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죄인들 문지 푸른 문학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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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몇 권의 책을 출판하는 동안 경험치가 쌓여서일까, 작가의 역량이 훌쩍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장은 매끄럽고 화소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짤막, 짤막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구성을 취했음에도 쉽게 잘 읽힌다.

청소년 소설, 성장 소설로 분류되는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은 김숨의 소설 중에는 조금 이레귤러다. 물론 청소년 소설이라는 밝고 유쾌한 분류를 뒤집어쓰고 있으면서도 이처럼 ‘절망뿐인 생의 단면’을, 그로테스크하지만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소설은 “역시 김숨!” 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다만 이 소설에는 김숨의 다른 소설들에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배제되었을, ‘그러나 희망이 들어찬 또 다른 생의 단면’ 또한 그려내고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장편에서 김숨의 다른 소설이 아니라 이 소설을 다루기로 했다. 김숨의 시선이 단지 절망만을 직시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우리가 많이 보아온 인물들을 저변에 깔고 시작된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시골 할머니 댁에 맡겨진 화자 동화(冬花). 백 밤만 자면 돌아온다는 아버지. 집 나간 어머니. 괴팍하고 성질 더러운 할머니, 동화의 이름을 뱉고는 쓰러졌다는 할아버지……. 일곱 살 어린 동화의 순수한 눈에 비치는 현실은 그러나 너무도 독하다. 때문에 동화도 독해진다. 쉴 새 없이 까야 하는 마늘 독이 오르는 만큼, 그리고 떠나가는 사람들의 수만큼. 그러니 독해진 이 소녀를 그 누가 미워할 수 있으랴.

 

떠나지도 죽지도 못하고 형의 담배 농사를 짓는 지랄병 환자 장대 아저씨.

죽은 아들을 산 여자와 결혼시키려 하는 인자 아줌마.

수많은 삶과 죽음을 반복해왔다는 옥천 할마.

죄가 됨을 알고 있으면서 사랑밖에 할 수 없는 춘자 고모.

문둥병자 아버지를 가진, 제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무서워하는 방앗간 집 색시.

혼란스러운 폭력 속에, 소통하지 못하는 외지의 삶을 사는 축사 사람들.

태내의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미혼모 정희 언니.

 

……작가의 말에 언급된 것처럼, 이 소설은 ‘목숨’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나 그들이 두려워하는 ‘목숨’이란 죽는 것만이 아니다. 죽음 또한 그렇지만, 그들은 죽기를 두려워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살기를 두려워한다. 살아간, 살아가는, 살아갈 사람들을 그들은 너무나도 두려워한다. 살아있기에 그들은 죄인이다. 그들에게 있어 삶이란 ‘죄’이자 ‘벌’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죄와 벌의 세계에서 그들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생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죽음조차 그들에게 안식을 주지 않는다. 단 한 사람, 하루 같은 백년의 생을 딱 채우고 죽은 옥천 할마를 제외하고 안식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말에까지 장대 아저씨는 여태 신작로 위에서 헤매고 있으며, 인자 아줌마는 누구의 이해도 위안도 받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춘자 고모는 결국 공장 인부와 눈이 맞아 달아났으며, 정희 언니는 결국 구미에서인가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그 답답하고 절망적인 이미지를, 동화는 이렇게 드러낸다.

 

나는 거울을 닦는 동안 마을 사람 전부가 실은 거울 속에 갇혀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쑥불쑥 갖고는 했다. 죽어도 골백번은 죽었다던 옥천 할마마저도. 그러니까, 쌀뜨물처럼 흐린 거울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리고 말 존재들로 살아가고 있다는…… 어쩌면 나는 마을에 존재하는 모든 거울을, 깨알만 한 얼룩 한 점도 없도록 말끔히 닦아 놓은 뒤에야 이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아놓은 뒤에야,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오는 것이 아닐까.

 

예로부터 거울이 가진 이미지란 환상적이면서도 이질적이었다. 거울 속에 존재할지 모르는 다른 세계에의 환상을 우리는 수십 번도 더 공상해보았으리라. 하지만 굳이 그러한 보편적 이미지가 아니더라도, 이 소설 안에서 ‘거울 저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통해 거울이 상징하는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의 유리를 드러낸다. 동화는 마을을 거울에 갇힌 또 다른 세계, 즉 ‘환상’으로 대치시키는 것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절망적인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진짜 세계는 이렇게 ‘흐리멍덩’하고, ‘몽롱하고 기괴하게 뭉개진’ 것이 아니라 ‘깨알만 한 얼룩 한 점도 없도록 말끔’한 곳이리라고. 그러나 이러한 어렴풋한 환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깨어져간다.

 

나는 거울을 깨뜨리기로 작정했다.

