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물만두 > 키로가의 작품들

 <밀림 이야기>에서의 자연은 생명을 가진 실체로서 환상적 이야기의 근간이 되고 있다. 인간을 먹이사슬의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만물의 영장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동물들과 모두 한데 어우러져 갈등을 빚고 대립하고 끝내는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자연이라는 무대의 동등한 등장인물들로 이야기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과 진행, 의의의 결론에 당혹스러워할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실적인 표현이 눈에 띄고 갈등의 과정을 이해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론들이 나기 때문이다. 이솝우화의 인과응보, 해피엔딩식 결론을 기대한다면 넌센스다. 옛 이야기의 결론은 이러저러 해야한다는 식의 선입견을 버리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들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고 자연의 질서와 섭리를 알게 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들은 모두 등장한다. 앵무새, 거북이, 가오리, 호랑이, 뱀, 플라밍고…… 이들은 사람처럼 인격을 가지고 사고하고 행동한다. 더구나 멀리 라틴 아메리카의 밀림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분위기는 사뭇 이국적이고 환상적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원색의 그림들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발동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특이하며 재미있다. 국내에서는 보기 어려운 그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번역자가 후기에서 말했듯이, 인간과 자연환경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에 저절로 공감이 간다는 사실이다. 인간에 의해 자연과 인간의 유대가 난폭하게 단절될 때의 끔찍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포의 모든 것―100명의 작가, 100편의 작품
지난 해 공포 문학 대가들의 숨은 작품을 발굴함으로써 공포 문학의 새 지평을 연《세계 호러 걸작선》 1·2를 소개한 책세상에서 이번에는 100명의 작가들의 100편의 호러 단편 작품들을 선별한《세계 호러 단편 100선》을 출간했다.《세계 호러 단편 100선》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인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100편의 호러 소설이 수록된, 가히 호러 문학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이 책에 수록된 100편의 소설은 대부분 국내 초역으로 호러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 지평을 보다 확장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이 책은 호러 문학의 대표적 작가들뿐만 아니라 오노레 드 발자크, 안톤 체호프, 찰스 디킨스 등 거장들의 알려지지 않은 호러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이들은 호러라는 공통적인 키워드로 접점을 이루면서도 각기 독특한 차별성을 잃지 않는다. 이와 같이 정통 문학과 호러 문학을 아우르는 작가 선별은 문학성이 다소 떨어지고 단순한 흥미만을 만족시킨다고 평가절하되어온 장르 문학으로서의 호러 문학에 대한 기존의 평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여기에 소개된 호러는 강렬한 핏빛의 처절함에서부터 차가운 섬뜩함, 뒤통수를 치는 반전, 공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머러스함까지 호러가 줄 수 있는 모든 빛깔의 공포를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 이제 독자들은 100명의 작가가 펼쳐 보이는 흥미진진하고도 공포스러운 세계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문학의 거장들이 내뿜는 호러의 숨결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작가들의 면면이다. 오 헨리, 체호프, 발자크, 디킨스, 조지 고든 바이런, 토머스 하디, 너대니얼 호손, 잭 런던, 기 드 모파상, 마크 트웨인,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의 이름에서 호러를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 이들의 작품에는 선혈이 낭자한 충격적 공포와 뱀파이어, 유령 등 호러의 전형적 창조물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음울한 분위기와 일상에 숨겨진 낯설음과 의외성이 초래하는 공포, 평온한 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일상을 전복하는 반전이 수준 높은 문학적 수사로 묘사되어 있다.
현실과 환상, 일상과 비일상의 공존하는 호러의 세계
근대 단편 소설의 거장인 안톤 체호프의〈잠꾸러기〉에는 호러의 전형적 코드인 기괴함이나 환상성이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로도 인간의 순간적인 어두운 충동과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리얼리즘적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는 섬뜩한 반전을 담아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위대한 소설가 너대니얼 호손의〈세 언덕 사이의 분지〉는 가정과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암시적으로 들려준다. 이 작품은 자연스레 호손의 대표작《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와 오버랩된다.
사회주의적 공상소설《강철군화The Iron Heel》로 유명한 잭 런던은〈문페이스〉에서 타인에 대한 이유 없는 증오심으로 인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살인까지 저지르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작품은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전개되다가 마지막에는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데, 증오심과 범죄에 빠져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묘한 공감과 동일시를 불러일으킨다. 특유의 유머와 모험담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유령 이야기〉에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작품 중반부까지 으스스하고 섬뜩한 분위기가 유지되다가, 뜻밖에도 갈 곳 없는 딱한 유령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처량 맞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유령의 모습에 우리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고전 호러에서 현대 호러까지
흔히 고딕 소설은 고전 호러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기묘한 공간을 배회하는 어두운 그림자를 떠올리게 하는 고딕 소설의 이미지는 초자연성을 부인하는 18세기 계몽과 이성의 시대에 반(反)하는 자유로운 상상과 억압된 잠재의식의 표출로 해석된다. 또한 고딕 소설의 공포는 질서와 안정에 가치를 둔 중산층 부르주아 계급의 잠재적인 불안을 자극하기도 했다.
E.T.A. 호프만은 독 일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고딕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자동인형〉에는 당시 그가 문학주의자들로부터 공격받은 빌미가 된 초자연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천착한 그의 문학적 세계가 그대로 펼쳐져 있다. 유령 소설의 대가 몬터규 로즈 제임스의〈학교 이야기〉는 유령과 유령에 의한 복수라는 호러의 전형적인 서사구조와 종반으로 갈수록 실마리가 서서히 풀리는 치밀한 이야기 전개방식으로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이와 같은 고전 호러는 19세기 말 이후《드라큘라Dracula》로 유명한 브램 스토커와 공포의 연금술사라 불리는 러브크래프트를 거치면서 한층 발전한다. 브램 스토커의〈스쿼〉는 그야말로 몸서리쳐지는 전율과 선혈이 낭자한 잊을 수 없는 장면을 각인시킨다. 우리에게는《지킬 박사와 하이드씨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로 더 유명한, 2차 대전 이후 현대적 호러의 전범적 작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악령이 든 재닛〉은 악령에 사로잡힌 한 여인, 그로 인해 공포에 떠는 마을 주민의 모습을 모호한 분위기와 긴장감 넘치는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다양하게 변주되는 공포, 호러의 매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호러 문학은 끊임없이 변주되고 재생산되며 그 힘을 증폭시켜왔다. 호러 문학에서 종종 페미니즘과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비판의 단초를 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근거이다. 미국 여성운동의 주요 이론가인 샬럿 퍼킨스 길먼의〈커다란 등나무〉는 억압적인 가치 체계에 희생당한 여성의 영혼이 유령으로 나타난 이야기를 통해 페미니즘 문학으로서의 호러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러브크래프트의〈아웃사이더〉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로부터 차단된 한 인간의 모습을 치밀한 묘사를 통해 그리고 있는데, 이는 우리 시대 많은 소수자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익숙하던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보이지 않는 더 큰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순간, 평온한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음을 예감하는 순간 우리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인간의 진보된 지적 능력으로 인해 더 이상 미지의 예측 불가능한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현대에도 호러 문학의 매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대에 심화되는 개인의 소외와 불안은 호러의 비정상성과 대치되면서도 맞물리는데, 호러의 비정상성은 기존 질서로부터의 일탈과 자유를 형상화하며, 이는 현대인의 소외와 단절을 표현하고 그 이전의 근원적인 통합에 대한 희망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 84. 깃털 베개 - 오라시오 키로가

