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 - 팀 켈러

두 말할것 없는 팀켈러의 역작!
당장 마가복음을 펴고 이 책과 함께 말씀을 읽으면
선한 고민이 들 것이다.
그 분은 나에게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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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조언과 다르다.... 복음은 조언이 아니라 왕을 따르라는 부름이다.
p.52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으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만신창이가 되셨다.
p.58


종교에서 율법을 지키는 목적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율법의 세부 항목에 연연한다. 종교에서는 정확히 뭘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소한 실수도 하지 않을 것이다. 율법의 의도는 뒷전이다. 율법의 세부 사항을 다 찾아내 율법을 정확히 지키고 있다는 확신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삶에서 하나님의 법은 비록 구속력이 있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보여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사랑의 삶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우리 자신에게 매몰되는 대신에 하나님과 사람들을 어떻게 섬길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하나님의 법을 공부하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죄의 결과로부터 구속해 주신 분을 기쁘시게 하고 닮아 가기 위해서이다.
p.79


의사들은 쪽잠이 아니라 깊은 수면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휴양지에 가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안에서 영혼의 깊은 쉼을 얻지 못하면 진정으로 쉬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고통을 겪으셨다. 덕분에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서 오는 깊은 쉼을 누릴 수 있다.
p.82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남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일하고 또 일한다. 이 일은 복음 안에서 쉼을 얻기 전까지 절대 끝이 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위대한 창조 사역을 마치고 ˝다 이루었다˝하신 뒤에 쉬셨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위대한 구속 사역을 마치고 ˝다 이루었다˝라고 쉬셨다. 덕분에 우리가 쉴 수 있게 되었다.
p.82


˝허리케인이 사람이 되고 불이 육신이 되고 생명 자체가 생명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걸어다녔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엄청난 주장이다. 하지만 이 주장이 아니면 기독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는 세상의 가장 깊은 현실을 더없이 분명하게 밝혀 준 주장이거나 얼토당토않은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다. 우리 대부분은 감히 이렇다 저렇다 확실히 말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그 중간의 얄팍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 N.T. 라이트
p.84


영국의 유명한 목사 딕 루카스가 설교 중에 초대교회 성도와 이웃 로마인 사이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웃 로마인은 물었다. ˝듣자 하니 종교인이라면서요? 종교는 좋은 것이지요. 당신 종교와 성전과 성지는 어디에 있나요?˝
크리스천이 대답했다. ˝성전은 따로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의 성전이시지요.˝
˝성전이 없다구요? 그럼 제사장은 어디서 제사를 지내나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제사장은 따로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의 제사장이시죠.˝
˝제사장이 없다구요? 그러면 희생 제물은 어디서 드리나요? 희생 제물을 드려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잖아요˝
˝희생 제물은 필요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의 희생 제물이시죠˝
˝뭐 이런 종교가 다 있어?˝ 이웃 로마인이 툴툴거리면서 간다.

맞는 말이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p.87


당신이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절벽 중간쯤에 가지가 하나 뻗어 나와 있다. 이 가지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다. 이 가지를 잡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믿음이 필요한가? 이 가지를 잡기만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절대적으로 확실할 수 있는가? 물론 그럴 수 없다. 믿음은, 이 가지를 잡을 만큼만 있으면 충분하다. 당신을 구해 주는 것은 믿음의 질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중요한 것은 가지에 대한 믿음의 강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가지의 강도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가지시다.
p.99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을 때에는 안을 보지 말고 예수님을 찾아가야 한다.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께 가서 아뢰라.. 그럴 때 예전부터 당신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셨던 예수님을 발견할 것이다. 예수님은 믿음의 원천이요 공급자이시며 믿음의 대상이시다.
p.100


그분의 은혜는 좀처럼 우리의 시간표대로 진행되는 법이 없다.
p.109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데에 지체하시는 게 아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지체하신 것이다.
p.109


예수님께 가면, 애초에 드리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요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많은 것을 주실 것이다.
p.112


