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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
김쿠만 지음 / 허블 / 2025년 3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김쿠만 작가의 앤솔러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
시작에 앞서 아래와 같은 사람들에게 추천드립니다
1. SF와 레트로의 결합이 궁금한 사람
2. 판교에서 일하거나 거주중인 사람
3. 단편소설로 여러 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
4. 남해와 관련된 소설을 읽고 싶은 사람

줄거리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
출시되지 못한 게임 AAA 프로젝트 속 인공지능의 과거 회고록 속 게임회사에서 스토리를 쓰던 연우 씨와 말단직원 지우 씨 이야기
남쪽 바다의 초밥
기후변화로 지형과 해수면이 변하고 로봇이 배를 운전하고 초밥까지 만드는 시대에, 손으로 초밥을 만드는 전통을 고수하는 스승의 뜻을 이어 장례식을 치르는 제자
Encyclopedia of Pon-Chak
한때 뽕짝의 대부였다가 IMF보다 더 큰 혼란을 안겨준 '은하 전쟁'의 영웅이 된 신바람 리 박사 특집 취재
백년열차
남해로 향하는 체험운행을 시작한 백년열차 안에서, 소설을 써달라는 철도국의 요청으로 소설가가 실존하는 현실과 소설가가 구상한 허구의 패잔병 이야기가 연결되며 만나는 이야기
남해, 자율주행 금지 구역
미래 자율주행 시대에 인사고과 AI 때문에 '미래를 부정하며 과거를 그리워하는 망령스러운 시대 부적응자'를 위해 계획되어 구식 자동차만 허가된 '과거형 신도시' 남해로 파견된 후, 급하게 탈 자동차를 사기 위해 중고 거래에서 전 여자친구 미지를 만난 주인공의 연애 후일담
이제 하와이에선 파티가 열리지 않는다
4살 연하 연인 아이린과의 동쪽 바다로의 휴갓길에, 하와이로 간 1살 연상의 다른 연인 메구미를 떠올리는 주인공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우유부단하고 어정쩡한 '하루키 소설 남주'스러움
타란티노의 마지막 필름
자신의 영화 <펄프 픽션>을 누군가가 시간순으로 재편집한 필름을 찾기 위해 뜬금없이 한국에 나타난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소설을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황당한 부탁을 받은 주인공이 전전긍긍하는 상황
미래
예측해서 소설을 쓰는 인공지능 '미래'의 개발에 관여하게 된 주인공의 유일한 업무인 끊임없이 프로그램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문장을 입력하는 행위를 통해 던지는 글쓰기의 가치에 대한 질문

