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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사과의 마음 - 테마소설 멜랑콜리 다산책방 테마소설
최민우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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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전부 등단한 지 얼마되지 않은 젊은 작가들이다. 멜랑콜리라는 주제로 시작한 글들은 작가들 고유의 빛깔로 빚어졌다. 어떤 글이 더 좋았다는 말은 부질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매번 깊이 빠져 읽었다. 각기 다른 모양의 사과 일곱 개를 두고 품평회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하나 하나 마음에 오래 품고 싶었다.

 

1. 최민우, 보라색 사과의 마음

동생 은주를 잃은 은영의 이야기다. 가족을 잃은 슬픔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짐작만 할 뿐.  적당한 때가 되면 울 수 있을 것이라는 은영은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낸다. 진심으로 괜찮다고 대답할 뻔하기도 하고 잘 웃고 떠들면서. 사람들은 이를 슬픔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반응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가족을 잃은 사람의 마음을 안다고 착각한다. 가족을 잃은 사람의 모습은 어떨 것이라고 쉽게 상상하고, 자신의 상상을 그 사람의 얼굴과 말에서 읽어내려고 한다. 그렇지만 대개 이러한 것들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사람마다 눈물의 댐이 무너지는 순간은 다를 것이고 무너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 안에 물이 없었던 것 마냥 적당한 때라는 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늘 사과를 보라색으로 보아온 사람을 상상해보고자 했다.('사실 그건 나일 수도 있다. 누가 알겠나?'). 잘 익은 사과는 보라색, 덜 익은 사과는 회색. 그 사람은 그 사실을 무척 늦게 깨달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모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누군가 그 사람에게 사과가 무슨 색이냐고 물으면 빨간색 아니면 녹색이라고 대답해왔으니까. 사과는 빨간색과 녹색이라고 배워왔으니까. 다시 말해 그 사람에게는 보라가 빨강이었고 회색이 초록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누구도 그 사람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최민우, 보라색 사과의 마음p.28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작가는 불가능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결국 우리는 마음속에 각기 다른 사과를 품고 있을 것이다. 그 사과들은 결코 같아질 수 없지만 우리가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노력과 애써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노력 사이 팽팽한 균형 속에서 '이해'라는 찰나의 순간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밤새 켜 놓는다. 그들은 그렇게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화면과 스피커 저편에서는 이 세상이 어떻게든 돌아가는 중이고, 나는 어쨌든 혼자가 아니다. 그때 우리는 고독하지도, 그렇다고 외롭지도 않다. 그냥 앉아 있을 뿐이다.

-최민우, 작가노트 p.41


이 책은 단편집이고, 단편마다 마지막에 작가노트가 있다. 작가가 우울이라는 감정에 대해 느끼는 생각과 이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작가들 각각 자신만의 이야기로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부분이 좋았다. 비하인드스토리가 궁금한 독자는 이 부분을 꼼꼼히 읽어보길 추천한다.

2. 조수경, 알폰시나와 바다

''는 자살 계획을 말하는 모임에 들어간다. 죽고 싶지만 죽는 게 두려워서 죽지 못하는 사람들, 하지만 사는 것 역시 죽는 것 못지않게 두려운 사람들이 매주 월요일에 모여서 어떻게 죽을지 구체적으로 털어놓는다. 그곳에서 동갑인 J를 만난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J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지는 걸 느꼈어. 곧 표정 없는 얼굴 위로 친절한 웃음이 덧씌워졌지. 그때 내가 했던 말들이 그녀를 얼마나 아프게 했을까. '그것' 은 의지의 문제가 아닐 때가 많다는 걸 잘 알면서, 침대에서 빠져나오는 일조차 눈물이 날 만큼 버겁고, 냉장고를 채우고 있는 음식들이 상해가지만 그것들을 치울 힘이 없고, 방에 어둠이 고여 들기 시작해도 불을 켤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힘든 순간이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J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게. '그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긍정과 희망의 말들을 폭력처럼 휘두르는 타인들처럼.