 에드거 앨런 포의 등장에 힘입은 근대적 환상문학의 출현과 20세기로의 전환기의 환상문학, 그리고 이 시기와 맞물린 대중적 환상문학의 출현 등 '환상'이라는 요소를 안고 있는 문학세계를 총정리한 책. '환상'이라는 요소를 단일한 장르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상상적 체험'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디킨스, 모파상, 투르게네프, 카프카 등 이 책에 등장하는 무수한 유명 작가들은 모두 고전적이든 현대적이든, 확고하든 주변적이든 간에, 일시적으로 또는 지속적으로 환상의 차원에 머물렀던 작가들이다. 이러한 환상의 차원은, 작중인물의 확신 체계와 그가 직면하게 되는 불가해한 사건들 사이를 가르는 간극의 크기에 따라 그 규모가 좌우된다. 이 간극은 미미할 수도 현저할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간극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5. 양차 대전 사이
새로운 경향 그리고 새로운 장르 | 체스터턴, 길버트 키스 | 파레르, 클로드 | 도텔, 앙드레 | 사비니오, 알베르토 | 그린, 알렉산드르 | 키로가, 호라시오 | 그락, 쥘리앙 | 브리옹, 마르셀 | 슈나이더, 마르셀 | 에메, 마르셀 | 그린, 쥘리앙 | 파피니, 조반니 | 울프, 버지니아 | 드 라 마르, 월터 | 하비, 윌리엄 프라이어 | 야코비, 칼 | 블로흐, 로버트 | 잭슨, 셜리 | 불가코프, 미하일 | 톨스토이, 알렉시스 니콜라예비치 | 블릭센, 카렌 | 엘리아데, 미르체아 | 베리, 피에르 | 화이트헤드, 헨리 S. | 환상문학과 정신분석학 | 환상문학과 초현실주의 | 환상문학과 탐정소설 | 환상문학과 공상과학소설 | 환상미술

