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며 기다리는 하나님나라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지음, 전나무 옮김 / 대장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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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저자보다 추천사가 화려한 책이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이 책은 분명 블룸하르트에 관한 책인데, 항상 추천사에는 칼 바르트가 따라다닌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는 20세기 교부로 불리는 바르트의 영향력이 한 몫 하겠지만, 블룸하르트가 바르트의 제자도 아니고 오히려 바르트가 블룸하르트를 존경하며 영향받았다고 하는데, 유명세가 역전되도 너무 역전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블룸하르트의 이 책, <행동하며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는 그러한 의문을 안고 집어든 책이자, 그러한 의문을 잠재운 책이기도 했다.

 

1. 축척된 만나에는 썩은 냄새가 난다.

 

미리 앞질러 말해보고 싶다. 바르트는 블룸하르트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나. 책을 덮고, 떠오른 단 하나의 단어는 하나님의 행위였다. 블룸하르트를 둘러싼 수많은 미사여구가 있을 수 있으나 나는 단연코 하나님의 행위가 그를 둘러싼 사상을 꿸 수 있는 중요한 단어라고 본다. 대학원 시절, 칼바르트 세미나를 하면서 바르트의 톡특함을 정돈해 준 단어 역시 하나님의 행위였다. 바르트에게 있어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인식은 불가능그 자체였다. 오히려 인식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나타나셔야만 가능한 행위로만 오로지 가능할뿐이었다. , 바르트는 인간이 신에 이를 수 있는 어떠한 인식의 조각, 능력,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직 신 자신의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주체적 행위’, 행위에만 모든 가능성이 시작될 뿐이다. 바르트는 이를 신-존재증명이 그동안 존재의 범주에서 말해지는 것을 뒤집으며 신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라고 말했다. 신은 그의 주체적 행위속에 역동적으로 존재하시는 것이지, 인간의 그 어떤 존재증명 속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인 셈이다.

 

나는 이러한 바르트의 이론을 나름대로 만나에 비유하여 이해한다. , ‘만나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만, 인간에 손에 놓여지는 순간 화석화된다. 소유하려 들고, 축적하려는 순간, 인간의 욕망에 의해 구속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내 만나의 본래적 기원은 사라져 버리고, 만나를 향한 집착 혹은 만나를 통한 목적만이 남는다. , 시작은 하늘로 였을지 모르지만, 끝은 인간의 욕망의 상징이 된다. 축적된 만나에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순간 도래하는 만나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예측가능한 성격이 아니며, 축적될 수 없고, 은혜 안에서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그리고 블룸하르트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기적이 매순간 도래하는 만나에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맥락에서 바르트가 시종일관 기독교를 종교라고 말하며 생명의 말씀이 자기구원의 도구로, 기득권적 권력으로, 역동을 잃어버린 박제화된 교리라고 비판하는 바로 이러한 블룸하르트의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기대어 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적인 편집 속에서 자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분은 그분 자체의 행위속에 근거하시며 과거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우리에게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말씀하신다.

 

2. 나의 시선을 넘어,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세계는?

 

따라서 블룸하르트 책에는 시종일관 도래하는 만나를 기다리고, 기다린 만나를 먹으며, 먹기만 할 뿐 아니라 그 즉시, 그날의 만나를 행동으로 옮기는 역동(행동)이 있다. 그분이 말씀하셨고, 그분이 책임지시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매우 그럴 듯 하고, 멋져 보이지만 우리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독자에게 불편함을 준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하루살이가 힘겨워 월급을 찾고, 월급을 부족해 일자리를 걱정하는 평범한 인간이지 않은가. 하지만 블룸하르트는 그러한 걱정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지, 하나님 나라 백성이 구하는 소원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백성은 무엇을 구하는가? 그렇다. 백성은 이 땅에 아버지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구한다.

 

바로 여기에 블룸하르트의 하나님 나라사상의 근본이 있다. ‘행위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라라는 단어를 만날 때, 벌어지는 일은 그 나라의 건설이다. 앞서 존재로서 하나님이 종교에 의해 화석화 된 것처럼, 오늘날의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도래할 어떤 나라, 지금 여기와는 굉장히 다를 것만 같은 동경하는 세계정도로 머물러 있다. 하지만 블름하르트는 그럴 수 없다. 지금 행위 속에 계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자리에서 그 나라를 구하고, 찾고, 세우라는 부름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나라를 건설하는 모든 자원과 공급은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이미 예비하셨고, 그 분에 의해 무한 공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독자들은 블룸하르트의 글을 보며 굉장히 낯설지만, 굉장히 확신에 차 있는 광인의 모습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에 머물러 하나님하나님의 나라를 상상하지만, 블룸하르트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권능으로부터 시작된 소집장을 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분이 일하시는데, 가만히 있을 자 누군가라는 외침과 함께 말이다.

 

"교회의 교부들은 있지만 하나님의 시온은 어디에 있습니까? 계속해서 인간적인 이론과 조건들만 늘어만 갑니다. 이런 상황이 어떻게 현재까지 계속되었는지 참 놀라울 뿐입니다. 모두가 다 자기들만의 조건을 정해놓고 그 안에 안주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꽤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의 사자는 어디 있습니까? 아무 조건없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p.138)


3. 신은 죽었으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만난다.

 

이처럼 낯섬과 공감이 공존하는 독서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시대는 신은 죽었다(니체) 말하지만, 블룸하르트는 말한다. 그렇다. 신이 죽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특별하게 다가온 챕터는 8장 새로운 생명이다. 블룸하르트는 지금-여기의 하나님나라를 말하는 자답게, 우리들이 구해야할 것은 천국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생명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구하고, 두드리고, 찾아야할 무엇임에도 좀처럼 구하지 않는 비밀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1010절은 말한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블룸하르트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생명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생명은 당신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새로운 생명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말도 안됩니다. 새로운 생명은 이제 생명을 향한 능력이 당신 안에 꿈틀거리고, 어떤 신적인 것, 거룩한 것이 당신 안에서 자란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생명을 받는 다는 것은 그 생명으로 인해 이제 죄의 욕망이 우리를 더 이상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이 이제 성령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를 온전케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이 생명을 통해 드러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p.110-111)

 

그렇기에 책을 덮으며, 떠오르는 하나의 상념은 바로 이것이다. 왜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생생하지 않은가.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무엇에 묶여 있고, 어디에 갇혀 있기에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더 나아가 지금-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가? 블룸하르트의 사자후는 바로 이러한 질문을 시종일관 던지며, 우리가 복음 안에서 깨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블룸하르트는 그러한 기도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생명으로 살아내며, 살아낸 생명으로 인해 지금-여기에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 그래서 그런지 바르트는 이 책의 추천사에 이런 말을 남긴다. “그는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외치며, 하나님 나라가 앞당겨지기를 재촉한다. 블룸하르트는 이렇게 이 세상을 하나님께 이끌어 놓고, 하나님을 이 세상에 모시고 내려온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이것보다 멋지고 희망적인 일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p.218)

 

그렇다. 의문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응답하는 인간안에서 그렇게 잠잠해진다. 결국 블룸하르트도 바르트도 한명의 사상가이기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그 시작점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 또한 역시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를, 그리고 그 시작하신 일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고대할 뿐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한해, 온갖 것들을 내려놓고 우리의 믿음과 소원, 희망을 그분으로부터 재정비하기를 원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다리고, 그것에 참여함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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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 왜 하나님 나라는 생생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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