혀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쑥불쑥 갖고는 했다. 죽어도 골백번은 죽었다던 옥천 할마마저도. 그러니까, 쌀뜨물처럼 흐린 거울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리고 말 존재들로 살아가고 있다는…… 어쩌면 나는 마을에 존재하는 모든 거울을, 깨알만 한 얼룩 한 점도 없도록 말끔히 닦아 놓은 뒤에야 이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아놓은 뒤에야,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오는 것이 아닐까.

 

예로부터 거울이 가진 이미지란 환상적이면서도 이질적이었다. 거울 속에 존재할지 모르는 다른 세계에의 환상을 우리는 수십 번도 더 공상해보았으리라. 하지만 굳이 그러한 보편적 이미지가 아니더라도, 이 소설 안에서 ‘거울 저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통해 거울이 상징하는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의 유리를 드러낸다. 동화는 마을을 거울에 갇힌 또 다른 세계, 즉 ‘환상’으로 대치시키는 것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절망적인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진짜 세계는 이렇게 ‘흐리멍덩’하고, ‘몽롱하고 기괴하게 뭉개진’ 것이 아니라 ‘깨알만 한 얼룩 한 점도 없도록 말끔’한 곳이리라고. 그러나 이러한 어렴풋한 환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깨어져간다.

 

나는 거울을 깨뜨리기로 작정했다.

(중략)나는 못으로 거울의 한가운데를 힘껏 찍었다. 거울에 금이 가며, 거울이 품고 있는 내 얼굴에도 금이 갔다.

거울이 우스꽝스러울 만큼 쉽게 깨져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불현 듯, 할머니의 거울뿐만 아니라 마을의 모든 거울을 깨뜨려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요놈의 거울도 명이 다한 모양이구나.”

“명?”

“사람만 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거울도 명이 있지.”

(중략)그렇다면 할머니의 물건들은 죄다 명이 다해서 금 가고, 부러지고, 색이 바랬나? 할머니도 명이 다해서, 밤마다 약을 한 주먹씩 먹고 잠드는데도 안 아픈 곳이 없는 걸까?

나는 명이라는 것이, 목숨이라는 것이 무서워 후드득 어깨를 떨었다.

 

거울을 깨뜨렸는데도, 나는 마을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거울이 아니면, 무얼까? 무엇이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이렇게나 답답하게 가두고는 놓아주지 않는 걸까?

 

마을을 가두고 있던 거울들을 깨었음에도 마을은 흐리멍덩한 채인 것이다. 환상은 마치 거울이 깨지듯 ‘우스꽝스러울 만큼 쉽게’ 깨진다. 동화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실감되는 현실의, ‘명’이라는 ‘목숨’의 무게가 두려워 어깨를 떠는 것이다. 이렇듯 동화의 환상은 깨어져버렸으나 아직 그 파편만은 남아 있다. 거울의 환상에 배신당한 동화는 거울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마을을 답답하게 가두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환상의 작은 파편조차, 현실은 여지없이 용납하지 않는다.

 

장날, 할머니는 읍내에서 새 거울을 사다가 마루 기둥에 걸었다. 내가 깨뜨려버린 거울과 모양뿐 아니라 크기도 거의 비슷한 거울이었다. 새것이라는데도, 거울은 이상하리만치 흐리기만 했다. 후후 입김을 불어넣고는 옷소매를 끌어당겨 골똘히 훔쳤지만, 흐린 기운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거울이 원래부터 흐려터진 게 아니라, 마을에만 들여오면 저절로 흐려지는 것이 아닐까. 마을에만 들여오면, 백내장이 끼듯 흐릿한 기운이 거울을 뒤덮어버리는 게 아닐까.

 

이처럼 거울은 새 것임에도 마을에만 들어오면 백내장이 끼듯 흐릿해져버리는 것이다. 비로소 동화는 ‘마을’로 대치되는 ‘현실’이 진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절망적인 현실’임을 똑바로 인지하게 된 것이다. 환상에 갇혀 있기 때문에 현실이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흐린 현실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환상 또한 흐릿해지는 것이라고. 그럼에도 마지막 에피소드─에필로그를 제외한─에서까지 동화는 거울을 닦는다. 닦고 또 닦는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전과 같은 현실 도피의 상징이 아니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 동화는 현실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거울을 하도 닦아, 손목이 아프다 못해 손가락들이 굳어갈 즈음이었다. 꺼풀이 벗겨지듯, 거울을 휩싸고 있던 흐릿한 기운들이 점점 걷혔다. 어느 순간, 거울이 점점 투명하고 환해지더니 웬 여자아이의 얼굴이 거울 위로 떠올랐다.