예수님은 권능의 손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으키셨다. ˝얘야! 내가 네 손을 잡고 있으니 죽음은 그저 잠일 뿐이다.˝
p.115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강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충만한다. 어릴 적에는 부모의 손을 잡고 나가기만 하면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쁜 부모도 있고, 좋은 부모라도 완벽하지는 못한다. 심지어 최고의 부모도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완벽한 부모시다. 그분이 우리의 손을 잡고 칠흑 같이 어두운 밤길을 함께 걸어 주신다. 하늘에 별을 다신 우주의 주인이 우리 손을 잡고 말씀하신다.
˝얘야. 이제 일어나야지.˝
p.115


윌리엄 반스톤의 따르면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의 차이는 이렇다. 가짜 사랑의 목적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것이다. 가짜 사랑에는 조건이 붙는다. 자신을 지지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준다. 가짜 사랑은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다. 자신에게 해가 된다 싶으면 즉시 몸을 뺀다. 하지만 진짜 사랑의 목적은 남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행복을 내 행복으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이 사랑을 준다. 진짜 사랑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랑이다. 아낌없이 전부를 주는 사랑이다.
p.158


우리는 모두 진짜 사랑을 갈망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사랑을 할 능력이 없다. 조건 없이 파격적으로 사랑해 줄 분.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해 줄 분. 이런 사랑을 받고 나면 우리 안에 자존감이 충만해져 비로소 우리도 그런 사랑을 나눠 주기 시작할 수 있다.
p.159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 다른 사랑에 연연하지 않는다. 진짜 사랑을 하게 된다. 상대방이 사랑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이 그를 사랑하게 된다. 이런 사랑은 나눠 줄수록 더욱 커지는 사랑이다.
p.160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건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의 가치를 완전히 뒤엎어 용서를 이루셨다.
p.163


예수님은 그냥 왕이 아니라 십자가 위의 왕이시다. 보좌에만 앉은 왕에게는 의무감으로 복종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왕이시다. 그래서 그분께는 사랑과 신뢰에서 우러나와 복종할 수 있다.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신 분께 어찌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내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자신의 목적과 계획, 삶에 대해 죽는다는 것이다.
p.168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포기에서 시작된다. 목숨을 버리면서 시작된다. 구주가 필요하다는 겸손한 고백에서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우리 죄를 대신 갚음으로써 의의 조건을 채워 줄 분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약하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약하게 시작하셨다. 먼저 약한 인간이 되셨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달리셨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려면 우리도 약하게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언젠가 예수님이 돌아와 우리를 회복된 세상으로 데려가실 때 사랑이 미움을 완전히 이기고 생명이 죽음을 완전히 이길 것이다.
p.168


˝자신을 포기하면 진정한 자신을 얻으리라.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구원하리라. 죽음, 즉 매일 자기 야망과 소원의 죽음, 결국에는 몸 전체의 죽음에 온전히 순응하면 영생을 얻으리라. 그 무엇도 움켜쥐지 말라.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우리 안에서 죽지 않는 것은 부활할 수 없다. 자신을 추구하면 결국에는 미움과 외로움, 절망, 분노, 파멸, 부패만 얻는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추구하면 그분을 찾을 뿐 아니라 나머지도 덤으로 따라온다.˝
- C.S. 루이스 ` 목숨을 얻기 위한 버리기`
p.169


예수님이 계시니 우리는 완벽히 의롭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
p.187


그래서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네 부와 성과에 믿음을 두고 있구나. 하지만 그럴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지금 너는 하나님을 리더로만 여길 뿐 구세주로 삼지는 않고 있구나. 어떻게 아냐고? 돈 없이 산다고 생각해 봐라. 그래도 행복할 수 있겠느냐?
p.200


하나님을 리더요 도덕 선생으로만 삼는다면 모르지만, 하나님을 구세주로 삼고 싶다면 현재의 구세주를 벼러야 한다. 모든 사람이 구세주를 갖고 있다. 당신의 구세주는 돈인가? 하나님인가?
p.201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셔야만 했던 게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돌아가셨던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대신 희생해 주는 사랑`이기 때문이대.
p.214


죄는 모른 체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용서할께˝라고 말한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거나 회복되지 않는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도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기꺼이 죽으심으로 그 빚을 대신 갚아 주셨다.
p.217


