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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geny Kissin - Chopin : Piano Concertos No.1 & 2
예프게니 키신 (Evgeny Kissin) 연주 / 아울로스(Aulos Media)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분명히 말한다. 에브게니 키신의 이 음반은 쇼팽 피아노 협주곡의 명연에 들기는 부족함이 많은 음반이다. 1번 협주곡 처음부터 전개되는 현의 울림은 누가 러시아 악단 아니랄까봐 우악스러울 정도로 과도하게, 직설적으로 터져나온다. 기존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명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과도한 도입부가 적잖게 부담스러울게다. 차이콥스키 교향곡(특히 4번) 연주하듯 시종일관 현을 거칠게 긁어대니 나긋나긋하고 섬세한 쇼팽 피아노 협주곡의 본질을 잘 담아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연주이다. 거기에 피아노 소리는 애매한 구석 하나 없이 분명하고 또랑또랑하다. 과도할 정도로. 바로 이 부분에서 이 음반에 대한 가치평가가 엇갈릴게다.

이 음반을 한마디로 평하자면 키신의, 키신을 위한, 키신에 의한 음반이다. 고작 열두살의 소년이, 미스터치라곤 거의 없이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애매모호한 구석 하나 없이 연주해 냈다는 사실말이다. 아직 손 크기도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의 쇼팽 1번은, 아르헤리치나 치베르만의 쇼팽처럼 맑고 투명하게 다듬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후 키신 하면 떠오르는 완벽한 테크닉과  분명하고 또랑또랑한 소리는 이미 이때 완성되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것이다. 유연한 2악장의 로망스, 혹은 3악장 손가락 끝의 힘을 빼고 조금은 유연하게, 모호하게 처리해 왔던 부분들을, 예의 명정함으로 거침없이 처리해 나간다. 아르헤리치의 두번째 연주처럼 잘 다듬어진 소리를 매끄럽게 감정을 실어 처리해내데는 역부족이지만 손도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이 한 음 한 음을 미스터치 없이 처리해나가는 광경을 상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게다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은 오케스트라 반주가 피아노 독주에 비해 비중이 작은 협주곡인지라, 피아노가 곡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이 연주에서도 이 열두살 소년은 적잖게 거친 소리를 내는 오케스트라를 일점의 망설임 없이 예의 그 명정한 소리로 이끌어나가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게다가, 이건 실황 연주다. 놀라울 수 밖에 없다. 데뷔무대에서 거친 소리를 뿜어대는 악단과 협연하며 조금도 움츠려들지 않고 자기 소리 내는데 여념이 없는 패기만만한 열두살짜리 소년의 소리가.

쇼팽 피아노 협주곡을 한장만 꼽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수이 권하기 힘들다. 분명히, 이 음반보다 좋은 연주는 많다. "그녀" 아르헤리치의 엘범도 좋고 치베르만이 직접 지휘를 담당한 멋진 연주도 좋다. 하지만 예브게니 키신의 팬이라면, 그의 완벽한 테크닉과 또랑또랑한 소리에 매력을 느낀 사람이라면 한번쯤 사서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실황 연주의 분위기도 꽤나 잘 담아낸 음반이다.

잔걱정 한가지 - 다닐 샤프란을 비롯해 멋들어진 러시아의 음원을 발굴해서 보급해 온 아울로스 뮤직에서 왜 이 음반을 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절판된 예당 클레식에서 2년 전쯤 풀었었고, 가장 최근에는 브릴리언트 예브게니 키신 박스세트에 들어있는 것과 똑같은 음원의 연주이다. 이들 음반으로 인해 키신의 쇼팽 찾는 사람들은 적잖게 이 음원을 구했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이 음반의 기획은 무언가 어긋장났다는 생각이 든다. 내 주변 사람이 쇼팽의 키신을 꼭 듣고 싶다고 한다면 이 음반보다는 브릴리언트의 네 장짜리 키신 박스세트를 사라고 해주겠다. 이만원을 조금 넘는 cd두 장 가격에 이 연주 이외에도 발레리 게르기에프와 함께 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내 생각에, 차이콥스키 1번에 한해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갈 연주이다) 같은 키신의 소름끼치는 연주가 수록되어있기에, 가격 면에서나 연주 면에서나, 키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최상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잡설이 또 길었는데, 하여간 훌륭한 러시아 음원을 계속해서 좋은 음질로 발굴해내는 아울로스 뮤직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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