-조수경, 알폰시나와 바다 p.72

 

작가는 '그것'이라고 부를 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부르는 것만으로도 선입견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말이 있다. 어떤 이는 우울증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마음의 감기라고 하는 것. '그것'은 혼자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우린 늘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알아. 때로 심장에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추가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려서 한없이 저 아래로 기울어버린다는 거. 그 상태에서 벗어날 방법이라곤 생을 끝내버리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거. 그런데 말이야, 마음이 고통스러워서 떠나기로 결심했는데 몸까지 고통을 느껴야 하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사는 게 고통이었는데 죽는 순간까지 고통스러운 건 너무 슬픈 일이잖아.

-조수경, 알폰시나와 바다 p.85

 

''를 통해 작가가 건네는 위로의 말들은 독자들의 마음을 묵직하게 누른다. 쉽사리 꺼내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하다 한 마디 조심스럽게 내뱉은 진심 같은 것. '그것'을 앓는 누군가에게 닳길 바라며 몇 번을 고민하고 고쳤을 문장들. 생을 붙잡듯 세게 누군가를 붙잡을 구절들.

3. 임현, 그다음에 잃게 되는 것

무엇을 잘 잊어버리는 운주는 어느 날 마트에 갔다가 딸 정아를 잃어버린다. 그날 이후 운주는 자꾸만 무언가를 찾는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 모른다. 남편 경조는 그런 운주마저 잃어버릴까 두렵다.

 

운주라면 처음부터 실패할 수 있었다. 잔뜩 입에 머금었다가 다시는 뱉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경조를 자꾸 괴롭혔다. 그러나 운주의 불안은 경조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불안, 무기력 상태의 완화. 가볍고 일시적인 우울 증상의 완화. 화를 내거나 흥분하지 않고 운주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렇게 되는 거면 어떡해. 진짜 내가 괜찮아지면 안 되는 거잖아. 우리가 그러면 안 되잖아."

그러고는 빈 통에 다시 알약들을 옮겨 담기 시작했다. 아주 가볍고 조그마한 것조차 운주에게는 지나치게 무거워 보였다.

-임현, 그다음에 잃게 되는 것 p.109

 

운주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깊은 상실감과 죄책감을 느낀다. 자꾸만 잃어버린 게 생각나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물건들을 챙긴다. 우울증 약을 먹지 않는다. 우울을 온전히 겪어내는 것이 죄책감을 더는 일이라 여긴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아선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잃어버리지 않은 것을 끊임없이 부여잡는다. 우울이 삶을 잠식하는 순간은 잠시가 아니다. 아주 조금씩, 오랫동안 부부의 삶이 망가져간다. 셀로판테이프를 붙여 바늘로 찌른 풍선처럼. 운주의 집으로 들어와 차곡차곡 자리를 차지하는 물건들처럼.

4. 김남숙,

''는 여관에서 일을 한다. 예지는 이곳을 찾는 단골손님이다. 항상 피곤한 얼굴을 한 예지는 늘 누군가와 함께 여관을 찾아오고, ''는 아직 살아있어서, 여관이 아직 망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여관을 청소한다. 나는 예지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가 부럽다. 그러던 어느 날 예지가 작별 인사를 건네러 온다.

 

그렇기에 나는 그가 이곳에 더 이상 오지 않아서 그가 죽었다고 종종 생각했다. 그는 내 머릿속에서 종로에서, 반지하에서, 술집에서, 거리에서 죽어 있었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내가 더 이상 그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까, 그게 편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몇살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도 지금 내가 그의 나이쯤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주머니보다 더 많은 살집을 몸에 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내가 정말로 몇 살인지 알지 못했다. 실제로 거울을 보면 어떨 때는 막 전문대 졸업을 앞둔 우울한 아이 같았고 어떨 때는 주름이 가득한 육십 대 같았다. 씹새끼. 불로 지져버리고 싶어. 나는 카운터 앞 작은 거울 속 나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김남숙, p.144

 

유일하게 ''를 사랑해주었던(내 약점인 작은 ''를 사랑해주었던) ''가 떠나고 나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낀다. 그리고 날로 살집이 불어난다. 사랑의 가난은 종종 우악스럽게 복숭아를 먹는 여관 주인의 모습을 띄기도 한다. 즙을 뚝뚝 흘리며 가난의 흔적을 남긴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로자)아줌마에겐 아무도 없는 만큼 자기 살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다. 주변에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 ''의 모습은 로자 아줌마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살기 위해 허기진 마음을 채우는 두 사람에게 살을 빼라는 말은 너무 가혹하다. 그냥 한껏 사랑해주자.