˝반역과 상관없는 자발적인 희생자가 반역자 대신 죽었다. 그 순간, 탁자가 갈라지고 죽음 자체가 뒷걸음질하기 시작했다.˝
- C.S. 루이스 [사자와 마녀와 옷장]
p.218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권력을 통해 영향력을 얻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권력을 통해 얻은 영향력으로는 사회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너희는 전혀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퍼부으라. 그러면 곧 그들이 너희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너희가 자신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도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귿르이 너희를 신뢰할 것이다. 그들이 알아서 너희를 우러러보면 너희에게 진정한 영향력이 생긴 것이다. 진정한 영향력은 남들에게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자발적으로 주는 것이다.
p.223


독일의 매우 유력하고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1700년에서 1760년까지 산 니콜라스 폰 진젠도르프 백작은 모라비안 교회의 창립자 중 하나이다. 그는 재산이 거의 바닥이 날 때까지 남들을 도왔다. 왜 그랬을까?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토록 철저히 이타적인 삶을 살았을까? 19세의 청년시절 그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유럽의 수도들을 방문했다. 그러던 어느날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그린 도메니코 페티의 ˝이 사람을 보라˝를 보았다. 고난받는 주님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림 아래를 보니 화가가 쓴 글이 보였다.
˝내 너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려느냐?˝ 지금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겠는가!
p.226


예수님을 바라보라. 예수님은 진정한 대속물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 죄값을 치르셨다. 우리가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길 때 그분은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우리가 소중한 존재라고 깨우쳐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다. 그 모든 것을 은혜를 통해 선물로 받았다.
p.226


예수님은 종교적으로 무지 바쁜 장소로 다시 가는 중이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교회가 이와 같다. 일과 위원회, 오가는 사람들, 거래로 쉴 새 없이 북적거린다. 하지만 그 속에 영성은 전혀 없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진정으로 믿음이 살아 숨쉬는 교회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음의 진정한 변화없이 덩치만 커질 뿐이다. 마음의 진정한 변화와 남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이 교회 일만 바쁘게 할 수가 있다.
p.240


예수님은 단순히 바쁜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대속을 깨달음에서 오는 진정한 인격변화를 원하신다.
p.240


제발, 예수님을 삶의 구석에 두지 말라. 그런 곳에 어울리는 분이 아니다. 그분께 전부를 바치라. 그분을 삶의 중심으로 모셔라. 그래야 그분의 인격이 당신 안으로 스며들 것이다.
p.242


예수님은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고난을 피하지도 않으셨다. 사랑이 그분을 고난으로 이끄셨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그분은 순종하셨다.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p.268


우리는 자신의 욕구를 부인하거나 상황을 바꾸려고 애쓰기보다는 잔을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럴 때 진정한 욕구와 실제 상황이 계속해서 수렴하여 영원한 만찬의 날 영원히 하나로 만날 것을 믿을 수 있다.
p.268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던져질 진노의 도가니를 가까이서 보셨다. 도가니의 아가리를 들여다보셨다. 그 앞에 서서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 이글거리는 열기를 느끼셨다. 예수님은 어디에서 어떤 고난을 받을지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놀라운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셨다. 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는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다..... 이 고난을 실제로 당하기 전에 이 고난이 얼마나 심한지를 깊이 느끼셔야만 했다. 그래서 고뇌하셨다.˝
- 조나단 에드워즈, 설교 `그리스도의 고뇌`
p.268


의로운 진노의 산을 허물 만큼 넓고도 길고도 높고도 깊은 순종. 이런 순종으로 이어지는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찾던 사랑이다. 가족의 사랑, 친구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배우자의 사랑, 애인의 사랑, 그 어떤 사랑도 이와 비교할 수 없다. 다른 모든 사랑은 끝내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이 사랑은 절대 그렇지 않다.
p.269


유다 일행은 예수님이 실제로 혁명을 일으키고 계시지만 그 혁명은 역사상 유례가 없던 새로운 종류의 혁명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세상 나라의 혁명은 일어나 봐야 외향만 바뀔 뿐 여전히 낡은 가치들이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다. 기껐해야 낡은 순서를 살짝 미세조정만 할 뿐이다. 모든 혁명은 결국 사람만 바뀌는 혁명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혁명은 새로운 사람들을 권자에 앉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정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중이셨다. 예수님은 검으로 저지시킬 수 있는 혁명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혁명은 검의 혁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p.278


