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김보리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3월
평점 :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는 오십 살에 혼자 제주도를 떠돌며 덜 먹고, 잘 걷고, 살짝 취하는 자유로운 시간을 누리는 자처 불량주부라고 말하는 김보리 여행작가의 여행에세이다. 이 책은 명랑하면서도 감미롭고, 선하면서도 당당한 그리고 꺼내기 어려웠던 저자의 이야기를 제주 한달살이와 함께 들려준다.
예측할 수 없는 팔순 대신 나는 오순 잔치를 선택하고, 나만의 잔치인 혼행, 혼자 여행으로 잔치를 대신한다.세상의 모든 오십이 각자의 오십을, 서른이, 마흔이, 혹은 예순 칠순, 팔순이 스스로를 잘 챙기고 위로하며 나름의 생의 변곡점으로 삼을 수 있으면 좋겠다. 엄마의 방랑을 지지하고 응원해. 엄마는 그럴 만하니까 그래도 돼. 21~22p
저자의 여행 시작의 진짜 이유를 알지 못했을 때는 마냥 부럽기만 했다. 그래서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인생의 중반에 용기있게 제주 여행을 택한 저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주부가 혼자 가족을 떠나 한달이라는 시간을 누리는 건 결코 쉬운일이 아닐텐데라는 걱정을 하면서도''한 번 사는 인생 나도 이런 시간 가져보고 싶다'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다음 책장을 넘겼다.
여행하며 '논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함한다. 마음이 놀아야 한다. 방랑해야 한다. 감정이 요동쳐야 한다. 자유로워야 한다. 덜 먹고 잘 놀고 살짝 취하는 여행이 시작된다. 배려할 동행이 없으니 가능한 일이다. 32p
여행'이라는 글자는 누구에게나 설레고, 기대감을 끌어오는 단어인 것 같다. 특히 요즘 같은 날씨에는 여행을 더 독려하게 된다. 제주 여행 그러면 일반적인 럭셔리 호텔과 분위기 좋은 카페, 맛집 등을 연상하게 되는 여행과는 달리 저자는 여행 내내 김밥과 막걸리를 친구 삼아 유배의 맛을 즐기며 소박한 여행을 시작한다.
언니들을 기다리며 심장이 콩콩콩. 공항 출구 앞에서 목이 길어졌다. (중략) 객이면서 객을 맞는 마음이 설렛다. 오우, 떨려라. 이 나이쯤 되면, 애인보다 가족에게 더 설렌다. 47p
저자는 여행 중 제주도가 처음인 큰언니와 셋째 언니를 만난다. 객이 객을 맞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언니들과 다채로운 시간을 보냈다. 나도 끈끈한 자매들이 3명이 있어서 저자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저자는 여행에서 언니들과 여행계를 들게 되는데 나 역시도 자매들과 몇년전부터 여행계를 들어서, 아마 올해나 내년에 제주행 비행기를 타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종일 숨을 참아가며 일한 대가는 영화 대사처럼 '이승의 밥이 되고, 남편의 술이 되고, 자식들의 공책과 연필이 된다.' 먹먹한 소리 앞에서, 숭고한 노동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너는 왜 사니. 너의 목표는 무엇이니. 너는 어디까지 숨을 참아봤니.너는 단 한번도 진정한 숨비소리를 내 본 적이 없어. 숨을 참을 만큼 견뎌본 적이 없으니까.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다는 게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다. 99~100p
이 책에는 숨비소리와 물숨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숨비소리는 제주 해녀들이 물질을 할 때 깊은 바다 속에서 해산물을 캐다가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물 밖으로 나오면서 내뿜는 휘파람 소리를 말한다. 그리고 욕심의 숨이라고 불리는 물숨은 생명체를 보고 하나라도 더 잡으려다가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물속에서 숨을 쉬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곧 해녀들에게 죽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 숨비소리를 듣고, 물숨을 떠올리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거문오름에 오를 때는 일체의 음식은물론 우산이나 양산, 등산스틱 등도가져갈 수 없다. (중략)똑 똑. 얼굴이 젖어도 빗방울은 경쾌하고 비바람이 미쳐도 새는 노래했다. 세상이 젖고 나도 젖고 그래도 될 날이었다.133~134p
거문오름은 360개가 넘는 오름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속해 있고, 사전예약을 해야 탐방이 가능한 오름이라고 한다. 저자가 간 그날은 무척 비가 거세가 내렸나보다. 우산도 우비도 소용 없었고,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그날 잘한일에 비 극복, 유난 극복, 걱정까지 극복한 자신을 칭찬해 준다.
행복해지려 온 게 아니라 성장하러 온 여행이다. 여행의 본질을 끝까지 지키자. 음악을 들을 이유가 없는 일상이다. 자연이, 시간이 모두 음악이다.숨에서 존재의 아우성을 듣는다. 각기 다른 생명력을 뽐낸다. 나도 함께 살아난다. 할일이 따로 없어 걷고 걷는 감사한 날들. 차가 있으면 편하고 없으면 자유롭다. 나는 혼자 있을 때 가장 용감하고 자유롭다. 170p
저자는 표선오일장을 걸으며 드는 생각을 메모장에 적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이색적인 문체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을 두세번 읽었다. 읽다가 보니 그런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친구와 한 달을 살면 그건 또 어떤 기분일까. 부대끼며 다정하고, 지치며 힘이 나겠지. 여행에 정답은 없다. 190p
저자는 비양봉 정상 전망 앞에서 친구 사이처럼 보이는 두 분의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짧은 시간 말동무가 되어 서로 간식을 나눠먹었다. 나는 이 때 저자가 자신의 오래전 친구를 떠올리며 두 분을 많이 부러워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내가 자매였고, 나의 언니들이 또한 그의 언니였으며, 나의 오빠와 남편이 그의 오빠였다. (중략)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공유하고 나만큼이나 나의 사람들을 아끼고 살피던 사람이었다. 사랑 받고 크지도 않았으면서 어찌 그리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207~208p
여기에서 저자가 제주 여행을 시작하게 된 진짜 이유가 나온다. 많은 것을 공유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던 친구가 어느날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게 된다. 문제는 친구가 떠나간 그 지점에서 저자는 친구와 손절을 한 상태였다. 그리고 연락을 끊은 후 5년이 넘도록 친구를 외면하고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 이후 저자는 오랜 시간 죄책감에 시달리며 눈물샘이 마르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근 7년, 이 시간 안에는 친구에 대한 묵직한 감정들과 사무치는 그리움이 엉켜있었던 시간이었다. 저자는 제주 여행을 통해 친구와 진짜 이별을 하면서 나지막히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넌 내 인생에 최고의 은인이었고, 친구 그 이상이었어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는 저자의 말처럼 제주가 좋고 여행이 좋은 누군가에게 읽혀도 좋고, 생각지 못한 이별로 아픈 이에게 얕은 공감으로 닿아도 좋은 책이다. 이 책을 덮고 나면 막걸리와 김밥, 유배, 오름, 걷기라는 말이 머리에 몇일 동안 동동 떠다닐지 모른다. 저자를 따라 책 속에서 걷다보면 제주 동네를 촘촘히 들여다보는 느낌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