종종 ''는 거울을 보며 쌍욕을 한다. 자신을 불로 지져버리고 싶다고 외친다.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곤 다른 사람들이 사랑을 나눈 공간에 누워 있는 것뿐이다. 그들의 체모와 같은 흔적을 만지며 남아있는 온기를 느낀다. 차 밑에 들어가서야 겨우 온기를 느끼는 길고양이처럼. 고양이 울음소리가 고함처럼 들렸다.

5. 남궁지혜, 당신을 가늠하는 일

미듬은 작은 빵집을 운영하고 있다. 미듬은 수영 강습을 받고 있다. 한 가지 이상한 일은 미듬의 모자에 자꾸만 구멍이 난다는 것이다. 어느 날 미듬의 가게로 해운이 찾아와 책을 읽는다. 난독증이 있는 그는 이 가게의 단골손님이다. 기형도 시집을 느리게 읽는다


너무 날 확정 짓지는 마.

둘은 서로의 손에 힘을 주었다.

가늠하는 정도가 좋은 것 같아.

?

그런 사람이 아니게 되면 어떡해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주는 건 안 돼?

그런 사람이 되는 순간 넌 이렇게 말할 거야.

......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 말이 돼? 우리가 어떻게 서로에게 그러지 않을 사람이 되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니. 어떻게 너와 내가 그렇게 올곧게 같아질 수 있니.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어. 해운아, 너는 되더라도 나는 될 수 없어. 꼭 그렇게 살아야만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도, 언젠가 구식이 되어버릴거고......

-남궁지혜, 당신을 가늠하는 일 p.193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다정하고 싶지만 다정해질 수 없는 슬픈 인간성'에 대한 글이다. '외로워지기 싫어서 더 외로워지는 모순'에 대한 구절이다.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는 내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원래 이해할 수 없는 모순 덩어리니깐.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붙잡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떠날 거라는 걸 알고 붙잡아 둘 수도 있었던, 그 가능성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우리의 삶에 내는 구멍은 미듬의 모자에 난 구멍과 닮았다. 가라앉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헤엄쳐야 한다.

6. 이현석, 눈빛이 없어

희곤은 박사 과정 중 교수의 추천으로 지방에 있는 모 대학의 교편을 잡는다. 부동산 중개업자인 준모를 통해 우재를 소개받고 그의 집에서 살게 된다. 집주인 우재는 옥상에서만 줄곧 생활하는데 우연히 우재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 궁금증이 서서히 풀린다.

문득 그가 물었다. 집에 있다가 어디로 나가고 싶으면 뜻대로 나가지 않느냐고. 희곤이 그렇다고 하자 그는 어째서인지 자신은 이 작은 요새 밖을 나가는 일이 점점 곤란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천천히 옥상을 둘러본 그는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면 읍내에 나가 술을 마시고, 조별 회식에도 빠지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이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다며 삶이라는 것이 원래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계속 이어지는 영화와도 같은 것이라면 지금 자신의 삶은 앞뒤가 잘려나간 필름 낱장에 불과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며 놋쇠 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김이 폴폴 올라오는 정종을 홀짝였다.

-이현석, 눈빛이 없어 p.225

 

어떤 이에게는 우울이 공간의 제약으로 나타난다. 집 밖으로 나가는 일조차 힘에 겹고, 어떤 기계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과거와 마주해야 하는 삶이 있다. 아프지 않아도 될 일을 평생 아파해야 하는 우재의 삶은 늘 그렇게 과거에 머물러 있다. 작가는 석탄 화력발전소에서 있었던 고 김용균 사망 사건을 참고해서 이 소설을 썼다고 밝혔다. 작가가 뉴스 기사에 상상력을 더해 소설로 옮긴 순간 그 이야기는 더욱 오래 남는 것 같다.

 

  설날 연휴는 달콤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보너스 휴가를 받은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이 순간에도 수없이 휘청거릴 누군가의 고통이 문득 스쳐갔다. 그래서 더 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틈틈이 필사도 해봤다. 누군가가 느꼈던 감정을 우린 가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불완전한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한계를 넘어 '그것'에 매우 근접하게 써 내려가는 작가들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느꼈다. 이 순간 무작위로 던져진 인생의 길 위에서 휘청거리고 있을 사람과 그 모습을 힘겹게 지켜보고 있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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