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김혜리 기자)의 글을 읽기 위해 영화를 봤다는”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돌려줄 순간이 이렇게 왔네요. 당신의 글을 읽기 위해 시집을 펼치게 됐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SF 명예의 전당 - SF Award Winner 2014-2021: 乾
김보영 외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평점 :
품절


우리 SF가 지닌 첨단의 순간을 이번 기회로 한꺼번에 확인할 수 있어서 기대가 큽니다! 작품 구성과 추천사도 참 좋아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안녕 - 박준 시 그림책
박준 지음, 김한나 그림 / 난다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년 전 어느 날 경의선 책거리에서 한 시인의 시집을 발견해 읽다가 한참을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시를 모르는 저에게 시를 알음알음 찾게끔 만들었어요.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박준 시인의 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시는 점차 굳어버린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좋은 것들은 여전히 그냥 그대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박준 시인이 쓰고 김한나 작가가 그린 우리는 안녕은 오랜만에 읽은 그림책입니다. ‘안녕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닿기까지 누군가는 그 안녕과 안녕 사이의 거리를 삼키고 있었다는 걸 마지막 장을 넘기며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모르고 느끼지 못한 게 많다고 생각했어요. 영원히 부족할 수밖에 없는 서로에게 안녕을 묻는 방법을 하나 더 알게 되었습니다.

 

안녕은 부스러기야.
안녕은 혼자를 뛰어넘는 말이야.

안녕은 어제를 묻고 오늘 환해지는 일이지.

()

한번 눈으로 본 것들은 언제라도 다시 그려낼 수 있어.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을 그리움이라고 하는 거야.
()

안녕, 다시 안녕이라는 말은 서로를 놓아주는 일이야.

안녕, 다시 안녕이라는 말은 뒷모습을 지켜봐주는 일이야.
안녕, 안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봉준호의 영화 언어
이상용 지음 / 난다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이상용 평론가께서 강의를 하셨는데, 당시엔 저학년이라 듣지 못했다. 이후에는 내가 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아쉽게 강의 들을 기회는 없어졌다. 그 후 시간이 지나 한 감독의 영화 세계를 구심점으로 엮인 책으로 만나게 됐다. 봉준호의 영화 언어. 기존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온 부분과 더불어 이상용 평론가의 관점에서 확장된 얘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유사와 상사, 상사성의 전략을 연상적 작용으로 연결한 부분이 어렵지 않게 전달됐다고 생각하고, 헤테로토피아와 관련한 얘기들을 봉준호 감독의 근작이 지닌 지점들로 연장시킨 것이 의미 있었다. 많은 수의 인덱스 스티커가 흥미로운 부분들을 대변해 준다.

 

책에서 니체의 문장을 인용하여 괴물의 추격자가 괴물과 흡사한 속성으로 인해 자기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부분이 있다. (<마더>의 엄마와 <기생충>의 기택을 예시로 든다.) 그러면서 쫓는 자의 위기는 이러한 심연을 발견하는 순간이라고 하는데, ‘쫓는 자의 위기를 바라보는 나와 이상용 평론가의 방향이 조금 달랐다.

 

쫓는 자의 괴물 같은 내면을 발견하는 것은 순간이 가져다주는 위기라기보다 징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해당 글의 앞선 챕터에서는 대타자(지젝라캉 논의에서의 대타자. 윤리적 믿음 등의 상징적 효력)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데, (이 논의를 끌고 오자면) 인물들이 잊고 있던 대타자에 대한 인식이 위에 얘기한 순간에 말 그대로 출현했을 뿐, 위기는 영화의 어느 시점 이후 계속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쫓는 자의 위기가 표면에 드러나는 순간 이미 영화 속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라거나 혹은 서사의 변곡점으로 작용한다는 해석이 더 온당하지 않을까. 위기는 한 지점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이미 잠복해있는 것이다. 이는 영화 속 인물에게도 마찬가지고 영화 밖 일종의 대타자인 관객의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마 책의 특성상 모든 부분을 상세하게 적어내기는 어려웠으리라 본다.

 

일관된 목소리로 한 감독의 영화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은 항상 경외롭다. 보는 것만큼이나 글을 통해 접근해도 재밌는 것이 영화다.

