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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사용후기 -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한윤형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0. 우리 과 선배인 용하형은 내가 대학 신입생 시절, 식민지 근대화론자들과 이에 맞선 민족주의 사학 진영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에 대해 이렇게 개탄했다.
"이영훈 교수로 대표되는 낙성대 연구소의 경제학과 경제사 연구자들이랑 국사학과/한국사학과 교수들이 민족 / 탈민족으로 붙고 있는데, 국사학 전공자란 사람들이 경제사 연구 방법론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도 없이 민족주의적으로 상대방을 뉴라이트 친일 수구로 몰아붙이기만 해서 이게 싸움이 되겠어? 이럴 때 고대에서 사학 전공자라는 사람들이 나서서, 상대방 주장부터 실증적이고 논리적으로 격파해 나가야될 판인데 사학과 교수라는 놈들이 민족고대 한국사학과 눈치나 봐서 민족사학 어쩌구 저쩌구 하니까 나서지도 못하고 벌벌 기고 있는게 말이 되느냐는거지!"
그리고 3년이 지났다. 교수도 아니고, 심지어 역사학 전공자도 아닌 한윤형이 지리하게 계속된 '탈민족=식민지근대화론=뉴라이트=친일우파'라는 허수아비 때리기에서 벗어나, 진보/탈민족주의/시민적 상식이라는 관점에서 '뉴라이트 역사학'이라는 상대를 제대로 파헤치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지금쯤 늦은 나이에 이병 달고 어디선가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을, 용하형에게 이 후기를 바친다. "형, 이 책이 했어요."
1. 한윤형은 이 책을 통해 "논쟁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뉴라이트와 민족주의자들을 둘 다 비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히 두 가지인데, 1) 양측 모두 중대한 논리적 허점이 있다 2) 단일민족국가 시대를 탈피하는 '다민족주의 공화국의 민주정치철학'을 고민하기 위한 정치적 필요성 때문이다. 후자가 핵심적인 부분인데, 오늘날 한국은 공익 캠페인에서도 강조하듯 '다문화국가',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이다. 이는 혹자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글로벌자본주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중심부 국가의 의무라 할 수 있는 이주노동자 흡수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것은 정치적 스탠스를 떠나서, 우리 모두가 직면하게 된 '문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뉴라이트가 '탈민족주의 담론'을 먼저 치고 나오면서, 이런 '문제 상황'이 엉뚱하게 오해되는 판이 짜였다. 인터넷만 가보면 애부터 어른까지 하나같이 뉴라이트를 까고 있는데 (심지어 아까 당직 서다가 이 책 제목을 보고 옆자리 당직부관님이 뉴라이트 옹호하는 책이냐고 심각하게 물어봤다!) 문제는 뉴라이트를 까기 위해서 기존 민족주의 담론을, 아니 담론이랄것도 없는 친일파개새끼논리를 끌어온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 현실에서 대중의 정치적 감수성이 딱 그 수준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영원히 친일수구 VS 종북반비라는 퇴행적 프레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한윤형은 이러한 현상에 주목해, 퇴행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탈민족주의자 입장에서 뉴라이트/민족주의진영을 비판하는 관점으로 책을 서술했다. 이는 지금의 '역사 논쟁의 탈을 쓴 정치 논쟁'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관점이자, 가장 잊혀져있던 관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윤형의 이 책은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2. 이 책에 대한 후기를 심도 있게 쓰고 싶지만, 이 책은 상당히 정치적으로 논쟁적인 지점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군인이라는 신분 상 함부로 언급하기 어렵다. (특히 XX는 테러리스트.. 이런건 백범일지 독후감 써야하는 신분상..) 일단 이 후기는 인트라넷 장병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소개글이기 때문에 1부 '서론'에 집중하여 맛보기만 해보겠다.
1부 서론은 '영어공용화론'을 다루고 있다. 영어공용화론자들(이를테면 복거일?)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세계화 시대의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영어를 제2국어로 삼거나, 혹은 그에 준하여 영어몰입교육을 실시해야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 대부분의 지식 자료들이 영어로 되있으니까, 영어 능력 배양은 필요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꼭 국민 전부에게 '영어 몰입 교육'을 시킬 필요는 없다. 일본 근대사의 교훈처럼, '번역'의 활성화가 수반된다면 굳이 영어 교육이라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영어 교육에 대한 강조는, 어쩌면 외국어 능력 우열과 외국어 접근의 차등적 기회를 발판 삼아 '차별적 계급화'를 실현하려는 기득권의 야욕이 드러난 것은 아닐지?
