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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일리아스 - 신들의 전쟁과 인간들의 운명을 노래하다 주니어 클래식 16
장영란 지음 / 사계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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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신들의 전쟁과 인간들의 운명을 노래하다>, 사계절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습니다.

글이 깁니다. 요약을 원하신다면 맨 밑으로 내려 주세요.



<일리아스>는 살면서 한 번은 꼭 읽어보려 했던 고전이다. 어릴 적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10n회독한 사람들이 모두 <일리아스>를 읽어보려 하지는 않겠지만, <퍼시 잭슨> 시리즈를 n회독할 만큼 과몰입해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모두가 그럴 것이라고 반쯤 확신한다. 이것은 너무 과몰입한 나머지 뮤지컬 동아리의 극본마저 그리스 로마 신화 소재로 쓰게 된 사람의 말이다. 아, 여자아이라면 자라면서 한 번쯤은 만화 속 지혜롭고 용맹한 아테나와 자신을 동일시해 본 경험이 있지 않을까. 그런 한편 <퍼시 잭슨> 시리즈에서의 내 최애는 아르테미스였다.



하지만 섣불리 도전하지 못했던 이유는, <일리아스>가 서사시인 만큼 일단은 ‘운문’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희곡조차 형식이 낯설어 잘 집중하지 못하는 독자이기에,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읽은 경험조차 십수년 전 어린이용 세계문학전집에 머물러 있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신들의 전쟁과 인간들의 운명을 노래하다(이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서사시를 읽을 엄두는 안 나지만 너무나 과몰입하여 배경지식으로서 그리스 고전을 읽을 준비는 백 번이고 된 나 같은 독자를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 ‘고전’이라는 이름을 마주했을 때는 ‘누구나 읽어야 하는 책’, ‘교양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책’,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책’이라 막연히 생각되었다. … 그러나..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만 자랐던 사람이 아무런 준비 없이 서구 고전을 읽었을 때 느꼈던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아니 전혀 감동적이지 않아!’ 분명히 시공간을 뛰어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고전이고 명작이라는데……” - ‘머리말 - 인류 최초의 고전’ 중에서





고전에 괜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꽤 많이, 어쩌면 대부분의 독자가 그렇지 않을까? 나 역시 대형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고전 문학에는 손이 잘 가지 않고, 한국 고전 문학도 마찬가지이고, 고전 철학은 더더욱 그렇다. 아마도 세계 고전 문학의 경우는 어색한 번역에 8할 이상의 책임을 돌려도 될 것 같다. 한국 고전 문학이라면 교과서에 실려 있는, 다시 말해 시험을 치르기 위해 읽어야 했던 문학이라는 데에서 오는 딱딱한 느낌과 반감 때문일 것이고, 고전 철학은 아마도 (읽어보지도 않고) 무슨 소리인지 모르기(모를 것이기) 때문에…?





“지금 되돌아보면 이 모든 것은 고전에 대해 사람들이 쉽게 가지는 오해 때문이다. 고전은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즐길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일단 고전은 누구나 맘만 먹으면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보편적 사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 ‘머리말 - 인류 최초의 고전’ 중에서





그렇다. 고전은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읽어왔기 때문에’ 고전인 것이 아니었다. ‘오래 읽혀왔기 때문에’ 고전인 것이었다. 물론 오랫동안 읽혀 왔다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시의 문화나 사조를 잘 보여준다든지, 문학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다든지.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읽어왔을 수는 있지만, 그게 꼭 나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런 나 같은 독자를 위하여 사계절의 Junior Classic 시리즈가 존재하니 걱정할 필요도 없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24권에 달하는 <일리아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풀어 설명해주는 해설서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안 사실인데,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전쟁의 서막이 아니라 전리품인 브리세이스라는 처녀를 아가멤논에게 빼앗긴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하는데, 즉 트로이 전쟁이 한창인(거의 막바지인 9년째의) 어느 날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트로이의 첫째 왕자이자 최고의 영웅인 헥토르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책 자체는 450쪽에 달하는 두께로 벽돌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두껍고 다루는 이야기의 분량도 방대하지만, 전혀 고전을 읽는 것 같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똑똑한 선생님에게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마냥 유연하고 말랑하다. 수업을 듣는다거나 공부하는 것 같이 억지로 이해해야 하는 느낌 역시 조금도 없고, 오히려 그 자체로 한 편의 완성된 이야기 같다. 그만큼 놀라울 정도로 쉬운 언어로 쓰여 있다.



