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공동체 사상 - 문화적 배경에서 본 초기 교회들
로버트 뱅크스 지음, 장동수 옮김 / IVP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세네카에 의해 주목받은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라는 이해는 바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점이 뱅크스가 주목하는 점이다. 뱅크스는 바울의 글에 그의 사상이 정립되어 있다고 보고, 바울을 사회사상가로서 접근하여 바울을 바울이 살았던 환경 속에서 바울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바울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유일하게 공동체에 대해 말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 저술가 중에서 누구보다 공동체에 대해 주목했다고 평가한다. 그렇게 평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과 관련이 있다. 구원의 경험은 개인적일 수 있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들어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 서신에서 다루는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의 문제에 대응하는 바울의 견해이다.


뱅크스는 구원을 자유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구원이란 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이방인은 자연법으로부터),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떤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를 얻은 사람은 반드시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신앙은 공동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자체가 온전히 그리스도 독단적이지 않고, 두 번째(혹은 마지막) 아담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연합된 형태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며, 구원받은 사람 역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다. 이러한 개념 자체가 이미 구원이 독단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울의 이러한 공동체 사상은 교회’,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vkklhsi,a)라는 용어의 사용에서부터 나타난다. ‘에클레시아는 기독교 이전에도 정기적인 회합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칠십인경에서 구약 성경의 총회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하며 에클레시아를 사용했다. 바울은 편지의 수신자인 회중을 그 도시의 다른 모임과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정기적인 모임을 지칭하는 용어로 에클레시아를 사용했다. 바울이 사역을 시작하기 이전에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이미 에클레시아를 사용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공동체 사상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기 이전부터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을 공동체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의 여러 개념을 통해 공동체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로마서 121~2절에서 구약의 제의적 표현을 일상의 생활과 연결 짓는다. 그 핵심 표현인 영적 예배는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하나님과 개인의 독대하는 예배가 아닌, “일상 생활의 영역에서 은유적으로 적용”(162)되는 삶이며 행동 방식이다. 은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은사는 개인에게 주어지지만 그 활용은 교회 내의 질서를 생각해야 한다는 점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라 해도 공동체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바울 서신의 구절들 중에서 가장 개인적인 권면이라고 느껴지는 구절을 떠올려 보았을 때 빌립보서 4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그런데 원어를 살펴보니 기뻐하라는 동사는 2인칭 복수형이었다. 기뻐하라는 명령(권면) 자체가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것이다. 바울 서신에서 2인칭 대명사의 빈도가 단수형(su,( sou( soi( se)보다 복수형(u`mei/j( u`mw/n( u`mi/n( u`ma/j)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 또한 의미 있게 주목해볼 만하다.


바울의 공동체 사상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공동체적 관점을 갖는 것, 삶의 지침을 얻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뱅크스는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울의 공동체들은 그가 제시한 공동 생활의 이상들을 충분히 실현하는 데 실패했으며 바울도 분명 이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공동체에 대한 그의 견해를 이상적인 것으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공동체에게 그들의 공동 생활이 어떠해야 하며 어떠할 것이라는 비전을 계속 제시한다. ... 문화적인 상황의 변화로 바울의 실제적인 관행들을 오늘날에 맞게 항상 적용할 수는 없어도, 그 배후에 있는 원리들은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추구하는 이들의 계속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319~323) 우리의 신앙을 개인의 구원적 차원에서 머무르게 하지 말고, 공동체적 차원으로 관심을 옮겨가야 한다. 코로나19 엔더믹으로 인해 이전보다 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나타나고, 공동체를 이루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는 시대이기에 더욱 한계적이기는 하나 분명한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몸을 이루는 여러 지체가 있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공동체를 어디까지 볼 것이냐의 문제는 남아있다. 바울의 시대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공동체와 2022년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체는 그 범위와 경계가 상당히 다르다. 이것은 개인에 따라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는 공동체를 어느 범위까지로 인식해야 하는가? 여름 수련회를 앞두고 교회 공동체를 생각하며 비가 오지 않고 좋은 날씨를 기도해야 하는가, 가뭄으로 고생하는 농작물을 기르는 이웃과 산불의 위험이 높아진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하여 비가 내리도록 기도해야 하는가? 참 어려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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