더 중요한 것은, 이미 한국인들은 외국어 공용화의 경험이 있다, 라는 잊혀진 사실이다. 그렇다. 일제 시대에 우리는 일본어를 '공용어'로 쓴 수준이 아니라, '국어'로 사용했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그 강제성/자발성을 떠나서 어쨌든) 우리가 '근대'를 일본에서 '수입'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영어공용론은 마치 우리가 일본어를 통해 근대를 수입할 수 있었다는 역사를 반복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어 공용화를 꺼내들기엔 민족주의적 대중 심리를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것은, 언어를 통해서 '진짜 근대화(선진화)'를 수입하고, 이를 완성하려는 욕망의 발현이다. '어딘가에 진짜 근대, 완성된 근대가 있을 것이고, 우리는 이를 향해 달려가야한다'라는 생각이 영어 공용화론 뒤에 숨겨진 욕망인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진영의 태도는 어떠한가? 이들은 영어 공용화론에 대하여 '한글의 우수성'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어 반박하거나,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내재적 근대화론을 펼치면서 반대 논리를 구축한다. 그러나 뉴라이트(영어공용화)나 민족주의(한글 짱!) 모두 공유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근대성'이라는 것에 단계적 도식을 만들어 두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올라가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고 진보이며 질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양쪽 모두 '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근대(선진/발전?)'를 향해 달려가야한다는 이야기인데, 나는 이미 다른 글에서 이러한 '근대성'의 성격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그문트 바우만을 빌리자면, 근대성이란 '질서에의 강박'인 동시에 '풍토적 미완성, 아직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의 지향'이다. 다시 말해 근대성의 본질은 '아직 되지 않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근대성은 완성의 욕망을 향해 달려가며 매사에 '진보와 발전'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진보와 발전'은 '다양한 형식의 질서와 발전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진행된(서구 근대) 발전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 된다. 결국 뉴라이트나 민족주의 진영 모두, '서구 근대'라는 발전 경로를 지정해두고 여기에 과거의 역사를 끼워맞추고, '발전의 언어'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성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는데, 한윤형은 윤해동 교수의 개념을 빌어 '모든 근대는 식민지 근대'라고 표현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식민지 수탈론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근대라는 것 자체가 사실 '식민지 근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근대를 이식받은 식민지 뿐 아니라, 식민통치의 주체였던 제국주의 국가들 역시 '식민 지배'를 통해서만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제외한 채로 우리가 영국의 근대화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근대 세계라는 시스템은 이처럼 제국주의국가와 식민지들이 물고 물리는 착취와 발전, 수탈과 이식의 역사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생각처럼 '서구 근대'가 근대성의 절대적 구현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근대는 식민지 근대'다!
다시 바우만을 빌리자면, 근대성이란 결국 '미완의 것'이다. 근대성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끝없이 미완성을 완성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이 필요한데, 기실 '완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해가 빠를텐데, '유피넬'과 '헬카네스'라는 개념이 있다. 거칠게 말해서 각각 '조화/완성/질서'와 '혼돈/미완성'무질서'를 상징하는 반대 개념인데, 사실 유피넬 역시 수많은 헬카네스 중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돌맹이 네 개를 던져서 네개의 돌맹이 모두 완벽한 정사각형을 이루며 떨어진다면 우리는 이를 조화롭다! 고 생각하겠지만, 이 것은 정사각형이 '조화,완성,질서'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어떤 절대적 기준점이나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완성'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완성을 향한 노력의 경주는 결국 새로운 미완성을 계속 탄생시킬 뿐이다. 미완성이 완성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역사적 폭력이 수반된다는 것은, 이러한 '완성' 욕구가 새로운 폭력을 재탄생 시키는 악순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윤형은 이상의 말을 빌려 서론을 마무리한다. 1930년대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이 경성에 등장했을 때, 조선 지식인들은 근대화도 안된 나라에 껍데기만 근대인들이 등장했다고 혀를 찼다. 그리고 이러한 개탄은 근대화된 도쿄의 모습을 보며 부러움과 좌절을 동시에 느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경성이 동경처럼 '진짜 근대'가 되기 위해서, 조선의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제의 힘을 빌려야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상은 달랐다. 다른 지식인들이 동경의 '진짜 근대'에 현혹 될 때, 이상은 동경 역시 '가짜 근대'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의심했다. 심지어, 그는 뉴욕에도 진짜 근대가 있을찌 의심하면서, 사실 어디에도 '진짜 근대'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한다.
