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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
유카와 유타카.고야마 데쓰로 지음, 윤현희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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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

 

나에게는 일본 작가를 맞세워 한 쪽을 택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 것 같다. <꿈의 도시>의 작가 오쿠다 히데오는 어떤 작가와 맞서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고 결정해 버렸고 무라카미 류는 너무 어두워. 나에게는 너무 멀어, 하고 결정해 버렸지만, 한참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아사다 지로와 무라카미 하루키는 역시 아사다 지오라고 해버렸고 에쿠니 가오리보다는 요시모토 바나나, 라고 내 마음대로 정해 버렸다. 그러고는 잘 알지 못하면서 하루키는 시작은 괜찮은데 끝이 조금 늘 약하지 않아, 라고 -작품이라고는 딱 두 편 읽어놓고는- 그렇게 마구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하루키는 작품보다는 사람이 왠지 흥미로워서 관심을 갖게 되지만, 그 이상은 아니라고 건방지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하루키를 읽은 사람마다 하루키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했다. 하루키는 대단한 작가라고 제대로 읽어보면 하루키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기회가 없었다(마음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키는 언제나 내가 오독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작가니까. 하루키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내가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되거나 내 편견이 사라지거나 내 결론이 옳았음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사실 한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모르면서 이런 책을 읽어도 되나 고민을 했지만, 그 고민은 아무 이유가 없는 고민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는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 하루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두 저자, 유카와 유타카와 고야마 데쓰로가 이야기하는 글을 어떻게 쓰고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관한 담론이기도 했으니까. 더구나 <해변의 카프카>처럼 내가 이미 읽은 책도 사실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어서 하루키의 작품을 읽고 읽으나 읽지 않고 읽으나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가 나에게 던져주는 단상에는 큰 차이가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를 읽고 나니 하루키를 모두 읽고 싶다는 생각은 절실하게 들었다. 하루키를 제대로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를 다시 읽고 나만의 하루키 론을 한번 펼쳐보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 거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를 읽는 동안 책을 읽는 방법, 음악을 듣는 방법을 배우고 느꼈다. 두 저자의 대담을 읽는 동안 한 작가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평생을 사는 것도 참 행복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작품을, 한 사람의 예술 세계를 이런 식으로 줄줄 외우고 분석할 수 있다니, 그 지적 자산이 놀라웠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몇 사람을 파헤치다보면 다른 지식을 쌓을 기회는 없겠구나 싶어 그다지 많이 부러워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내가 어째서 하루키를 불편하게 생각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하루키가 그리고자 하는 세계가 내가 원하는 세계와는 조금은 다르다는 거. 선도 악도 없는 지하층에 있는 사람은 내가 원하는 일본인의 태도가 아니라는 거. 보편을 그리면서 일본 작가로서 조금은 표현해 주었으면 하는 원죄 의식도 조금은 담겼으면 한다는 거.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보면서 불편해지는 부분이 나로서는 하루키의 작품에서도 어느 정도는 느껴지는 거 같다. 하지만 오해일 수도 있으니, 정말로 다시 한 번 하루키를 진지하게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Q84를 몇 년 동안이나 IQ84로 알고 있던 내 고집도 책을 읽고자 하는 독자로서 좋은 태도는 아니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를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소설가란 사람에 대한 기대를 끝내 놓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루키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사람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작가구나. ,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게 되었으니 이제 또 알 일만 남았다. 곧 하루키를 읽기 시작할 거다. 아직 나에게는 오후가 남아 있으니, 하루키를 읽을 시간도 충분할 거다. 나에게도 하루키는 유카와 유타카에게 고야마 데쓰로에게 주었던 감동을 던져주기를! 정말로 간절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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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이타주의자 - 세상을 바꾸는 건 열정이 아닌 냉정이다
윌리엄 맥어스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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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이타주의자 윌리엄 맥어스킬

 