여자아이는 거울 속에서, 불만에 찬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넌 누구냐……!”

(중략)내가 쏘아보면 쏘아볼수록, 여자아이는 더 매섭게 나를 쏘아보았다.

(중략)한순간, 나는 벼락이라도 맞듯 거울 속 여자아이의 얼굴이 내 얼굴임을 깨달았다. 다른 그 어떤 여자아이의 얼굴도 아닌, 내 얼굴임을.

(중략)“못생겨서 공순이나 되어야겠구나.”

 

거울을 닦다가 결국 동화는 자신의 ‘못생긴’ 얼굴을 직시하게 된다. 소설이 전개되는 동안 끊임없이 들어온 못생겼다는 말을 그렇게도 부정해왔던 동화다. 자신의 못생긴 얼굴이란 즉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상징한다. 이렇게 거울을 닦고 자신의 얼굴을 직시함으로써, 동화는 흐릿해진 거울 속에 숨겨왔던 자신의 현실을 비로소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주변에 있는 ‘죄인’들의 얼굴이 현실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대들은 결코 더러운 자와 깨끗한 자를, 악한 자와 선한 자를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마치 검은 실과 흰 실이 함께 짜여지듯이 태양의 얼굴 앞에 함께 서 있으므로.

 

그러나 그것이 ‘못생긴’ 현실에의 절망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들은 비록 못생기고 슬펐을지언정 악하거나 ‘진짜’ 죄인은 아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있다.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공순이나 되어야 할’ 정도로 못생긴 현실은 그러나 미치도록 그리운, ‘아름다운 죄인들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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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들 랜덤소설선 15
김숨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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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백치들』은 김숨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성장 소설이자 가족 소설이다. 다소 무기력하나 노동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사막의 공기처럼 숨을 쉴 때마다 모래가 씹히는 현실 속에 ‘백치’일 수밖에 없는 하층민들의 고단한 삶을 그려냈다. 초기작이라서 그런지, 사실 이 소설은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장편임에도 마치 단편 여러 개를 하나로 뭉그려 놓은 것 같은 답답한 느낌이 있다. 시를 쓰고 싶은 마음으로 썼다니,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여기저기 서사가 끊기는 느낌도 많이 든다. 동어의 반복과 순서의 어긋남도 근근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래. 높은 기대에 못 미쳤을 뿐이지 분명 느껴지는 바가 있는 소설이다.

 

소설은 ‘50억년의 시간 동안 사막을 건너온 사람’ 같은 아버지가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귀환한 이 중동 근로자는 한 삽의 모래를 가져왔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좀처럼 쓸리지도 않으며, 즉 무의미한. 아버지가 몰고 온 그런 모래에 오빠는 완전히 침식되고, 심지어는 나조차도 모래에 잠기는 경험을 한다.