 라틴아메리카의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아우른 3부작. 저자는 콜롬버스, 코르테스와 같은 신세계 정복자들의 총칼에 짓눌린 원주민들의 삶과 투쟁을 쫓아가고,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의 절규에 귀 기울인다. 독재자들의 억압 아래서도 희망을 포기 하지 않은 라틴아메리카인들의 생생한 삶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책 속에 수록된 이야기는 각자 독립적으로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잘 짜여진 인과관계의 역사가 아니라 동시다발적인 여러 사건의 집합으로서의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전달한다. 1천권이 넘는 방대한 참고문헌을 이용한 저자는 추상과 압축, 극화의 형식을 이용하여 긴장감 넘치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3권 <바람의 세기>는 20세기 벽두에서부터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국가를 짓눌렀던 군사독재정권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80년대 중반까지의 격변의 세월을 아우구스토 산디노와 에밀리아노 사파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페론과 에비타 등 우리에게도 낯익은 인물들과 인간의 수치의 세월이라고 말해지는 군사독재의 시대를 희망으로 버텨낸 수많은 라틴아메리카인들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민중의 이름으로 이룬 개혁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요리한 사이비 혁명가들과 지역공동체들의 믿음인 공동의 선을 무참히 짓밟으며 성장한 풋내기 자본주의, 미주협력의 허울 아래 자행된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침략과 음모를 발가벗긴다.. - 1914년 산 이그나시오 : 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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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이드 > no more human
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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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로 시작하는 '인간실격'
다섯번 자살시도 끝에 다섯번째에 결국 죽어버리고 만 암울한 인간상이다.
아니, 그 자신의 이야기처럼 ' 인간실격' 인간 이하의 그 무엇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유리되어' 
세상이라는 큰 물에 결코 섞이지 못한 '기름'같은 존재.
때로는 '자살할 기력조차 없'는 백치같은 생활을 하고,
'남을 사랑하는 능력에 결함이 있는'
그는 '아무 데도 찾아갈 곳이 없다'

아무 데도 찾아갈 곳이 없다.