몇 주 전에 매달 몇 만원씩 기부하는 자선단체에서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이전에도 남편이 자동이체 카드를 바꾸는 바람에 그 달 후원금이 들어가지 않아 가끔 전화를 받은 터라 이번에도 그런 전화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그때 상담원이 전화를 한 이유는 전혀 다른 이유였다. 상담원은 먼저 아이들을 꾸준히 후원해 주고 있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니, 곧바로 이 세상에 엄마의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서 모유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며, 한참 무언가를 설명하고는 그래서 한 달에 1만원을 더 기부해 엄마와 갓난아기를 살려주시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길게 이어진 상담원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엄마와 아기를 위한 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더구나 1만원이라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하루 이틀, 서서히 내 마음 속에서는 살짝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설마 이 사람들, 나한테 지금 영업활동을 한 거 아닐까? 내가 너무 만만해 보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평소에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느꼈던 민망하고 당혹스러운 감정들이 조금씩 올라왔다. 이런, 내가 지금 옳은 판단을 내린 걸까? 에이, 그렇겠지. 잊자, 라고 생각했을 때 이 책 <냉정한 이타주의자>를 만났다.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책이 나에게 오다니, 일단 나도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흐뭇해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을 읽자마자 나는 내 자신과, 그리고 평소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지인들과, 저자와 끊임없이 대화를 하면서 정말 앉은 자리에서 이 책을 다 읽어버렸다. 우와, 내 가치관을 뒤흔드는 책. 내 가치관을 지지해 주는 책. 내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실들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섞여서 내가 질문하고 대답하고 생각하게 만든, 놀라운 책을 알아버렸다. 후원을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 했던 거야? 독서하는 내내 많이 놀라웠다.

 

사실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선단체에 매달 얼마를 후원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날에는 자기도 그런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가끔은 있지만 대부분은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나무라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대답을 하지만 내 논리도 그다지 정확하지가 않아서 영 대답하기가 시원치 않은 질문도 있다.

 

후원을 한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대단하네. 나는 여유가 없어서.”이다. 그건 그 분의 선택이니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끄덕여준다.

 

두 번째로 많이 듣는 말은 우리나라에도 가난한 아이들 많은데 굳이 외국 애들은 왜?”이다. 그럴 때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아이 한 명, 외국 아이 한 명 후원합니다.”

 

세 번째 질책은 왜 하필 기독교 단체야? 당신 기독교인가?”인데 아니다. 나는 비종교인이다. 한 몇 년 간은 왜 이 단체를 선택했는지 감정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했지만 논리가 빈약해서 그만두었다. 그저 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좋습니다.”라고만 대답한다.

 

네 번째 질책은 기껏 그런 데 후원해 봤자, 그 돈 대부분은 경영자들이랑 직원들이 가져. 1만원 후원하면 1000원도 아이들한테 가지 않을 걸.”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하는 대답은 저도 알지만 그런데…….” 뿐이었고, 내 반응을 지켜 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래서 나는 절대로 큰 후원단체에는 기부 안 해.”라고 말하면서 어때 내 말이 맞지, 하는 듯한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고 대화를 끝낸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반응까지는 이해를 한다고 해도 네 번째 질책은 사실 내가 반론을 못했을 뿐 그 분이 옳다고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냉정한 이타주의자> 덕분에 이제 내 느낌에 논리를 입혀 반박할 근거가 생겼다.

 

윌리엄 맥어스킬은 소비자가 맥을 살지 PC를 살지를 고민할 때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비는 얼마인지 CEO의 연봉은 얼마인지 따져보지 않는다고 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돈을 지불하고 구입할 상품을 보면 되니까. 자기를 위한 상품을 살 때도 기업의 재무건전성은 신경 쓰지 않으면서 남을 위한 상품을 살 때 왜 기업의 재무건전성을 따지는가? 사업이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 그 효율성을 따지는 게 맞는다고 말한다.

 

이제 나는 내가 후원하는 자선단체의 재무건전성과 사업은 다르기 때문에 당당하게 후원할 거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 하지만 그 때문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내가 후원하는 단체는 과연 효율적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가? 아이고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는가? 직접 현장에 가보지도 않았고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얼마만큼의 실효성을 거두는지를 알 수 있는 정확한 자료도 없는데.

 

하지만 윌리엄 맥어스킬은 나태하지 말고 냉정한 이타주의자가 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사업 실효성을 따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제시한다. 후원할 단체를 고를 때는 그 단체의 추정비용효율성, 실효성검증, 사업실행력, 추가재원 조달의 필요성을 근거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정도 자료는 매년 후원자에게 보내주는 사업 보고서 등을 보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올해는 한 번 해 볼 생각이다. 후원할 사업을 고를 때는 규모, 방치 정도, 해결 용이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그 부분은 공부를 해야 한다.