단순히 서사를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리아스>가 쓰일 당시의(정확히 말하면 쓰인 것이 아니라 입으로 말해지고 전해진 구전 문학이지만) 시대적 배경과 문화와 각종 명칭에 대한 강의도 충실하고, 각 챕터가 끝날 때마다 ‘Tip’이라는 꼭지에서 주변적인 소재와 설명을 첨언하면서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







사실 한 명의 과몰입자로서 감히 말한다면, 이 책에서 가장 ‘뽕이 차오르는 부분’들은 따로 있다. 바로 중간중간 등장하는 신화와 관련된 비하인드와 자투리 상식(상식은 아닐지도?)들이다.





“고대 그리스 암흑기에 음유 시인들은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단지 기억에만 의지하여 노래했다. … 그렇기 때문에 ‘기억’이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신적인 능력이라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고대 음유 시인들은 항상 기억과 관련이 있는 특정한 신에게 기도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37p



“고대 그리스인은 기억이 학문과 예술의 어머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므네모쉬네와 무사 여신들을 어머니와 딸의 관계로 설정했다.” 38p





오마이갓… 얼마나 뽕이 차오른단 말인가! 기억이 학문과 예술의 어머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므네모쉬네 여신이 뮤즈의 어머니로 설정되었다니 ㅠ ㅠ ㅜㅠ ㅜㅠ ㅠㅜ ㅜㅠ ㅠㅜ ㅠㅜㅠ ㅠㅜ ㅜㅠㅠㅜㅜㅠ ㅠㅜㅠㅜ ㅠ 쥐엔장… 웬만하면 서평 글에는 초성이나 비속어를 안 쓰려고 노력하지만 이런 자투리 지식들이 너무 좋아서… 좋다는 말 말고 무엇으로 표현하면 좋을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좋아서 그저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과몰입자에게 이런 변태적 설정들만큼 맛있는 간식이 없다… 난 이것만 먹고도 살 수 있어… 설정 맛집 그리스 로마 신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아폴론은 그리스 고전기의 학문과 예술의 신으로 리라를 들고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일리아스>에서 아폴론은 그리스 상고기의 특징을 보여 주는 활과 화살을 들고 있으며, ‘은빛 활’이나 ‘멀리 쏘는’ 등의 형용구와 함께 등장한다.” 44~45p



시대에 따라서 신의 모습이 달라지기도 한다니…… 그리스인들은 얼마나 설정 변태였던 것인가! 서로 사랑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좋아하는 신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이렇게 방대한 신화를 짜냈으니, 얼마나 대단한 연성 장인들이란 말인가…







그런가 하면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도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모든 신이 각기 고유한 몫이나 기능을 가졌기 때문에 어느 특정 영역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관장하는 특정 신에게 원인을 돌린다. 예를 들면 … 출산과 관련해서 문제가 생기면 아르테미스 등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이해한다.” 42p





결혼과 출산은 헤라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처녀 신인 아르테미스와 연관지어 생각했다니 의아하다. 아마 여성의 자궁과 달 사이의 관련성 때문이겠지만,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듣고 싶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와 특징을 적은 부분들도 무척 인상 깊었다.





“그리스인들은 단 한 번의 결단이 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신들이 개입한다고 생각한다.” 53p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든 것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신화’나 ‘철학’에서 모두 똑같이 나타난다. 신화에서는 초자연적 원인을 도입하며 원인을 설명하려 하고, 철학에서는 경험적 원인을 도입하여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트로이 전쟁을 되돌아볼수록 도대체 고대인들의 삶을 뒤흔든 이 엄청난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는 트로이 전쟁의 발단과 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설명할 때는 초자연적인 원인을 끌어들여 설명한다.” 90p



“고대 그리스인들은 불화의 신을 전쟁의 신 아레스와 형제 관계로 두었다. 트로이 전쟁이 ‘불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풀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전개 방식이다.” 90p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고 체계가 연성과 덕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들어낸 신들이 인간의 삶과 사고 알고리즘에 이토록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니, 신이 대단한 것인지 신화가 대단한 것인지 인간이 대단한 것인지.