 

집을 나온 자만이 언젠가는 새로운 식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흔들리는 집의 위기 속에 목적을 향하는 빛이 있고, 찾는 자의 클로즈업이 있으며, 허망하게 부서지는 이미지와 죽음이 있다. 봉준호의 영화는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흔들리는 이미지를 이어간다. 이미지의 불꽃놀이가 끝날 때 관객들은 <흔들리는 도쿄>의 마지막 대사처럼 비로소 말하게 될 것이다. ‘흔들린다.’ 그것이 봉준호의 영화가 도착하려는 최종 목적지다.”_p.2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머니의 음성같이 옛 애인의 음성같이 - 김승희가 들려주는 우리들의 세계문학
김승희 지음 / 난다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대가 바뀌면 독법도 바뀌게 된다. 시대상의 반영이라는 고루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개중에는 시간이 지나도 유효한 독법이 존재한다는 걸 역설하고자 함이다. 지금의 시선과 적당한 거리감과 밀착됨을 모두 지닌 김승희 시인의 글은 책을 넘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책을 씹어 삼켜 소화하는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 나아가 성실한 쓰기로 맺어진 생각들이 그 글에 대한 호오와 관계없이 몸을 통과하는 순간이 있다.      


 어떤 절망과 고뇌는 사람들이 ‘이미 다 아는 것’이어서 주목받지 못한다. ‘아는 좌절’을 얘기하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일까. 김승희 시인은 아는 것에서 모르는 걸 끄집어낸다거나 하는 방법론에 집착하지 않는다. 작품 속에 존재하는 의미와 행간에 자리한 시간의 흔적을 우직하게 적어낼 뿐이다. 그 성실함은 송원경 편집자의 말처럼 ‘희망을 찾기 위해서는 절망을 응시’하는 작가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더불어 “문학의 당위를 주장하기보다는 불가피를 고뇌해야 한다고 믿는”(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작가가 김승희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피하게 그곳에 존재하게 된 문학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주목하는, 타인의 희구와 맞춤한 얘기를 적어냄으로써 가능한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문학이 지닌 보폭을 살피는 일이 되어야 할 테다. 여러 해를 지나 다시 이곳에 다다른 ‘문학기행’이 여전히 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아름다움의 쓸모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 삶으로부터의 세 이야기』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언제나 기쁨을 주는 동시에 슬픔과 불안을 안겨줄 때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기쁨과 함께 불안을 느끼는 것일세. 그것이 서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영원보다 더 아름다운 것일세.     


나는 여기서 아름다움의 ‘쓸모’를 본다. ‘쓸모’의 쓸모없음에 대해. 그리고 그 쓸모없음의 쓸모를 다시 생각한다.

     

“예술이 지향하는 이상 가운데 하나는 아름다우면서 쓸모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 것은 이 쓸모없다는 것은 ‘지금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의 쓸모를 찾아내는 것이 문화의 발전이기도 하다.” 황현산,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희극의 조건과 비극의 주변인     


 김승희 시인은 윌리엄 사로얀의 소설 『인간희극 The Human Comedy』 의 제목을 두고 희극에 대해 얘기한다. 희극을 ‘경험의 어둠이 밝음으로 여과되어가는 관점’(크리스토퍼 프라이)으로 설명한다면 이 제목이 단테의 신곡(The Divine Comedy, 천상의 관점)과 대비되는 인간극이 아니라 인간희극이어도 적절해 보인다는 주장인데, 개인적으로는 삶의 혼란과 안정이 병존하며 과도기적 이행을 겪는 게 희극이 아닐까 생각했다.     

죽음의 의미를 묻는 젊은이에게 ‘그것은 젊은 질문이고 나는 늙은이’라며 그것의 알 수 없음을 내비치지만 결국 세상이 모든 겁쟁이들의 자리라는 것을 알려주고(“겁이 나서 그들은 서로 겁을 준단다.”), ‘나는 모든 태도의 밑에 깔린 참된 본질에 관심이 있’다며 따뜻함을 건네주는 게 이 ‘희극’에 빠질 수 없는 얘기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비극은 어떤가. 시대는 우리를 비극의 어디에 위치시킬까. 전쟁이 낳은 비관적 실존주의 문학의 경우 손창섭의 외침이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와 나란한 배음을 이룬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러한 비극을 연출하기 위한 의미로만 존재하는 것인가. 신은 이 세상 만물 중 어느 것 하나 의미 없이 만든 것이 없다고 하니 말이다.”     


전쟁과 황폐의 상황 속, 비극에서마저 주변인으로 전락하는 인물들의 외침이 시공을 초월해 메아리친다.   

   

배달과 알고리즘의 시대자아와 양심의 자리     


‘배달과 알고리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통조림의 시대’는 외피만 바꾼 채 여전히 이어진다.    

 

“나는 우리가 통조림의 시대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네. 우리는 이미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네. 만사가 미리 생각되고 미리 씹어지고 미리 느껴진 것이거든. 열기만 하면 되니까. 날마다 세 번씩 집으로 배달되고.”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개선문』     


자아가 비대해지면서 우리 안에 양심이 위치할 자리 역시 좁아지는가? 믿음이나 신념은 시대와 불화할 수 있지만 맹목은 ‘나’ 바깥의 대다수의 세계와 불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의 자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살기 전에 나 자신과 함께 살아야 하니까.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 유일한 것은 사람의 양심이야.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