구장동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이 소설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당숙어른─ 모두 백치다. 백치, 백치, 백수. 실제적으로 ‘백수’는 아니더라도, 아무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며 시간을 죽이는 게 백치들의 일이다. 소진 아저씨는 영화를 보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유일한 낙이고, 세탁소를 하는 국경 아저씨는 밤마다 토해낸 실로 자식들을 덮는다. 도배장이인 희야 아저씨는 시도 때도 없이 자며 깨어나는 것을 공포로 여기고, 도식 아저씨는 혀가 되어 식욕만을 탐한다. 아버지처럼 중동 근로자였던 만우 아저씨는 사막에서 1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돌아왔다. 나중에 보험 회사에 취직을 한 그는 정확히 32일 만에 잘리고 백치로 돌아간다. 이런 백치들의 무의미한 삶이야말로 이 소설을 이루고 있는 화소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아버지가 가져온 한 삽의 모래와도 같다. 백치들은 처음부터 모래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은 채 끝까지 모래다. 심지어는 다른 이─오빠를 침식하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은 아무도 ‘변화’따위 하지 않고, 다음 세대에서 변화해나갈 의지의 ‘승화’ 같은 것도 없다. 『백치들』의 배경이 되는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많은 소설들에서 보여주는 ‘저항의식’이나 ‘변화의지’ 같은 생명력을 백치들은 품고 있지 않다. 그저 사막의 모래가 쓸려가듯, 집이 무너져 등껍질이 되듯 쓸쓸히 풍화되어갈 뿐이다. 백치들은 그저 떠났다가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는다. 슬프고 슬프다. 주위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백치들에게서 김숨의 시선이 얼마나 차가운 현실을 주시하고 있는지 우리는 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단편 「트럭」에서 보여준 ‘죄’의 계승이 『백치들』에서는 ‘백치가 되는 것’으로 반복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트럭」의 결말에 나타난 ‘환한 길’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가슴에는 의수가 꽂히고, 오빠는 사막을 향해 달려가고, 인영은 한줌 모래가 되는 동안, 백치들에게는 「트럭」의 아버지에게 주어지는 큰자식과의 상호 이해 같은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트럭」에서와 달리 이 아버지는 무기력한 백치일 뿐 트럭 적재함과 같은 ‘아늑한 장소’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 옥상의 이미지가 트럭 적재함과 비슷하다고는 하나 그 속성은 조금 다르다. 백치들이 모이는 옥상은 백치들끼리의 내부적 이해의 장은 될 수 있을지언정 자식들 혹은 여타의 사람들에게서는 유리된 공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끝내 그들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살다가 뿔뿔이 흩어져 버릴 뿐이다.─소진 아저씨는 서울, 도식 아저씨는 장애인 보호 시설, 희야 아저씨는 잠, 만우 아저씨는 원양어선인지 어딘지 알 수 없는 어딘가로…….

 

그러나 김숨의 소설이 그런 극단적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에만 물들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당숙어른’은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백치들이 갖지 못한 ‘의지’를 그는 유일하게 지니고 있다.

 

‘저기…… 저…… 한 그루의 나무를 쓰러뜨릴 수 있느냐 쓰러뜨릴 수 없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저기…… 저…… 한 그루의 나무가 품고 있는 기운을 극복하느냐 극복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단다…….’

‘한 번인가는 수령 3백 년도 더 된 적송을 쓰러뜨려야만 했단다. 사흘 내내 적송을 떠나지 못했지. 내가 죽어 넘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적송을 쓰러뜨리고야 말 작정이었다.(후략)’

 

비록 직접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나, 당숙어른은 사흘 동안이나 적송 쓰러뜨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당숙어른은 폐결핵에 걸려서 막노동을 견디기 힘들어진 뒤에도 나막신 만들기, 즉 ‘노동’을 그만두지 않았다. 비록 집을 짓는 목수도, 큰 벌목꾼도 되지 못하였으나 의지만큼은 계속된 것이다. 백치들 중 하나인 만우 아저씨가 겨우 출근 20일 만에 일을 놓고 놀기 시작한 것과는 아주 상반되는 모습이다.

이러한 다른 인물들과 당숙어른 간의 차별화는 인물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당숙어른이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보석보다도 경이로워하지만, 백치가 된 그 아들이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혐오한다. 두 눈물이 가진 다른 점은 뭘까. 씁쓸해진다.

다만 이러한 ‘저항’을 작가는 결국 이기지 못할 싸움으로 묘사한다.

 

‘(전략)그러나 적송을 쓰러뜨린 이는 내가 아니었다.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 사기막에서 태어나고 자란 황씨라는 사내였는데, 적송을 쓰러뜨리고 1년도 안 되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지.’

 

나무를 쓰러뜨린 황씨는 비록 나무와의 기운을 극복했으나 1년도 안 되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또 당숙어른은 어떤가. 자살의 충동에서도 아들에게 물려줄 제사를 생각해 삶을 이어간 그는, 결국 아들이 교도소에서 나오기 전에 선풍기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그런 그의 죽음은 ‘열아홉 켤레씩이나’ 되는 나막신을 남겨두었다. ‘무의미’와 ‘백치’의 상징인 모래밖에 남길 수 없는 아버지와 달리 확실한 흔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당숙어른과 다른 백치들을 구별하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소재가 된다.