저자의 유머가 너무 웃겨서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부분들도 있다.





“내 옆에 앉아서 불평해 대지 말거라. 올륌포스에 사는 모든 신들 중에서 네가 내게는 가장 밉다. 넌 항상 불화와 싸움과 전쟁에만 관심이 있으니 말이다. … / 제우스의 말을 분석해 보면 이번 사건에 대해 정확하게 판정하여 비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아레스 자체를 미워하는 것이다.” 134p (ㅋㅋㅋㄱㅋㅋㅋㅋㅋㅋㄱㅋㅋㅋㅋㄱㅋㅋㅋㅋㅋㅋㄱㅋㅋㅋ)



“이제 모든 준비를 마친(아프로디테의 허리띠를 빌려 제우스를 유혹할 준비를 마친) 헤라가 제우스를 찾아와 오케아노스와 테튀스에게 가는 길이라고 알린다. 그때 제우스는 너무도 강렬하게 헤라에게 매혹되어 버린다. 호메로스는 제우스가 다른 어떤 여인보다도 헤라에게 훨씬 강하게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제우스 스스로 자신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읊어 대도록 한다. 페이리토스를 낳은 디아, 페르세우스를 낳은 다나에, 미노스와 라다만토스를 낳은 에우로페, 디오뉘소스를 낳은 세멜레, 헤라클레스를 낳은 알크메네, 페르세포네를 낳은 데메테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낳은 레토 등이다. 제우스는 자신이 이토록 간절하게 사랑의 욕망에 사로잡힌 적이 없다고 호소한다. 여기서 호메로스나 그의 청중이 주로 남성이기 때문인지 이런 여성 편력을 듣는 헤라의 심정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인다.” 223p





이런 담백한 말투로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하니, 이게 유머인지 진지한 고찰이고 분석인지 헷갈릴 정도이고 오히려 그래서 더 웃기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이토록 쉽고 유쾌하게 읽히는 데에는 확실히 저자의 깔끔하고 뛰어난 글 솜씨가 중대한 한몫을 했다. 저자의 입담이 돋보이고 아주 맛깔나는 대목 하나를 더 소개하겠다.





“이제 신들이 인간들의 전쟁에서 물러나는가 했는데 다시 불씨를 지피는 자가 나타난다. 바로 아폴론의 누이 아르테미스이다. … 헤라가 나서서 아르테미스를 질책한 후 오른손으로 활을 벗겨 내고 왼손으로 양 손목을 움켜잡고 요리조리 피하는 뺨을 후려쳐 버린다.” 326p (ㅋㅋㅋㅋㅋㅋㅋㄲㅋㅋㅋㅋㅋㅋㅋㅋㅋㄱㅋㅋㅋㅋ)





쾌녀 헤라…! 이 장면이 실제로 <일리아스>에서는 그리스어로 어떻게 적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런 언어는 아니지 않을까?









“제18권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장면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만들기 위해 헤파이스토스의 궁전을 방문한 테티스 여신의 일화이다. … 우선 세 가지 발명품에 주목해 보자. 첫째, ‘자동 장소 이동 기구’이다. 헤파이스토스는 약 20개의 세발솥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는 아래에 황금바퀴를 달아 신들을 저절로 회의장으로 갔다가 각자 집에 돌아오게끔 해 주는 장치였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인공 지능 자동차 정도가 될 것이다. 둘째, ‘황금으로 만들어진 하녀들’이다. 그들은 다리가 불편한 헤파이스토스를 부축했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그들이 살아 있는 소녀와 똑같아 보였는데 지성이 있으며, 목소리와 힘도 지녔으며 기술도 쓸 수 있었다. 현대적으로는 아마 안드로이드나 로봇과 유사해 보인다. 셋째, ‘자동 풀무 기계’이다. 이것은 헤파이스토스가 작업할 때 자동으로 불을 피우고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이다. 궁전에는 20여 개의 풀무가 있는데 “헤파이스토스가 원하는 대로 작동하기도 하고, 작업의 진도에 따라 때로는 작업을 돕기도 하고 때로는 멈추기도 했다”고 한다. 호메로스가 드러내는 고대 그리스인의 상상력은 몇천 년을 뛰어넘어 현대의 과학 기술을 앞서간다.” 276~277p





