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팔십년대
임철우 외 지음, 민족문학연구소 엮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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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온전히 시일 수만은 없다면, 소설이 온전히 소설일 수 없다면,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없다면 그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소설 팔십년대]는 그 서글픈 시대를 조명하는 소설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그 소설들은 거칠고 어느 때는 무척 단순한 도식을 보이지만 아.프.다.

[소설 팔십년대]는 그 시대를 살았던 작가들의 팔십년대 소설과 함께 최근 소설을 함께 기재한다. 그 것은 그들이 고민했던 문제들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들이 꿈꿨던 세상은 정말로 왔는지를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어 매우 좋은 경험이 되었다.

특히, 수록된 소설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은 작가가 팔십년대의 과거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팔십년대의 문제 의식과 이어진다 하더라도) 문제에 눈을 돌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부채를 진 나라 베트남이다. [존재의 형식]은 기존 소설들처럼 베트남전만을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베트남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 - 베트남의 노동탄압-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탄압의 가해자는 한국기업이다. 우리는 제국주의 (일제)의 피해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를 닮은 가해자이기도 한 것이다. [존재의 형식]은 과거 운동권들의 패배감과 베트남전의 패해와 베트남의 노동탄압과 국가의 이중적인 모습을 모두 포착하고 있다.

누군가는 팔십년대 소설이 싫다고 말한다. 단순하고, 거칠고, 고문당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이미 생명력이 다하지 않았느냐고. 그렇지만 그 시절에 대한 반성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이 시대에 그것을 기억하는 소설이 과연 생명력이 다한 것일까? 팔십년대 중반에 태어나 구십년대 소설을 읽고 성장해, 이천년대에 이십대를 살고 있는 나는 팔십년대의 문제의식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게다가 방현석의 경우 '현재의 문제'를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지 않은가? 팔십년대 작가들의 소설은 충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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