(중략)나는 못으로 거울의 한가운데를 힘껏 찍었다. 거울에 금이 가며, 거울이 품고 있는 내 얼굴에도 금이 갔다.

거울이 우스꽝스러울 만큼 쉽게 깨져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불현 듯, 할머니의 거울뿐만 아니라 마을의 모든 거울을 깨뜨려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요놈의 거울도 명이 다한 모양이구나.”

“명?”

“사람만 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거울도 명이 있지.”

(중략)그렇다면 할머니의 물건들은 죄다 명이 다해서 금 가고, 부러지고, 색이 바랬나? 할머니도 명이 다해서, 밤마다 약을 한 주먹씩 먹고 잠드는데도 안 아픈 곳이 없는 걸까?

나는 명이라는 것이, 목숨이라는 것이 무서워 후드득 어깨를 떨었다.

 

거울을 깨뜨렸는데도, 나는 마을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거울이 아니면, 무얼까? 무엇이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이렇게나 답답하게 가두고는 놓아주지 않는 걸까?

 

마을을 가두고 있던 거울들을 깨었음에도 마을은 흐리멍덩한 채인 것이다. 환상은 마치 거울이 깨지듯 ‘우스꽝스러울 만큼 쉽게’ 깨진다. 동화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실감되는 현실의, ‘명’이라는 ‘목숨’의 무게가 두려워 어깨를 떠는 것이다. 이렇듯 동화의 환상은 깨어져버렸으나 아직 그 파편만은 남아 있다. 거울의 환상에 배신당한 동화는 거울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마을을 답답하게 가두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환상의 작은 파편조차, 현실은 여지없이 용납하지 않는다.

 

장날, 할머니는 읍내에서 새 거울을 사다가 마루 기둥에 걸었다. 내가 깨뜨려버린 거울과 모양뿐 아니라 크기도 거의 비슷한 거울이었다. 새것이라는데도, 거울은 이상하리만치 흐리기만 했다. 후후 입김을 불어넣고는 옷소매를 끌어당겨 골똘히 훔쳤지만, 흐린 기운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거울이 원래부터 흐려터진 게 아니라, 마을에만 들여오면 저절로 흐려지는 것이 아닐까. 마을에만 들여오면, 백내장이 끼듯 흐릿한 기운이 거울을 뒤덮어버리는 게 아닐까.

 

이처럼 거울은 새 것임에도 마을에만 들어오면 백내장이 끼듯 흐릿해져버리는 것이다. 비로소 동화는 ‘마을’로 대치되는 ‘현실’이 진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절망적인 현실’임을 똑바로 인지하게 된 것이다. 환상에 갇혀 있기 때문에 현실이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흐린 현실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환상 또한 흐릿해지는 것이라고. 그럼에도 마지막 에피소드─에필로그를 제외한─에서까지 동화는 거울을 닦는다. 닦고 또 닦는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전과 같은 현실 도피의 상징이 아니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 동화는 현실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거울을 하도 닦아, 손목이 아프다 못해 손가락들이 굳어갈 즈음이었다. 꺼풀이 벗겨지듯, 거울을 휩싸고 있던 흐릿한 기운들이 점점 걷혔다. 어느 순간, 거울이 점점 투명하고 환해지더니 웬 여자아이의 얼굴이 거울 위로 떠올랐다.

여자아이는 거울 속에서, 불만에 찬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넌 누구냐……!”

(중략)내가 쏘아보면 쏘아볼수록, 여자아이는 더 매섭게 나를 쏘아보았다.

(중략)한순간, 나는 벼락이라도 맞듯 거울 속 여자아이의 얼굴이 내 얼굴임을 깨달았다. 다른 그 어떤 여자아이의 얼굴도 아닌, 내 얼굴임을.

(중략)“못생겨서 공순이나 되어야겠구나.”

 

거울을 닦다가 결국 동화는 자신의 ‘못생긴’ 얼굴을 직시하게 된다. 소설이 전개되는 동안 끊임없이 들어온 못생겼다는 말을 그렇게도 부정해왔던 동화다. 자신의 못생긴 얼굴이란 즉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상징한다. 이렇게 거울을 닦고 자신의 얼굴을 직시함으로써, 동화는 흐릿해진 거울 속에 숨겨왔던 자신의 현실을 비로소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주변에 있는 ‘죄인’들의 얼굴이 현실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대들은 결코 더러운 자와 깨끗한 자를, 악한 자와 선한 자를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마치 검은 실과 흰 실이 함께 짜여지듯이 태양의 얼굴 앞에 함께 서 있으므로.

 

그러나 그것이 ‘못생긴’ 현실에의 절망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들은 비록 못생기고 슬펐을지언정 악하거나 ‘진짜’ 죄인은 아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있다.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공순이나 되어야 할’ 정도로 못생긴 현실은 그러나 미치도록 그리운, ‘아름다운 죄인들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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