세상에 섞이지 못하지만, 세상이 그에게 주는 상처에는 무방비 상태여서
그 무서운 '인간' 이란 존재들이 모이고 모여서 이루어진 세상이 어느 순간
'쇠등에를 쳐 죽이는 소꼬리' 처럼 그를 위협한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 의 세계에서
단 한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쓸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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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생글보미 > 나의 마지막 연인을 찾아서.
하치의 마지막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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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했는데 억지로 기운 내려 애쓰는 것은

미처 익지도 않아 시퍼런 바나나를 레인지에 넣어

노랗게 만들려는 것

 

        "너는 너무 설명이 많아. 왜 그렇지?"

        하치가 말했다.

        "설명이라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일 수 없는 환경이었으니까"

        나는 말했다.

        "그것 봐, 또 설명하고 있잖아."

        하치는 웃었다.

        "온 세상이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것을 표현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조그만 편린으로 잘라내는 거야."

 

        그때 나는 비로소 어른으로 홀로서기를 하였고,

        내 혼과 사랑에 빠졌다.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과 농밀한 사랑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삶에 대한 증오는 사라진다.

        고마워요, 하치.

        그렇게 소중한 것을 가르쳐준 일, 평생 잊지 않을께요.

        설사 사이가 나빠져서 말조차 걸지 않게 되더라도,

      서로를 미워하게 되더라도,

      그 일에 대한 감사는 지우지 않을께요.  

 

        -하치의 마지막 연인-요시모토 바나나

        -2005. 12. 03. SAT. AM 09:47

 

        난 그런게 부러웠다.

        우울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꼭 해야할 일이 있는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까페에 가서 무슨 특정한 차를 마신다거나,

        아님 누군가와 수다를 떨 수도 있겠지?

        아니면 지저분한 몰골로, 질질 짜면서 갑자기 방문해도

        기꺼이 맞이하여 달래줄 수 있는 친구집.

        우울할 때 비상구가 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가진 사람.

        이제는 나에게도 그런 것들이 생겼다.

        쓸쓸하거나 외로워 미칠 지경일 때,

        이상하게도 일본소설을 손에 들면,

        마음도 차분해지고 갑자기 용기도 생긴다.

        사람 마음을 속속들이 읽어버리는 일본 소설이

        내 마음도 알고 위로해 주는 기분.

        누군가에게 말로 하려해도 다 말할 수 없는 그런 기분들을

        이 녀석이 정확하게 읽고 달래주는 것 같아 좋다.

        거기에다 따뜻한 차까지 후루룩 불어주면 금상첨화겠지...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아질 때까지 떨어져 있으면 돼."

        "무슨 소리야?"

        "이 세상에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잖아?

         아무리 해도.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안되는 사람."

        "그래서"

        "하지만 그 사람도 죽잖아.

         똑같이, 화도 내고 울기도 하고, 사람도 좋아하다가, 죽잖아?

         그런 생각이 들면, 용서해 주자고 생각하기도 하고,

         싫어할 수 없게 되잖아. 그건 멀리서 본다는 거야.

         저 파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빛하고 구름이 아룸다우면, 그 사람도 아름답게 보이고,

         바람이 상쾌하면, 용서하잖아?

         그럭저럭 좋아지잖아?"

 

         하치의 마지막 연인 마오짱.

         하치가 죽는 것도, 둘이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하치의 마지막 연인은 분명 마오짱이었다.

         그들에게 미래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기때문에,

         또 오래도록 변치 말자는 약속도,

         자기 곁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애원도 없기 때문에,

         내일 들어갈 감옥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기간이 정해져 있으면, 그런 일들을 쉬 알 수 있다.

         부자유스러움의 얼개를.

         그리고 매사 물러날 때를 포착하는 것이

       얼마나 생명을 활기 차게 해주는지를.

 

         사랑의 열정이 이별의 조짐을 불러들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어린애라서, 이별의 의미를 몰랐다.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는 타입이리라.