위 대목을 보면서는, 어쩌면 그리스 로마 신화가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화이자 동화이자 소설이고 SF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책과 책들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연결 고리를 찾는 일을 즐거워하는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도 그런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헤파이스토스의 절름발이라는 특성을 분석한 부분이다.





“헤파이스토스 외에 특별히 신체적 문제가 있는 신은 없다. 당연히 신은 인간보다도 훨씬 탁월하다. 고대 그리스인은 헤파이스토스의 짧은 발을 신으로서의 약점이나 단점으로 생각하거나 불완전성의 표시로 생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특별한 기능과 연관될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대장장이는 전쟁과 농경 도구를 제작하는 중요한 기술을 지녔던 존재이다. … 따라서 대장장이를 특정 지역에 살도록 하여 보호하였고, 심지어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를 분질러놓던 관습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헤파이스토스가 절름발이 대장장이 신인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279p





이 대목을 읽으면서 김원영.김초엽의 <사이보그가 되다>를 떠올렸다. 단순히 사회문화적 배경과 신화적 상상력의 결부로, 장애학과는 관련이 없을지 모르지만…









저자의 통찰력에 가장 감탄했던 부분은, <일리아스>의 처음과 마지막 구절을 트로이 전쟁의 시작과 끝에 연관지어 분석하는 대목이다. (저자의 통찰력인지 <일리아스>에 관한 학계의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리아스>의 처음 1권 1절은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로 시작하고, 마지막 24권 804절은 “이렇게 그들은 말을 길들이는 헥토르의 장례를 치렀다”로 끝난다. 다시 말하자면 ‘아킬레우스’의 이름으로 시작하여 “헥토르’의 이름으로 끝난다. 여기서 헥토르의 이름 앞에 “말을 길들이는”이라는 상투어는 일반적으로 트로이인을 일컬을 때 붙는 표현이다. 헥토르에게는 수많은 호칭이 있지만, 마지막에 쓰인 트로이인을 대표하는 “말을 길들이는”이라는 명칭은 대표성이 있다. … 실제로 트로이 함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오뒷세우스가 기획한 ‘트로이 목마’이다. 그만큼 트로이인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바로 ‘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말을 길들이는 헥토르의 장례 의식은 트로이의 장례 의식을 상징한다. 따라서 호메로스는 굳이 트로이 함락 장면으로 마지막을 장식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400~401p





고전과 역사적 사실에 관한 이러한 통찰을, 몇십 년 공부한 지식인의 입으로 전해 들어 집 구석에서 알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감사하다. 책이여 영원하라.



부록 ‘주요 인물’에도 읽을 거리가 많다. 그리스의 예언자 칼카스가 ‘다른 예언자가 자신의 죽음을 잘못 예언하자 웃다가 죽었다(411p)’든지, 헥토르의 아내인 안드로마케의 이름이 ‘남자의 전쟁’이라는 의미를 가졌다든지(414p). 다만 책 전체를 통틀어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이 ‘주요 인물’ 꼭지에서 트로이의 공주이자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 미래를 보았던 카산드라를 ‘예언녀’라는 호칭으로 칭한 점이다. 관습적인 사용일지 모르나, 굳이 한쪽 성별에 치우친 단어를 사용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또다른 부록인 ‘주요 민족의 계보’에도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헬레네와 메넬라오스의 딸인 헤르미오네가 아킬레우스의 아들인 네오프톨레모스와 결혼했다는 점이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여성의 딸과, 트로이 전쟁의 최고 영웅이자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 아킬레우스의 아들이 맺어지다니, 어쩐지 모순적이면서도 낭만적이다. (사실 낭만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 위키에 따르면 네오프톨레모스는 손 꼽히게 잔인한 사이코로 평가된다. 트로이의 왕인 프리아모스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를 노예로 데려가 첩으로 삼았는데, 기록에 따르면 헤르미오네의 질투 때문에 그의 사촌 형제인 오레스테스에게 살해 당했다고 한다)





