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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
장시기 지음 / 당대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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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동물은 고정된 계급 혹은 확고부동한 위치로 존재하는 정착민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풍요로움과 사랑과 우정의 삶을 찾아서 끊임없이 떠나는 노마드(유목민)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는 노마드이다. (p,23)


장시기 교수의 저서 『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는 존재는 모두 노마드라고 명명하며 시작한다. 사랑과 우정으로 엮여진 ‘흐름’의 생명성을 지니고 있던 모든 노마드적인 존재가 정착민으로 한 곳에 고착된 계기를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에게 정착을 강요했기 때문이며 ‘바로 이것이 성과 감옥의 역사가 동일한 근원을 지니고 있는 이유이다. 지배자는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물리적(구체적) 폭력과 지식적(추상적) 설득을 동원하여 인간의 이동과 탈주를 가로막는다.’고 밝히고 있다.

과거의 역사 또한 대립과 투쟁의 문명사관이 아닌 삶의 방식의 이동과 생성이라는 문화사관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서구적 근대의 국가철학에 의하여 확산된 근대의 민족과 국가 중심의 역사연구는 중국과 한국․일본의 역사를 대립과 투쟁의 역사로만 인식할 뿐, 상호 이동과 보완을 통한 상생의 역사를 등한시하거나 왜곡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가 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를 사유하고자 하는 것은, 들뢰즈가 자신의 수많은 책들에서 서양의 노마돌로지를 계보화하듯이 노자의 『도덕경』을 바탕 삼아 동양의 노마돌로지를 계보화하려는 것이며, 이러한 동양과 서양의 노마돌로지가 오늘날의 동아시아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필요한 탈근대적 노마돌로지로 합당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p.40) 라고 책을 쓴 이유를 밝히고 있다.


내가 나의 앞날을 위해 무엇인가 결정의 기로에 서게 될 때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을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난 결정의 순간에 오로지 나 혼자만을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일전에 가족사회학을 수학하던 때에 ‘나를 위한 결정이 아닌 가족을 위한 결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사회의 가족주의를 설명할 수 있었음을 기억하면 난 내 자신이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 우리 가족은 사랑과 애정으로만 뭉쳐진 가족이 아닌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회 구성원으로 역할하고 있음을 부인할 순 없을 것 같다. 내가 경험으로 필요성을 깨닫게 됐던 ‘가족과의 거리’는 내가 서 있는 영토에서 탈주하여 탈영토화하고 또 다른 관계에서의 애정을 키우며 재영토화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는 것도. 어느 누군가, 혹은 어떤 장소, 혹은 어떤 물건에 편집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관계를 고착시키고 무한한 가능성을 소멸시킨다. 가족주의, 국가주의, 결혼에 대한 환상성 모두 지배자들이 만들어낸 우리 모두의 편집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노자가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한다/그러므로 추악함이 생긴다/사람들이 올바름을 올바르다고 한다/그러므로 올바르지 않음이 생긴다”고 이야기하고 있듯이, ‘아름다움’과 ‘추악함’ ‘올바름’과 ‘올바르지 않음’의 관계는 대립적인 동시에 상대적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 혹은 ‘올바름을 올바르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아름다움과 하나의 올바름을 절대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닌 모든 것을 추악함이나 올바르지 않음으로 규정하는 대립적 관계를 낳는다. 이것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장치의 ‘마법사-왕의 머리’를 따르거나 ‘법률가-사제의 머리’를 따르기 때문에, 항상 ‘아름다움’과 동시에 ‘올바름’이라는 ‘유일자’(the One)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관념적 형이상학의 원칙에 충실하다. 중세유럽은 신-인간, 그리고 서구적 근대는 정신-몸이라는 대립적 관계를 통하여 신과 정신을 ‘아름다움’과 ‘올바름’을 동시에 지닌 유일자로 간주한다.(p.90)


예를 들어 감자를 먹는 식량으로만 생각한다고 말해보자. 누군가는 감자를 갈아 팩도 하고, 감자를 도장처럼 깎아 가지고 놀기도 할 것이다. 그럼 먹는 데에만 익숙하고 그게 일종의 법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팩을 하거나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고 별종으로 취급한다. 그렇게 아웃사이더는 생겨나고 적은 생겨난다. 미국의 적-동맹의 명확한 이분법은 그렇기에 공존과 상생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배제의 정치학은 공고해지고 폭력은 정당화되며 법과 규칙이 만들어진다. 무한한 가능성과 상상력은 공동체주의와 폭력의 먹이가 된다.