         언제나 똑같은 곳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운다.

         "하치, 보고싶었어"

         나의 눈에서 때맞춰 눈물이 똑똑 떨어지고, 나 자신은,

         '하치가 안 보이니까 눈물이여 멈춰주세요.'

         라고 생각했다.

 

         이따금 상상하곤 해.

         우리 둘만 있다면 얼마나 신날까.

         상상해봐.

         머리를 감겨주기도 하고

         가끔은 아침밥 지어줄 거야?

         아니면 그냥 훌쩍 밖으로 나가 거닐기도 하고

         영화를 보고 둘이 울 수도 있을까......

 

         우리 둘이 나이가 들어서도 영원히 잊지 말자

         약속을 기다리는 설레는 기분을

         비슷비슷한 밤이 오는데 절대로 똑같지 않다는 것을

         우리 둘의 젊은 팔  똑바른 등줄기

         가벼운 발걸음을

         맞닿은 무릎의 따스함을

 

         그렇다는 걸 몰랐다.

         매일 아침이 다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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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위악적(僞惡的) 결말에의 거부감
새는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왜 현실에서는 물론이고 소설에서조차도 사랑은 이뤄질 수 없는 것일까? 현실의 사람들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일컬어 '소설 같은 사랑'이라며 마치 그 사랑이 소설 속에서는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 자위하며 자신의 포기를 합리화하고, 소설 속의 인물들은 현실의 인간들 같은 통속성(通俗性)을 부정하려 애쓰며 내 마음 속 사랑은 물론이고 남의 마음 속 사랑까지도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며 '폼나고', '쿨하게' 손 흔드는 길을 택한다. 그렇게 서로 웃으며 손 흔드는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진심은 아니란 걸 느끼면서도. 결국 현실에서도 소설에서도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통속적인 러브 스토리는 없다. 현실의 인간들이 '통속성'의 의미를, 그 통속적인 사랑이 가져다주는 시련의 무게를, 소설 속에서나 이뤄질 법한, 막대하며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한 사이, 소설 속의 인간들은 세속의 인간들이 그런 고난쯤 거뜬히 이겨내고 사랑을 얻어냈으리라 지레 짐작하고는 자신들이라도 그런 상투성의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데에 사명감이라도 느낀다는 듯이 결연하게 '사랑'이 아닌 '사랑에의 추억'을 택한다.
 