예수님은 베드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다. 완전히 다른 나라다. 나는 세상을 이렇게 바꿀 것이다.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남을 위한 섬김과 희생이 가득한 곳, 나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길 것이다. 내 힘과 목숨을 내줄 것이다. 지금 내 리스트의 꼭대기에는 약함, 가난, 고난, 버림이 있다. 내 혁명은 검의 혁명이 아니다. 내 혁명이야말로 최초의 진정한 혁명이다.
p.279


우리도 베드로와 같지 않은가? 말로는 정의와 평화와 공평의 편이라고 외치면서 막상 시험이 닥치면 검 자루에 손에 간다. 우리는 검을 위시해서 돈, 권력, 성공, 명예로 이어지는 이 세상 나라를 추구하고 있다. 죽음의 입맞춤에 만족하는 우리는 베드로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p.279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원망 한 점 없이 원수를 사랑하고 남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죄 한 점 없이 온전한 사랑으로 사셨던 예수님. 이런 삶을 살 자신이 있는가? 어림도 없다. 예수님을 본보기로 삼는다면 황새를 따라가는 뱁새 꼴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도저히 그분처럼 살 수 없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는다.
p.282


오로지 이 세상의 가치대로만 사는 사람과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법을 배워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둘 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둘 다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늦은 나이에 실직하면 다시 들어갈 직장도 없다. 이 세상 나라에서는 그야말로 인생이 결딴난 상황이다. 이 세상 나라는 지위와 돈과 권력이 최고라고 가르친다. 이것들을 잃으면 끝장이다. 이 세상 나라의 규칙대로라면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거짓말, 사기, 남의 등에 비수 꽂기, 뭐든 상관없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적을 둔 사람은 다르다. 물론 실직은 누구에게나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하지만 약함, 고난, 가난, 버림이 가까우면 하나님 나라도 가까운 것이다. 진정한 보물, 진정한 정체성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p.282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을 받으셨다. 덕분에 우리는 그분이 받아 마땅한 것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를 영적으로 부하게 하시려고 온 우주의 부를 포기하고 가난하게 되신 분. 우리를 위한 이 대반전을 생각하면 변화될 수밖에 없다.
p.282


스스로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들, 자존심을 세우려는 사람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 돈과 권력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두 가지 극단 중 하나다. 너무 사랑하든가 너무 미워하든가. 첫째. 돈과 권력을 미워하고 그것을 가진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돈과 권력을 멀리하면 고결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하지만 이는 결국 스스로 구원하려는 태도다. 그런가 하면 돈과 지위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도 역시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태도다.
하지만 자신이 순전한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돈과 권력이 있든 없든 연연하지 않는다. 그저 자유로울 뿐이다. 돈이나 권력이 생기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 좋다. 돈이나 권력이 사라져도 하나님이 또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실테니 아무런 걱정이 없다. 이런 사람의 삶 속에는 검은 없고 자유만 있다. 열심히 일은 하지만 일의 지배를 받지는 않는다.....그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
p.283


자신만을 위해 돈을 쓰고 권력에 혈안이 되고 성공과 명예에 집착하면 당신은 멋진 파티를 즐길 수 있을지 몰라도, 성경에 따르면 그런 나라는 전복될 것이다. 그 나라의 시대는 끝났다.
p.284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진리와 모든 생명의 절대적인 근원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도는 사람의 삶은 진리와 생명력이 가득하다. 그의 삶은 빛 가운데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직장, 인간관계, 가족 같은 다른 것을 행복의 근원으로 삼으면 영적 암흑이 찾아온다. 진리와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칠흙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p.297


영적 어둠 속에 있으면 인생이 잘 풀리는 것 같아도 사실상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면 방향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어디로 가야 한는지는 물론이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
p.297


진정한 빛이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다른 것을 그분보다 중요하게 여기면 영적 어둠이 찾아온다. 그로 인한 방향 상실은 반드시 멸망으로 이어진다. 사실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모두 영적 어둠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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