그것을 백치인 아버지는 동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열아홉 켤레씩이나 되는 나막신은 아버지에게 너무나 먼 것이기에 또한 질투했던 건지도 모른다. 분명 그 때문에 나막신을 ‘사막의 모래 속에’ 파묻은 것이겠지. 당숙어른을 자신과 같은 ‘모래’의 위치로 끌어내리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열여섯 살 어린 당숙어른이 모래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중략) 당숙어른은 한 그루의 나무를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 전에 한 그루의 나무에 가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중략) 당숙어른은 나무가 품고 있는 기운과 자신이 품고 있는 기운을 겨루었다. (중략) 뼈와 살과 피가 마르고 말라 뜨거운 모래 알갱이로 흩어질 때까지…….

 

그러니 마지막 장면의 모래사막에서 화자인 내가 발견하는 것은 아버지도, 오빠도, 다른 백치들도 아닌 당숙어른일 수밖에 없다. 모래에서도 그 ‘의지’를 잃지 않고, 오히려 젊음의 모습으로 기운을 겨루는, 당숙어른의 환상. 이기지 못하고 종내는 모래 알갱이로 흩어져갈지언정 기운을 다해 도전하는 그 모습. 무력하고 슬픈 우리네 ‘백치들’ 같은 현실에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짤막한 에필로그가 더 있지만, 그것은 결국 가라앉은 집을 등껍질처럼 지고 자라처럼 일체화된 당숙어른의 아들이 맺은 한 결말일 뿐이다. ‘나’의 이야기는 이 장면과 ‘동경과 기대와 경이가 사라진’ 백치가 되어 돌아올 오빠를 기다리는 것으로, 이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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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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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는 김숨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침대』를 읽으며 우리는 첫 번째 소설집인 투견에 비해 소설의 소재나 성격적인 면에서 많은 확장을 이루어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소설집 『침대』 앞쪽의 소설들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난해한 소설이 주로 묶인 반면, 뒤쪽의 소설들은 조금 더 현실성에 발을 딛고 이야기를 전개했다. 또한 맨 뒤의 「트럭」에는 환상 같은 건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인지 하나의 소설집으로 묶였지만 『투견』과 달리 전체가 어떤 성격을 지녔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다만 「트럭」을 배제한다면, 소설들이 가진 희미한 ‘공통’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낯선 자들의 방문이다.

 

오후 두 시에 방문할 예정인 ‘관리자’와 통보도 없이 들이닥친 ‘그들’(「409호의 유방」)

그녀에게 침대를 떠맡긴 ‘그들’과, 그와는 달리 종교적이며 도덕적으로 보이는 ‘그들’(「침대」)

‘철거단원’들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해 방문한 ‘손님들’(「손님들」)

12년간 자리를 지켜온 박의 철제 책상을 옮기는 ‘관리부 직원들’(「박의 책상」)

만능열쇠를 갖고 있었다고 고백한 ‘열쇠공’(「두번째 서랍」)

느닷없이 철문을 열고 들어와 닭들을 모두 없애버린 ‘군인들’(「도축업자들」)

쌀과 소금이 다 마르는 날 항아리를 가지러 올 거라는 ‘늙은 여자’(「쌀과 소금」)…….

 

이러한 낯선 방문자들 앞에 무너져 내리는 현실을, 그리고 ‘자아’에 대한 침략이거나 표출을 김숨은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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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견
김숨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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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투견』은 김숨의 첫 단편 소설집이다. 초기작이라 조금 투박하고 제련이 덜 된 그것은, 그러나 충분히 뛰어나다. 소설집 『투견』은 ‘감금’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니게 되는 물리적, 그리고 심리적 감금의 이미지. 강요된 안정이 가져오는 불완전. 혹은 현실에 발목 잡힌 환상들을.


그의 소설은 마치 한약이다. 컵에 따라둔 채 마시기 싫어 오랫동안 방치해둔 한약. 들이켜 보면 다소 탁하지만 마실 만한 물─그로테스크와 환상 밑에는 지독하게도 쓴 약재─현실이 침전되어 있다. 그렇다고 쓴 약재를 우리는 뱉을 수도 없다. 침전된 약재는 결국 우리 존재를 이루는 근간과도 이미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 그의 쓰디쓴 소설을 이제 직시하고 마시도록 하자. 그것은 결코 유쾌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암울한 일인 것만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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