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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오식당
이명랑 지음 / 시공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옛날 언젠가 살짝 알고 지내던 동생 하나가 있었다.
그 동생의 부모님이 아마도 영등포 청과물 시장에서 도매 물건을 가져다
소매로 넘기는 일을 하셨던 것 같다. 가끔 새벽에 나가 트럭에 수박 쌓는 일을 도왔나 보다.
딴엔 신나게 이야기 하는데 누군가,
“지금 우리가 여기서 그 얘길 왜 들어야 되는데?" 하며 면박을 준 일이 있다.
너무도 생생한 시장판 이야기를 읽으며 그 동생 생각이 났다.
이 책을 읽어봤을까?
영등포 로터리 부근의 ‘한림학원’ ‘구미타자학원’에서 주산이며 부기, 타자 따위를 배우느라
여고시절의 2/3를 보내고, 가끔씩 친구들을 만나서 햄버거를 먹고 지하상가를 오락가락 하던,
소풍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복으로 갈아입고 영등포 시장 건너 편 '원투쓰리 나이트클럽'으로
향하던 날라이(?) 친구들이 있던 그 영등포….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집으로, 109번 버스 안에서 바라다보던 파라솔의 행렬들.
어느 초겨울 엄마를 따라 나섰다 건양병원 근처 소매점에서 귤 한 박스를 사온 것이 전부인 나에게
‘삼오식당’이 영등포가 아니라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안에 있었더라도 마음이 이랬을까?
책을 읽는 내내 '날고기처럼 생생한 시장언어의 유쾌한 카니발' 이라는 저 광고 카피가
어지간히도 눈에 거슬렸다. 도박에 미친 남편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은 딸에게 그저 자기가
개발한 '정력차' 그놈 한 번 쭈욱 들이키고 한숨 자고나면 다 괜찮아진다고,
남자랑 여자랑 즈그덜끼리 한 집서 좋아지내면 그거시 부부고,
마음 떠나면 그 길로 그것이 남남이제 하던 차씨 아줌마를 보며,
허수아비 노름꾼 남편 팽개치고 가게 젊은 일꾼에게 몸과 마음과 돈까지 다 퍼주고
어디서 몰래 핏덩어리 하나 낳고 세 딸들에게 쫓겨난 0번 아줌마 이야기를 들으며,
좀 곱게나 늙지, 당진상회 할머니의 삼오식당 주인에게 하는 거의 행패에 가까운
그 꼬라지를 보고 있노라니 덕지덕지 쌓이는 이 짜증스러움, 불쾌함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싶었다.
아~ 불타는 나의 이 정의감이라니….
삼오식당 주인처럼 밥 장사에 때로 술까지 얹어 팔며 드러내놓고 고생한 티를 내지는 않더라도,
살아온 한 평생 구구절절 읊어대자면 책 한 권도 모자란다는 게 우리 엄마들의 공통점이고 보니
‘엄마의 무릎’을 읽으면서는 속이 또 울컥울컥 했다.
나는 어느 대목에서 웃어야 할까? 나도 좀 웃어보자.
헌데 8살 때 처음 생일 초대를 받고 엄마를 졸랐다가 쓴 소리만 듣고 빈손으로 가야 했던 기억이나
사춘기 시절 또 한 번 생일 선물 때문에 친구들에게 망신을 당했던 기억,
놀이공원으로 소풍을 가던 날, 친구가 엄마한테 용돈 안 받았냐고 그럼 놀이기구는 어떻게 타냐고
알아서 돈을 꿔주던 기억, 셋방 살이 하던 늘 엄마가 집을 비우던 친구네 집 부엌에
슬리퍼 신고 나가 숫채구멍에다 오줌을 누던 기억과 폐교로 떠났던 캠핑에서 삼삼삼오오 짝을 지어
숲에 둘러앉아 새하얀 엉덩이를 들어내던 기억과 기타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내게도 현실이었고 보니 그냥 시원하게 웃어지지도 않았다.
한 번 폼나게 살아보자며 지금도 버둥거리는 나와
유쾌 상쾌 통쾌! 하게 이 책을 읽었을 사람들 사이의 차이란
그저 삼오식당이 하필이면 영등포에 있다는 것 뿐일까?
나는 웃을까? 웃어야 할까? 망설이던 중에 그만 책을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