느낀점
여담으로 처음에 포장 뜯고 나서 표지 보고 외국 자기계발서 원서같다고 생각했음 ㅎ 근데 자기계발이라는 것조차 판교랑 잘 어울리긴 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 서평단을 신청하게 된 건 식상하지만 제가 판교에서 일하는 직장인이기 때문에 제목을 보자마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상상하는 미래도시 같은 판교의 이미지는 아니지만 솔직히 그런 이미지는 저도 모르겠고 그냥 제가 아는 동네가 어떤 작품의 배경이면 괜히 친밀감 느껴지고 좋잖아요?
김쿠만 작가의 단편소설집 <레트로 마니아>를 3년 전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 모든 단편집에서 '레드애플'이라는 가상의 담배가 나와서 전혀 다른 이야기들도 연결고리마냥 느껴지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이번에도 레드애플이라는 매개체가 나올까 궁금했는데 역시 나오더라고요!
노태훈 평론가에 따르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는 21세기가 4분의 1이나 지나버린 지금, 소설 쓰기라는 행위가 앞으로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한 '미래' 계열과 오래된 것들에 대한 향수와 애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질문하는 '과거' 계열로 나뉜다고 합니다 근데 정말 딱 맞는 분석인듯..
SF와 레트로 각각 보면 제가 정말 좋아하는 소재인데 이걸 합쳐서 'SF레트로'? 보통 SF는 과학기술이 발달한 미래를 악속하며 쓰이는 장르이고 레트로는 말 그대로 과거의 향기가 가득한 느낌이 들기 마련인데 제 짧은 식견으로서 함부로 추측할 수 없는 방향의 장르라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최신 기술의 메카 판교에서 1980년대 이전 노래를 선곡해야 하는 회식, 로봇 팔의 세상에서 한 손으로 초밥을 만드는 전통, 시속 180킬로미터 달릴 수 있지만 노선 개통 100주년 기념이라고 시속 30킬로미터로 주행하는 열차처럼 첨단 기술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지만 시대를 역행하는 낡아빠진 것들이 오히려 신선했습니다
여러 장르를 혼합해서 쓰다가 잘못하면 어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알겠어..에서 끝나버려서 읽은 사람도 쓴 사람도 머쓱타드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에서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음. 이 'SF레트로' 장르는 정말 김쿠만 작가의 필살기인듯
가끔 <타란티노의 마지막 필름>처럼 예상 불가능한 흐름 때문에 바로 머릿속으로 인식이 안 돼서 내가 잘못 읽었나? 집중력이 떨어졌나? 생각하게 만들고 앞 페이지를 이리저리 넘겨보게 만드는 단편들도 있지만 이것도 김쿠만 작가의 심오함인 듯 합니다
마지막 <미래>는 뭔가 '미래'가 만들었다던 '게임 속 AI의 과거 회상담, 미래 자율주행 시대에 구식 자동차만 허가된 고장에서 벌어지는 연애 후일담, 로봇 손 시대에 초밥 장인이 고수하는 전통, 우주 전쟁에서 울려 퍼지는 뽕짝…' 부분이 앞에 나온 나머지 일곱 개의 단편을 암시하는 것 같았고 종국에는 이 소설집은 모두 '미래'가 쓴 거다! 라고 생각할 법하게 판을 깔아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칸마다 각각 다른 향수를 불러일으킬 법한 <백년열차> 의 관광열차를 타보고 싶고 과거형 신도시라는 남해에 살아보고 싶고 인공지능 '미래'가 써주는 제 앞날이 궁금합니다

인용구
나폴리 피자와 남대문 빈대떡을 어설프게 섞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 철학자가 그랬지. 회상이야말로 짐승과 인간의 분기점이라고. 맞는 말이야. 그런 연구 결과도 있잖아? '인간은 10대와 20대 때 들은 노래를 평생 듣는다.' 다들 어린 과거에 침식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지.
모두 똑같은 달력을 넘기고 있지만, 살아가는 시대는 제각각이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알아먹기 쉽게 게임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 줘야겠군. 불과 10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스타크래프트>의 시대를 경험한 사람과 <리그 오브 레전드〉의 시대를 경험한 사람의 시간이 과연 똑같이 흐를까?
추억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천적인 것 같아.
사실, 미래로 가는 타임머신은 지금 여러분들도 탈 수 있어. 어떻게? 그저 수십 년 동안 푹 잘 수 있는 장치에 올라타면 돼.
정말 믿기지 않지만 한때 뽕짝의 시대가 있었다. 저 하늘에서 사라진 별만큼이나 까마득하게 먼 옛날이지만. 잔인할 정도로 흥겨웠던 그런 시대가 정말로 있었던 모양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제 옛날 이야기보다 더 오래된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마치 옆 나라의 버블 시대처럼.
4개월 동안 고민하고 있는 남자를 기다릴 여자는 쇼와는커녕 에도 때도 없을 것이다.
인서울 문창과 입학이 인생 최대 업적인 것 같았던 과외 선생은 자기 말만 들으면 서울예대와 동국대는 물론 한예종 간판까지 때려 부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정작 내가 때려 부순 건 부모님의 작고 소중한 통장 잔고뿐이었다.
같은 해 등단자 전원이 미래 같은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우리의 손을 떠나간 게 어디 문학뿐이겠냐, 라고 말하는 듯 세상은 쉽게 문학이라는 두 글자 위로 취소선을 그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에게는 예측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조각나고 해체된 이야기, 통제 불가능한 의외성, 현란하게 흐트러진 서사에 인간은 또 매료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