 그러면서도 현실에서나 소설에서나 결국 이렇게 이뤄지지도 않을 사랑을 위해 겪어야하는 통과의례의 혹독함을 예외가 없다. 물론 현실에서의 그것이 더 어렵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소설 속에서의 사랑의 소멸은 모든 통과의례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적인 요소인 현실에서의 상투성에 대한 반발이라는 강박관념에서 기인한 성질이 다분하다. 그에 비해서 현실에서의 사랑의 소멸은 통과의례를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써 얻어질 사랑으로 하여 더 많은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는, 보다 현실적이고 진솔한 의미에서의 어려움 내지는 두려움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현실에서 정작 통속성의 사랑이 부재(不在)한다는 이유만으로 그에 따른 상실감을 채워줄 대리만족을 위해 역으로 소설에 있어서 하나의 정해진 순서로 이뤄진 듯한 판에 박힌 상투적인 사랑이 강요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랑에 이르는 그 수많은 과정들을 논하기에 앞서서, 사랑이 이뤄진다는 그 하나만으로 상투성의 유·무를 공박하는 것이야말로 더더욱 어불성설이라는 점이다. 독자에게 필요한 미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함이다. 자신에게 정직한 독자라면 자신이 노력한 끝에 다다른 결말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동안 자신이 그럭저럭(?) 즐겁게 밟아왔던 그에 이르는 과정들까지 부정하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이런 독자들의 관용이 사랑의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의 작가의 태만함에 대한 면죄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 이야기의 결말에 있어서의 상투성을 피하기 위한 강박관념이 결국은 정반대의 새로운 상투성을 고착시키게 되는 우스운 강박관념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것이지, 애초에 피하려했던 스타일의 결말이 지닌 상투성을 적극 옹호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결론을 위해서 줄거리의 상투성도 권장한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작가의 결론에 대한 공박, 아니 그를 넘어서 다른 독자들의 관점까지 설득시키려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누구 못지 않게 정직하지 못한 독자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내 정직함을 지키려하다가는 왠지 내가 정말로 정직하지 못한 인간이 될 것 같다는 묘한 불쾌감이 나로 하여금 이런 식의 글을 쓰게 만들었다. 사실 끝 부분의 '해설'에 나와있는 대로 아직 우리에게 있어 1980년대란 떠올리는 기억 속의 존재일 뿐, 읽는 책 속의 존재는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그 시절을 이 정도의 디테일로 현현시킨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평균 이상의 참신성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때로 단순한 기억 그 자체의 섬세한 재현은 그 하나만으로, 그 시대 자체와도 무관하게 그 어떤 세밀하고 복잡한 구성 못지 않은 새로움을 안겨주는 법이다.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의 상투성이 용서받을 수 있는 지점도 바로 그 시대의, 그 나이의 소년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첫사랑의 정취의 사진으로 찍어낸 듯한, 섬세한 포착에 있다. 사랑을 하기로 마음먹은 뒤에 은수를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3년 간의 시간은 '현실적으로(또는 보편적으로)' 기타, 독서, 공부 중 어느 하나를 완성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기에 1년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씩 미션을 완수해가는 은호의 모습이 관점에 따라선 지나친 과장으로 보일 법했지만 조력자인 '현주'라는 매력적이며 시의적절한 캐릭터의 구현은 읽는 이의 의구심을 왠지 미소 섞인 수긍으로 감싸안기에 충분했다. 이렇듯 해설에서 '달'에 비유되었을 정도로 은수라는 '태양'이 없는 은호의 나머지 삶을 지켜주었던 현주의 역할은 보너스 트렉에서의 차분한 독백으로 섬세하게 매듭지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훌륭한 조력자의 존재가 이미 남들보다 여러모로 뒤쳐진 자리에서 시작한 은호가 매야만 했던 유·무형의 굴레들의 존재를 잊혀지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끝내 어느 것 하나 민석이처럼 손쉬운 일이 없었다. 그런 그가 도달한, 일단은 큰 목적지라고 부를만한 자리에서 그에게 그가 원하던 것을 끝내 주지 않은 것이 과연 수긍할 만한 결론일까?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해주는 여자가 둘 다 있었다. 그의 사랑도 그가 받은 사랑도 어느 것 하나 단순하거나 맹목저인 점보다는 서로에게 조금씩이라도 다가가고 싶고 좀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애틋함과 절실함이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어느 누구의 사랑도 허락되지 않았다. 내게는 이런 결말이 처음엔 그저 아쉬웠고 나중엔 급기야 짜증스러웠다. 언뜻 스친 소설책이나 밑줄 쳐가며 꼼꼼히 읽은 소설책이나 어느 책에서도, 현실에서도 좀처럼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는 그 사랑 하나가 그 속에서도 이뤄지는 모습을 좀처럼 보지 못했던 스스로의 과문(寡聞)한 기억 탓이었다.
 