"내가 생각했던 마루노우찌빌딩(마루비루)은 적어도 이 마루비루의 네 갑절은 되는 굉장한 것이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 가서도 나는 똑같은 환멸을 당할는지 - 어쨌든 이 도시는 몹시 '깨솔링'내가 나는구나! 가 동경의 첫 인상이다." (<東京> - 이상문학전집 3)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완성된 근대'란 실은 상상의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동경이건, 뉴욕이건 어디건 '진짜 근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것이 뉴라이트와 민족주의 담론이 나누어가지고 있는 함정을 벗어나는 전환점이다.
3. 논쟁적인 부분에 대해서 더 다룰 수 없다는 것이 이 독서후기의 한계인 만큼, 우리가 왜 이 책을 읽어야하는지 홍보하는 것으로 미흡함을 채워야겠다.
일단 이 책의 2부는 인물론에 그치기 쉬운 해방 전후 정치사에 대해 사건의 정황을 따져가며 서술하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해방 전후사가 얼마나 정치 이데올로기 공세에 오염되어 있는지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치적으로 채색된 역사가, 또 다른 정치적 대립을 낳는 악순환을 지적한다. 특히 '정통성'에 관한 부분은 중요한 문제 제기인데, '민주공화국'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되살려야하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나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모두가 참조해야할 부분이다.
둘째로, 앞으로 도래할/혹은 도래한 '다민족국가'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의 상황에서 '기존'의 민족주의/탈민족주의 프레임이 가지고 있는 문제 설정의 허구성을 밝히고, 우리가 지금 당장 고민해야할 지점이 무엇인가 보여주고 있다. 이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지점일텐데, '민족국가'라는 것은 그 틀 안에서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유효한 조건이었지만, 동시에 '민족'이 포괄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제도화하고 그들에게는 '민주시민의 권리'를 적용하지 않는 '반민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국내에 체류중인 (주로 이주노동자와 결혼 이주자인) '타민족'은 50만명에 가깝다고 한다. 이는 전 국민의 1%에 가까운 것이다. 이들 역시 우리와 더불어 민주사회의 민주 시민으로 권리가 인정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만들어나가야할 주체이다.
셋째로, 이 책은 부제가 그러하듯 역사/정치에 대한 시민적 상식을 길러주기에 적합한 책이다. 한윤형은 뉴라이트 논쟁으로 불리는 지루한 공방전이 한국현대사의 낡은 정치 대립의 축소판임을 보여주고, 이런 낡은 구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주공화정치'를 생각하기 위해 어떤 논리와 근거가 필요한지 차근차근 밝힌다. 특히 이 책은 그 저자나 집필 방법 자체가 '시민적 교양'의 대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역사학도가 아닌 20대 젊은이가 사료에 접근하는 역사적 방법론이나 1차 사료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 없이, 이미 시중에 나와있는 한국근현대사교양도서를 참조하여 이정도의 책을 썼다는 것은 전공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일정 이상의 인문사회적 소양을 갖추고 한 사회의 시민으로 공적 발언을 하기에 충분하다는, '지적 평등'의 증거물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본인이 밝히기로는 10년이 채 안되는 기간에 울트라 민족주의자 '환빠'에서 탈민족주의 담론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저자로 성장한 한윤형의 이력 자체가 바로 '공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4. 어쨌든 나는 비전공자의 이런 책을 접할 때마다 한 사람의 사학도로 큰 부끄러움을 느낀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 그 이유를 항상 잊지 않아야한다. 그리고 한윤형은 이 책을 기획하면서 자신이 '왜' 공부를 했고, 그 '왜'를 실천하기 위해 '어떻게' 책을 써야하는지 초지일관한 듯 하다. 비록 1차 사료를 뒤지지 않았더라도, 이정도로 성실한 자료조사와 정리를 통하여 자신의 의도를 논리적으로 연결하여 한 권의 책으로 탄생시키는 작업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가 나와 네 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질투를 느끼면서, 한 편으로는 이러한 '20대 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어느 정도 우리 세대의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분투하고 있는 그를 지원하기 위해, 한 번의 술자리를 포기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의 정가는 요새 책 답지 않게 '착한' 편으로, 1만 3천원이다. '사서' 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