+) 첨언



이 책에서는 그리스식 발음을 따르기 위해 ‘올림포스’를 ‘올륌포스’, ‘오디세우스’를 ‘오뒷세우스’ 등으로 표기하였는데,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명칭에 익숙하기에 이런 방식이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했지만 보다 보니 익숙해져서 괜찮았다.











#장영란 #호메로스의일리아스 #일리아스 #호메로스 #그리스로마신화 #그리스고전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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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다 읽고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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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보는 식물학자 - 식물의 사계에 새겨진 살인의 마지막 순간
마크 스펜서 지음, 김성훈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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츌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으나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시체를 보는 식물학자>는 법의식물학자의 에세이와 식물과학서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책이다. 영국 큐왕립식물원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런던자연사박물관에서 10년 넘게 식물 표본실 큐레이터로 일한 저자가,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법의식물학자가 되어 범죄과학의 자문위원으로 일하게 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마 ‘법의식물학’이라는 분야가 국내에 소개되기로는 이 책이 첫째일 듯하다. 법의학 자체도 드라마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생소한 분야인데, 법의식물학이라고 하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범죄 수사에 식물학을 활용하다니. 하지만 정말이지 ‘그럴 듯’할 뿐만 아니라 무척 과학적인 방식이라, 이제까지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주제라는 게 이상할 정도다.

“법의식물학은 법의환경학이라는 폭넓은 범죄과학 분야의 일부다. 여기서 말하는 환경이란, 범죄수사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자연계의 물질을 모두 일컫는 포괄적 명칭이다. 토양, 곤충, 동물, 식물, 균류에서 나오는 데이터 모두 이런 환경에 해당한다.” 31p

저자는 법의식물학자로서 살인 같은 심각한 범죄가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 밝히는 것을 돕고, 실종자나 살인사건 피해자의 위치를 알아내는 데 일조하기도 하고, 환경에서 나온 증거를 활용해 용의자와 범죄 현장 및 희생자의 연결고리를 찾아내기도 한다. 이 책에는 법의식물학자는 어떤 일을 하는지는 물론이고 저자가 참여했던 범죄 수사와 해당 사건 현장에서 관찰한 식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것들이 수사에 미친 영향 같은 이야기들도 실려있다. (30~31p)

기억에 남는 부분을 몇 군데만 옮겨보면 이렇다.
“전체적으로 식물을 살펴보면 이 남자는 그냥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누워 죽은 것으로 보였다. 평화로워 보일 정도였다. … 식물의 줄기와 가지가 입은 손상이 불규칙하고, 대부분은 호장근이었다. 이 남자는 약 30미터 정도 철도 제방을 위아래로 방향을 바꾸며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 그는 덤불 아래서 혼자 휘청거리며 돌아다니다가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 개개의 호장근 줄기는 아주 쉽게 손상을 입어서 몇 달이 지난 후에도 그 영향을 관찰할 수 있다. 현장에서 만난 호장근의 경우 솜털 같은 하얀색 꽃을 지지해주는 작은 곁가지도 손상되어 있었다. 이 꽃은 늦여름에 개화한다. 그런데 줄기가 꽃이 피는 계절에 손상을 입은 것을 보면 시신이 그곳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대략 추정이 가능하다. 몇 달쯤 된 것이다.” 101~103p
”연기 이야기가 중요한 정보로 여겨졌기 때문에, 경찰은 연기가 피어오른 날짜를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 나는 불이 난 자리 주변과 그 위로 드리운 블랙베리덤불 줄기가 불에 탄 패턴에 특히 관심이 있었다. … 이 줄기를 태운 불은 최근의 것이 아니었다. 큰 줄기를 따라 그을린 흔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 옆에서 돋아나온 곁가지는 손상을 입은 흔적이 없었다. 이 줄기는 불에 탄 후에도 몇 주에 걸쳐 다시 자란 것이 분명했다. … 이전 성장기, 그러니까 작년 여름과 초가을 동안에 자란 것이 분명했다. 그럼 큰 불은 적어도 여섯 달 전에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무래도 경찰은 정보 수집 전략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111~112p