 

<냉정한 이타주의자>의 첫 부분을 읽고 있을 때는 저자가 자선단체를 너무 줄 세우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의문이 정말로 강하게 증폭했을 때 저자는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버거와 페나가 냉정한 이타주의자들에게 드는 반론(62. 어떤 명분이 가장 효율적인지 따져 보는 게 비윤리적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어째서 냉정해져야 하는지를 설득해 나간다. 물론 다 설득이 되는 건 아니다. 결국 어떤 이성이 작용하더라도 나는 가끔은(아마도 자주이겠지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마음껏 후원을 할 것이다. 비용대비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더 마음이 쓰이는 곳은 어쩔 수가 없다.

 

<냉정한 이타주의자>를 읽으면서 많은 순간 놀랐다. 아르바이트 월급을 제때 주지 않고, 밀린 아르바이트 비를 줘야하기 때문에 정직원들 월급을 늦게 줄 수밖에 없다는 기업 불매 운동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반대 운동을 하되 불매 운동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줄 수 있다는 주장은 정말로 뭔가에 한 대 맞은 것처럼 놀라웠다. 공정무역보다는 오히려 착취하는 공장이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감정과 이성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공장식으로 사육하는 가축을 먹지 않겠다는 내 결심을 뒷받침해 주는 주장 앞에서는 한참 고개를 끄덕이며 위로를 받았지만, 소보다는 닭, 달걀, 돼지를 먹지 않는 것이 훨씬 더 탄소 배출을 줄이는데도 동물의 복지를 개선하는 데도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은 새롭게 안 사실이다.

 

숫자를 만 단위로 끊어 쓰는 우리나라에서 숫자 표기 기준은 따로 정하지 않기로 했다는 누군가의 말을 들은 적도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3,000이 아니라 3000으로 적어준 책을 봤다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느낌, 감정, 의문, 깨달음을 동시에 제공하는 책 <냉정한 이타주의자>는 내가 이 지구 행성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늘 참고하는 책이 될 것 같다. 결국에 결정은 내 마음이 하고 말겠지만. 좋은 책을 읽었다.

 

(계속해서 의문점을 쓰고 느낀 점을 쓰느라 포스트잇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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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인간다움을 말하다 - 정의가 사라진 시대, 참된 인간다움을 다시 묻다
송용구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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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인간다움을 말하다>

 

몇 년 전에 지인의 서재를 구경하다가 한 두 시간 남는 시간을 때우려고 문학동네 명작선집(정확히 그 명칭인지는 모르겠지만)을 살펴보다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얇은 책을 꺼내 읽은 적이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모르는 여인의 편지>. 남자는 기억하지 못하는 단 한 순간 때문에 평생을 남자를 사랑한 여자가 남긴 편지, 가 그 책의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너무 급하게 읽어서인지 원래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인간이어서 그런지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아련함은 기억에 남는다. 전반적으로 남자들의 로망(누군가 나를 지켜봐주고 사랑해 준다는)을 다룬 책 같기도 했지만 사는 동안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따뜻할까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전혀 다른 상황 설정이었지만 츠바이크의 책을 읽는 내내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을 떠올렸고, 독일인의 감성을 떠올렸고, 그래서 그 감성을 옮기는 독일어 번역가들, 독일문학 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기억했던 이름이 바로 송용구 번역가였다(사실은 용구라는 이름이 우리 집에도 한 분 있기 때문에 쉽게 기억을 했던 거지만). 굵직한 독일 문학을 옮기는 번역가, 그런 분이 써 나가는 문학 이야기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 궁금증만으로 <인문학, 인간다움을 말하다>를 선택했고, 읽어냈다.

 

결론을 말하자면 순수한 학자의 순수한 책이 아닐까 싶다. 목차와 소제목이 이 책의 특징과 저자의 성격을 대부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1장부터 8장까지의 제목만을 가지고 새로 쓰는 인간다움 8계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목차가 상당히 아름답고 순수한 책이다. 살짝 흥분하면서 읽은 1장을 제외하면 2장부터 7장까지는 정확한 지식과 사람이 갖추어야 할 본성을 잔잔하게 이야기해 나간다. 8장의 지브란을 읽을 때는 몇 십 년 동안이나 잊고 살았던 내 감성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얼마나 아련했는지. 지브란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읽고 또 읽었던 정말 사랑하는 책이었는데, 어느 순간 책도 사라져 버리고 내용도 내 기억에서 사라져 버려 안타까운 작가였다. 하지만 <인문학, 인간다움을 말하다>에서 사랑은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며 사랑 외엔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것.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 당할 수도 없는 것. 사랑은 다만 사랑으로 족할 뿐이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지브란과 정말로 많이 사랑하고 함께 했던 시간이 있었음을 떠올렸고 마음 한 편이 아련해졌다. 시간이 나면 꼭 다시 <예언자>를 영접하리라!