 어차피 20여 년 후로 이어질 결말에서 어디 살던 누구인지도 모르는 인물의 파경 예고로 어렴풋한 암시를 줄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20년 전에 둘 중 누군가와의 사랑을 이어주고 그것으로 20년 후의 희생양을 삼을 것이지 왜 굳이 번거로운 짓을 했을까 싶기도 하다. 사실 내가 무엇보다 서글픈 것은 현실 속에서나 소설 속에서나 사랑 때문에 고난을 겪는 인간의 상당수는 그 고난을 참아내고도 결국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현실에서의 원인이 사실상 어느 한쪽의 자의(自意)에 의한 '포기'라면 소설 속의 그것은 아직까지 현실에서 살아남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통속성의 악몽에 지레 겁먹은 제삼자인 작가에 의한 타살 내지는 강요이다. 결국 내 안타까움은 어디서도 사랑이 아니라 그 무엇이 되었든 원하는 것을 얻어서 잠깐이라도 행복해하는 인간의 소박한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한다. 사랑은 상투적일 지라도 행복만큼은 상투적일 수 없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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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눈너머 살림살이 > 성장하지 않은 어른
새는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만화방의 매커한 연기 속에서 버거운 현실과 비루한 나를 잠시나마 망각하고 싶은 때가 있다. 답답한 현실에서 환상으로 도피하고 싶은 때가 있다. 날품팔이 인생들이 유전하는 만화방마저도 상업화의 바람 속에서 대부분 현대화되었다. 노곤한 인생살이를 쉬어가던 아니 마지막 자존심을 부여잡고 버티던 이들이 대화를 나누던 만화방의 헛꿈들은 이제 매끄러운 상품의 외양을 갖추고 있다.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의 거짓 대립 속에서 대중소설의 역량을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지경이다. 희대의 히트를 친 대중소설들은 기초적 형식과 양심마저도 갖추지 못한 짜깁기의 남루함을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저자의 글은 대중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뭔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잔뜩 폼만 잡는 이들의 허랑한 위세를 뻔뻔스레 까발린다. 천박함에 대한 솔직함의 미덕. 저자의 강점이다.

미학적 권위주의에 휘둘려 비루한 언저리 인생들의 지리한 일상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 저자는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니들이 폼생폼사 어떻게 말해두 쫀쫀하고 야비한 3류인생들이란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구? 아뿔사!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자는 그런 말을 할 권리를 스스로 닫아걸고 말았다. 한없이 가볍게 살아가려는 저자의 노력은 근엄한 영웅주의에 가려지고 만다. 허접한 형식으로 반영웅주의의 일상을 그려내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뭐 해두 천재인 잘난 척만 가득하다. 뭐, 천재의 동기가 가당치도 않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카프카의 성두 읽고 다양한 고전을 섭렵한 놈이 어떻게 이토록 성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옥의 한철을 보낸 주인공은 교육에서 아무것도 전유하지 못한다. 상처와 학대 속에서 힘겨워하든 가족을 통해서도 주인공은 성장하지 않는다. 조울증의 보호고치에 갇힌 고독한 영웅은 스스로의 말처럼 소통할 줄 모르는 바보, 천지이다. 친구와 세상과의 만남에서 성장하지 않는 독특한 바보천재는 시대와 삶의 풍경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흔한 상투적 영웅주의의 대중문화적 반복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가족과도 친구와의 우정에서도, 여자친구와의 사랑에서도 강박적 우울증에서 부유한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직조하는 솜씨는 유쾌한 탈주를 그려내는데 쓰이지 않는다. 암기교육, 계급투쟁의 용광로, 도시락과 신발, 가장의 구별짓기 등으로 첨철된 우울한 교육환경과 산업재해와 사기로 건실한 가정에서 폭력 가장으로, 착한 것이 아니라 못난 아버지, 행상하는 어머니 등의 힘겨운 가족 환경은 주인공으로부터 튕겨나간다. 주인공을 관통하고 육체와 정신에 스며들지 않고 망망대해를 떠돈다.

심각한 고통과 아픔을 웃어넘기는 지혜를 찾아가기에 저자는 겁쟁이다. 두려움과 맞서는 ‘용기’는 어설픈 치기로는 어림도 없는 법이다. 어설픈 치기가 버려내는 시대의 아픔, 상처의 진실이란 허망하기 그지없다.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가슴시린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솜씨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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