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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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 대한 아픈 진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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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우리가 모르는 미국 그리고 세계 - 《뉴욕타임스》신디케이트 기고 최신 칼럼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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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는 말한다. 이 시대는 삶권력이 네트워크적으로 구조된 제국이라고. 이 시대의 경향이 하나의 제국이라면 그 제국의 중추에는 바로 미국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결정하는 권력, 그 중심에 선 미국의 진면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혹자는 이것이 <반미주의>이고 반미주의= 매국 이라 매도하지만,그것은 그저 국민이 진실을 알게 될 까 두려워하는 권력자들의 자기방어 논리일 뿐이다. 

촘스키의 칼럼들은 권력이 '실제로' 어떤 일을 행하며, 그것을 어떠한 거짓말로 감추는 지를  날카롭게 들추어 낸다. 언어학자로 명망높은 그가 연구할 시간을 쪼개 언론도 다루지 않는  미국 정부의 거짓말들에 메스를 들이대는 이유가 뭘까?  책의 본문으로 돌아가 본다.

-정의와 자유를 위한 역사적 승리가 그랬듯이 어떤 승리도 저절로 얻어지지는 않는다. 그동안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명백한 교훈 중 하나는 "권리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본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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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시대 - 에릭 홉스봄 자서전
에릭 홉스봄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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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본문 중-

 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유대인으로 태어난 에릭 홉스봄은 정말 20세기의 살아있는 화석이라  할 만하다. 질곡의 20세기에 좌파로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낸 이 역사가의 개인사는 그러므로 20세기가 한 개인의 삶에 어떻게 엮여 있는가를 살피고, 우리가 살아온 20세기를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사실 이 책을 끝까지 읽는 데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69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도 그렇지만 홉스봄 스스로도 자신의 이야기에 극적 효과나 화려한 수사를 곁들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치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멀리하고 철저히 역사가이고자 한 이 늙은 역사가의 곧은 태도에 경의를 표할 것이다.  

세상에 관해 하나의 신념을 갖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그 신념과 태도를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견지하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이 늙은 역사가는 아직도 경이로운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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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강의
오병남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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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또 미학 수업을 듣기 전에 나는 미학이란 것이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교양으로 미학수업을 들었지만 그 수업은 일반적이기 그지 없어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교재였던 이 책만은 무척 좋은 것 같다. 오히려 수업보다도 많이 남는다.

그만큼 그만큼 체계적이고, 어렵지 않게 쓰여 있다. 어렵지 않은 어투임에도 처음 듣는 개념이 많아 이해가 쉽지 않았는데 그럴 땐 찬찬히 읽어보면서 의미를 곱씹곤 한다. 미학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면, 미학에 접근하고 싶다면 그 이론서로는 아주 추천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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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팔십년대
임철우 외 지음, 민족문학연구소 엮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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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온전히 시일 수만은 없다면, 소설이 온전히 소설일 수 없다면,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없다면 그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소설 팔십년대]는 그 서글픈 시대를 조명하는 소설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그 소설들은 거칠고 어느 때는 무척 단순한 도식을 보이지만 아.프.다.

[소설 팔십년대]는 그 시대를 살았던 작가들의 팔십년대 소설과 함께 최근 소설을 함께 기재한다. 그 것은 그들이 고민했던 문제들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들이 꿈꿨던 세상은 정말로 왔는지를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어 매우 좋은 경험이 되었다.

특히, 수록된 소설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은 작가가 팔십년대의 과거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팔십년대의 문제 의식과 이어진다 하더라도) 문제에 눈을 돌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부채를 진 나라 베트남이다. [존재의 형식]은 기존 소설들처럼 베트남전만을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베트남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 - 베트남의 노동탄압-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탄압의 가해자는 한국기업이다. 우리는 제국주의 (일제)의 피해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를 닮은 가해자이기도 한 것이다. [존재의 형식]은 과거 운동권들의 패배감과 베트남전의 패해와 베트남의 노동탄압과 국가의 이중적인 모습을 모두 포착하고 있다.

누군가는 팔십년대 소설이 싫다고 말한다. 단순하고, 거칠고, 고문당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이미 생명력이 다하지 않았느냐고. 그렇지만 그 시절에 대한 반성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이 시대에 그것을 기억하는 소설이 과연 생명력이 다한 것일까? 팔십년대 중반에 태어나 구십년대 소설을 읽고 성장해, 이천년대에 이십대를 살고 있는 나는 팔십년대의 문제의식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게다가 방현석의 경우 '현재의 문제'를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지 않은가? 팔십년대 작가들의 소설은 충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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