 

하지만 책 전반에 걸쳐서는 송용구 선생님이 좀 더 까뮈와 같았으면 하는 바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좀 더 반항해 주고 좀 더 도발적이고 좀 더 까칠한 책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너무나도 얌전하고 순수해서 아이들에게 읽어보라고 적극적으로 권하기는 하겠지만 좀 더 어려운 나만의 독서 책으로는 그다지 적합한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루한 지식을 소유한 나로서는 모르는 내용이 상당히 많아 도움이 되는 독서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문학을 제대로 전달해 줄 수 있으면서도 쉽게 쓰는 저자의 잔잔한 문체도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아주 소중한 분을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곧 송용구 저자가 쓴 <인문학 편지>도 읽어봐야겠다.

 

단지 책 표지부터 1장까지는 읽는 내내 생각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정의가 사라진 시대라는 표지 제목을 보면서 정의는 사라지지 않았을 텐데, 그 정의를 누르는 인간의 탐욕은 얼마나 큰 힘을 갖는가를 한참 생각해야 했고, 들어가는 글에서 비인간적인 사건을 유발하는 원인은 가깝게는 우리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추락한 인간성과 전도된 가치관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적은 글에서는 사람의 본성은 환경과 주변 사람에 의해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사회 구조와 시스템이 더 근본이라고 생각하고 고쳐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송용구 선생님은 1<날개>에서 를 진정한 인간성을 찾아가려는 사람으로 아내를 물질에 호도된 타락한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그 부분을 읽는 동안 나는 내내 한숨이 나왔다.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의 가족은 송용구 선생님의 묘사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서 한 여인이 너무나도 즐거워서 몸을 파는 직업을 갖고 있었을 리는 거의 없을 테고(물론 자발적 매춘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며, 매춘의 윤리적 측면을 논할 생각은 전혀 없다) 혼자 몸도 아니고 무능한 지식인 남편을 부양하고 있다면(그 관계는 처음에 분명히 사랑으로 시작했을 텐데), 그런 직업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물질 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매도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시대에는 그럴 수 있었다고 해도 21세기 우리 시대에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갈구했지만 사랑이 아닌 경멸만을 나에게 주는 남편에게 상대방은 필요도 없는 돈을 뻐기듯이 던져 줄 수밖에 없는 여인의 마음도 인간다운 사람이 되려면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날개>를 읽어보지 못했으니 이 남자가 몸을 쓸 수 없고 여자가 돈을 벌어오지 않아도 충분히 아내도 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면 는 자신의 인간성을 찾겠다며, 날개가 돋으라고 돈을 버릴 수는 없는 거다. 최소한 아등바등 살아가는 아내에게 돌려줘야 했고, 아내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야 했고, 적어도 사회 제도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면 아내를 경멸할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마음을 보듬어는 줘야 했다. 내 마음이 중요한 만큼 아내의 마음도 충분히 배려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긴 글도 이상의 <날개>를 진지하게 읽어본다면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송용구 선생님 덕분에 <날개>, <시지프스의 신화>, <고도를 기다리며>, <예언자>, <인문학 편지>를 독서 목록에 추가했다.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독서야말로 정말로 값진 독서라고 믿는다. <인문학, 인간다움을 말하다>는 그런 의미로 충분히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무엇보다도 부록이 알차다. 송용구 선생님이 책을 쓰면서 참고한 책 목록도 좋지만 세인트존스 대학교 선정 100권 목록처럼 몇 년에 걸쳐 천천히 읽어나갈 책 목록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인문학, 인간다움을 말하다>가 나에게 준 또 다른 선물이었다. 인문학의 시각으로 문학을 바라보고 그 지평을 넓히고 싶은 사람에게는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디자인이 정갈한 책도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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