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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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소설을 좋아한다. 이름 속의 자가 사랑 애()가 아닌 슬플 애()로 읽힐 때부터. 한동안 마음이 가라앉을 걸 알면서도 김애란의 소설이라면 짚어 들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온통 핑크고 솜사탕이고,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게 기쁨이고 환희라면 이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기분을 망칠게 염려되는 게 아니라 아마도 김애란의 소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돼?’라는 질문을 해 본 사람, 실은 남보다 내 자신이 더 싫어 봤던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다.

 

청량하기까지 한 하늘색 표지와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 너무 시즌 겨냥 아니야? 웃음이 났는데 가장 앞에 실린 <입동>이라는 단편 제목을 보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김애란은 책 제목으로도, 소설을 실은 순서로도 뭔가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구나. 바깥은 여름이지만 스노우볼 속의 겨울을 살고 있는, 아니 본격적인 겨울, 한겨울이 아니라 앞으로 더 추워질 일만 까마득히 남은 겨울의 초입에 막막하게 서있는 마음 같은 것. ‘그래도 살아가야 해가 아니라 그래도 살아야하고 살게 될거야라는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내내 마음이 서늘했다.

 



나는 <바깥은 여름>을 관통하는 코드로 죽음을 읽었다. 아이의 죽음(입동), 노견의 죽음(노찬성과 에반), 언어의 죽음(침묵의 미래), 이혼한 아버지의 아내의 죽음(풍경의 쓸모), 폐지 줍는 노인의 죽음(가리는 손), 남편의 죽음(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무고한 것들의 죽음. 어떤 죽음은 자발적이고 희생적이어서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지만 김애란의 소설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게 되는 건 죽음 자체의 안타까움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남은 자들의 비루함 때문에,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준엄한 삶의 무게에 울게 된다.

 

5살짜리 아들의 죽음 후에도 보험금으로 대출을 갚고 더러워진 벽지를 새로 발라야 하는 부모, 그 무언가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책임지겠다고 장담했던 반려견이 처절한 고통으로 죽음 앞에 있음을 알면서도 안락사 비용으로 핸드폰 케이스를 사는 아이.


세상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만큼 처절한 존재가 있을까. 세상에 아이만큼 때 타지 않고 순수한 존재가 있을까. 죽음 앞의 미망인으로 남은 부모와 아이마저 그냥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주는 좌절감이 너무나 선명해 눈물이 났다.

 


…… 불현듯 저 손, 동영상에 나온 손, 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윽고 눈뜬 아이가 맑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곤 가슴팍을 크게 부풀려 숨을 모은 뒤 초를 향해 훅 입김을 분다. 초가 꺼지자 주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그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재이 얼굴을 찾으려 나는 꼼짝 않는다. <가리는 손>

 

폐지 줍는 노인이 황망한 사고를 당하는 순간 아들이 입을 가리는 모습이 포착된 동영상. 분명 너무 놀라고 무서워 비명을 지르는 줄 알았는데. 이후 엄마는 생일상 앞에서 사건을 천진하게 얘기하는 아들의 모습에 당황한다. 어떤 죽음은 흥미롭기까지 하다는 것.



 

김애란의 소설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로 생각할 거리를 안겨줄 뿐 아니라 문장들도 읽는 재미가 좋다. 2013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침묵의 미래>를 오랜만에 읽었는데 역시나 놀랄 만큼 아름답다.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뤄진 영()이다. 나는 커다란 눈()이자 입(),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다. 나는 단수이자, 복수, 안개처럼 하나의 덩어리인 동시에 각각의 입자로 존재한다.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를 지워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나는 부재의 부피, 나는 상실의 밀도, 나는 어떤 불빛이 가물대며 버티다 훅 꺼지는 순간 발하는 힘이다. 동물의 사체나 음식이 부패할 때 생기는 자발적 열이다.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어디살까. <침묵의 미래>

 

최근 소설에서 본 가장 멋진 비유들은 모두 김애란의 소설 속에 있다. 특히 <침묵의 미래>는 정말 언어의 혼령이라는 게 있어서 김애란 작가의 몸을 잠시 빌려 한풀이를 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굉장하게 느껴졌다.

 


김애란이 어깨에 힘을 풀고 가볍게 툭툭 던지는 대화를 읽으면서도 마음이 아릴 때가 많았다.

 

-할머니, 용서가 뭐야?

아이스박스 캐리어 옆에서 흙장난을 치던 찬성이 물었다.

-없던 일로 하자는 거야?

……

-아님, 잊어달라는 거야?

찬성이 채근하자 할머니는 강마른 손가락으로 담뱃재를 바닥에 톡톡 털며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그냥 한번 봐달라는 거야. <노찬성과 에반>

 

이후 소설 말미에 찬성은 혼자 죽음을 맞이한, 죽음에 뛰어든 노견의 잔해를 보며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매일 담배를 입에 물며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하는 할머니처럼 용서는 용서를 바라는 대상에 닿지 않으며, 용서를 바라는 사람에게만 위안이 될 뿐이다.

 


여기…... 영우가 뭐 써놨어……

……

영우가 자기 이름…… 써놨어.

……

이응하고, 아니 이응밖에 못썼어…… <입동>

 

부모가 부엌 도배를 하며 아이가 생전, 바닥에 써놓은 이름을 발견하는 대목이다.

김애란 작가의 사생활을 전혀 모르지만, 혹시 아이를 키우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엄마의 문법을, 이렇게 꼭 있는 일처럼, 간결하지만 처절하게 표현해냈는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주인공은 제자를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든 남편이 죽은 뒤 원발진이라는 피부병을 앓는다.

 

…… 피부 위 허물이 새살처럼 계속 돋아날 수 있다는 데 놀랐다. 그건 마치 죽음위에서, 다른 건 몰라도 죽음만은 계속 피어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 어쩌면 그날, 그시간, 그곳에선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켜켜이 쌓여가는 죽음. 살고 있다는 건 죽어가고 있는 거라고들 한다. 김애란 작가는 죽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무고한 자들의 죽음을 전하며, 그럼에도 끈질기게 먹고 자고 웃어야 하는 남은 자들의 오욕을 얘기하며, 삶의 간절함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나는 이 소설을 안방에서 4살짜리 아들을 옆에 끼고, 혹은 시원한 카페에서 달콤한 커피를 마시며 읽었다. 그럼에도 눈물을 똑똑 흘리는 수준이 아니라 주먹을 쥐고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책을 덮으며 흐느꼈다.

 

내가 이름 붙인 이들이 줄곧 바라보는 곳이 궁금해

이따금 나도 그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작가의 말중에서>

 

김애란의 소설은 여전히 마음을 무겁게 만들지만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으며 약간의 온기를 느낀다. 앞으로 이름 붙여질 이들의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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