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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평점 :
이 가을, ‘속죄’의 작가 이언 매큐언의 신작, 칠드런 액트를 만났다. 제목인 ‘The Children Act'는 미성년자와 관련한 재판에서 법정이 그들의 복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함을 명시한 영국의 유명한 ’아동법‘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피오나 메이는 예순을 목전에 둔 영국 고등법원 가사부 판사로, 유년기부터 평탄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 온 인물이다. 아이 없는 결혼 생활을 해온지 35년이 되는 어느 날, 남편 잭으로부터 열정적인 연애를 위한 외도를 허락하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남편의 가출과 함께 피오나는 백혈병에 걸린 열일곱 살 소년이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는 초유적인 사태에 관련한 소송을 맡게 된다.
사실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다 결국 사망으로 이어진 굵직한 사건이 한국에서도 몇 차례 있었고, 이를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몇 회 다룬 바가 있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희생을 막으려는 의료진과 신실한 종교적 신념을 지닌 종교인 사이의 아슬아슬한 대립! 어린 소년, 애덤을 살릴 수 있는 최종 남은 시간은 고작 사흘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남편과의 갈등으로 인한 충격 속의 피오나는 열일곱의 어린 소년을 허망하게 보낼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최종 결론을 내리기 전 직접 병원으로 방문하여 애덤을 만나 본다. 애덤을 만나 그의 종교적 신념도와 부모 및 애덤의 자발적 선택의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얼마나 맑고 순수하며 그러한 관점으로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게 된다. 결국 수혈을 허락해 그를 살리는 판결을 내리게 되는 피오나.
병실에서 부지런히 시를 쓰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애덤은, 결국 그의 복지를 우선시한 피오나의 결정으로 긴급 수혈을 받아 생명을 부지하지만 이후 부모와의 갈등을 빚게 된다. 부모와의 마찰로 힘든 애덤은 피오나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는 등 집착하게 되고, 그에 부담을 느낀 그녀는 애덤을 애써 외면한다. 뜻하지 않은 입맞춤, 집착, 외면, 소통의 부재 속에 다시 백혈병 증세를 보여 수혈을 받아야 하는 애덤은, 18세가 되어 법원의 판결 없이 수혈의 찬반을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데, 결국 그는 씁쓸한 선택을 하고야 만다. 돌아온 남편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고백하면서 오열하는 피오나의 모습은 추적추적 비 내리는 런던의 흐린 날을 떠올리게 했다.
이 책이 참 섬세하다고 느꼈던 이유 중 하나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나오는 마치 귓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인터넷으로 바흐의 음악들을 찾아 들어가며 책을 읽어나갔다. 덕분에 피오나의 감정 선이 음악과 함께 더 잘 느껴졌던 것 같다. 이 소설은 비단 법과 종교 간의 대립 문제뿐만 아니라 누가 보아도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나름의 가정 문제를 안고 산 50대 후반의 여인과, 결국은 허망하게 떠나버린 순수하고 맑아 슬프게 느껴졌던 10대 소년...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