이 짧은 부분만 보더라도 법의식물학이 무척 흥미로운 분야라는 게 느껴질 것이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시체나 범죄 사건보다는 식물 이야기의 비중이 비교적 꽤 높은 편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일반인이 느끼기에 약간 과한 무게의) 식물 덕후력을 여기저기서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이랄까? 아무래도 표지의 엄숙하고 섬뜩한 분위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엄청나게 스펙터클한 범죄 이야기’를 기대했던 모양이다. 에세이의 성격이 강한 글인 만큼 식물들에 관한 지나치게 상세한 이야기를 조금 줄였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차피 번역서이니 길벗출판사 편집자 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을 것이다. (영국 사람들은 식물학을 잘 아나보지…?)

몇 달 전 메리 로치의 <인체재활용>이라는 현재는 절판된 책을 읽었다. (아직 빌 브라이슨의 저서를 읽어 본 적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내가 생각하기에 메리 로치는 세상에서 가장 유머러스한 저널리스트다. 그는 무척 다양한 분야에 깊게 파고들며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인체재활용>은 그중에서도 시체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는 어떤 부패 과정을 거쳐 자연으로 돌아가는지, 시체가 의학이나 과학 등에 어떻게 이용되는지, 죽음 이후 시체의 보존 혹은 장례 방식은 어떻게 다양한지 등을 다룬다. 전혀 몰랐고 앞으로도 모를 뻔했던 사실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무척 컸다.

하지만 <인체재활용>은 시체와 식물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반면 <시체를 보는 식물학자>는 '시체' 그 너머에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메리 로치가 이 책을 봤다면 분명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그가 이 책의 추천사를 썼다면 더욱 풍부하고 재미 있는 독서 경험이 됐을 텐데… 아무래도 영국에서 출판된 책이라 그런지 미국 작가에게 추천사 써 달라고 할 생각을 못한 걸까?

나는 메리 로치가 이 책에 환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체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메리 로치만큼이나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는 글쓰기 능력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이런 부분들:
“어느 해에 학교에서 지리학 현장학습을 갔다. 하늘을 떠다니는 듯 황홀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지리학 선생에게 완전히 반했기 때문이다. … 고지대를 걸었는데 내가 쌍잎난초를 찾아냈다. 초록색 외계인을 닮은 작은 초록색 꽃이 피며 사랑스럽고 얌전해 보이는 난초다. 지리학 선생이 뭘 보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주 멋지고 사랑스러운 난초라고 설명했고, 선생은 성심성의껏 반응하며 언제 꽃을 피우는지 물어봤다. 나는 이미 꽃을 피웠다고 말했다. 선생은 놀란 모습으로 앞을 응시하다가 꽃이 참 딱하게 생겼다고 말하고는 일어나서 걸어갔다. 그렇게 선생과 친해질 기회를 날렸다!” 78~79p
“10대 시절에 나는 독성 식물들을 키우는 꽃밭을 갖고 있었다. 투구꽃, 독미나리, 협죽도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당시 가족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인 아버지를 해치우는 데 필요한 치사량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257p

이 책에서 한 가지 더 인상적인 부분을 꼽자면, 책날개의 저자 소개란에 저자가 동성애자라는 정보를 싣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이게 당연한 일이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동성애자는 소수자일 뿐 틀리거나 특이한 것이 아니며, 이 책에선 저자의 식물학자로서의 정체성 외에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이 특별히 주목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진보적 의식이 느껴져서 무척 평온하고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키워드: #법의학, #법의식물학, #법의환경학, #프로파일링, #범죄수사학, #법의식물학자, #식물학

추천 독자: 메리 로치의 <인체재활용>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 식물학이나 법의학, 프로파일링에 관심이 있는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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