내가 부모의 딸, 누군가의 아내, 자식의 엄마로만 존재하면 나는 변화의 가능성은 손톱만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모든 관계에 여유를 가지고 탈영토화할 수 있다면 나는 손가방 하나 달랑 들고 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사회의 속박에 길들여진 내 몸도 스스로의 자유를 찾아 재영토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항상 미래를 향해 활짝 열려 있고 언제나 가능성의 ‘오묘한 문’앞에 설 수 있으리라.


이 책의 흥미로운 부분은 들뢰즈(들뢰즈가 동양철학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은 많은 분들이 알 것이다)의 노마드학을 도덕경과 노자의 학문을 통해 설명했다는 것과 문학은 물론 영화까지 가로질러 노마돌로지에 대해 친근하게 설명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한창 유행처럼 번지던 노마드에 대해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박찬욱의 「올드보이」로 노마드를 이해해보자.
이우진의 근친상간은 오대수에게 프로이드의 가족주의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절대로 보지 말아야 할 ‘아버지의 거시기’이다. 그것은 가부장제 아버지의 법률이고, 오대수를 지배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이우진이 만든 법률이다. 그러나 가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없는 오대수는 폭력을 휘두르는 독재자 이우진에게 말한다. “누이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 (p. 406) 그러나 이우진과 달리 오대수에게는 두 가지 길이 열려 있다. 하나는 이우진이 각인시킨 과거의 기억이고 또 하나는 미도를 통한 과거의 망각이다. 그에겐 이제 새로운 삶과 새로운 미래가 필요하다. 새로운 삶과 새로운 미래를 구성하는 자에게 과거는 기억의 과거가 아니라 망각의 과거이다. 그에겐 이제 새로운 삶과 새로운 미래가 필요하다. 새로운 삶과 새로운 미래를 구성하는 자에게 과거는 기억의 과거가 아니라 망각의 과거이다. ‘사랑’(love, 愛)이나 ‘친구’(friend, 親)는 과거를 규정하는 명사가 아니라 미래를 구성하는 동사이다. 과거의 명사는 항상 미래의 동사가 만드는 생성에 의하여 재구성되고 재명명된다. (p.407)

이 책은 많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상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태초의 자유로움’을 찾으라는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라는 것. 내 몸에 얽힌 그 많은 올가미들을 벗고 나면 나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과 마주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다. 황홀하고 꿈결같은 이야기. 너와 나의 차이를 이해하고 모든 관계가 사랑과 애정만으로 직조된 관계라면 물론 지금처럼 나날의 삶이 전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질서와 법을 벗어던지는 것도 쉽지는 않다. 애정으로 맺어진 동맹,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의 아름다움은 모두가 꿈꾸는 바이나 그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 까닭 역시 현실적으로 힘들기 때문이리라. 모두가 일탈과 탈주를 꿈꾸지만 항상 제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 삶임을 알기에 모두가 일탈에 매료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내 자신이 현재의 자리를 박차고 새로운 영토에 발을 들일 수 없음은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더라도 타인의 탈주와 재영토화를 색안경을 끼고 눈을 홉뜨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태초의 자유로움은 찾지 못하더라도, 꿈꾸는 영혼이 될 수는 있을테니. 타인에게 배제의 폭력, 무관심의 폭력을 휘두르는 일을 거둬들여야만 내 뒷덜미를 향하고 있는 칼날도 사라질 수 있으리라.

누가 당신을 아버지나 선생이라고 부르면, 그의 곁을 떠나라. 누가 당신의 부관이 되거나 장군이 되려고 하면, 그들의 영토로부터 탈영토화하라. 탈주하라. 끊임없이 탈주하라. 그래서 노마드들의 무리를 형성하는 친구들의 세계와 연인들의 세계를 구성하라. 노마드의 원칙이 살아 숨쉬고 있는 재영토화의 공간을 창출하라. 단 하나의 연인, 단 하나의 친구와 짝을 이루어 사막과 바다, 초원과 산맥을 가로지르는 탈주선을 타라. 그곳에 젖고 꿀이 흐르는 새로운 친구와 연인들의 세계를 창출하라. 그리고 친구나 연인의 손을 잡고 고원의 저 너머, 전쟁이나 무력의 상황 속에서 “살인이 많이 이루어지니” “측은하고 담담한” “비통한 마음으로 통곡을 하라.”(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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