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변신은, 첫구절부터 매우 강렬하고 기이하다.
하지만, 곧 소설 초반부는 그레고르 잠자가 익숙치 않은 벌레 몸체를 가지고 어떻게든 출근하려 하고,
집안 식구와 매니저의 등장에도 출근 걱정하는 것을 담담히 묘사한다.
멀쩡하던 사람이 벌레가 되었다.
처음에야 당황하겠지만 분명 분노와 슬픔같은 감정의 기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카프카는 그냥 그레고르의 벌레가 된 이후의 일상만을 담담히 묘사할 뿐이다.
카프카는 슬프다 외롭다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냥 벌레가 된 이후의 일상을 차분히 묘사할 뿐이다.
변신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은 그레고르가 일종의 소통을 시도하나 실패하는 내용이다.
벌레는 인간의 말을 알아 듣지만, 인간은 벌레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레고르의 소통의 시도들은 모두 무위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카프카는 발성기관이 없어져 말을 하지 못하는 벌레의 생각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족들조차 하지 못한 그레고르의 생각을 알고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독자인 우리야 말로 그레고르의 가족이자 절친이 되어 죽음 앞에 애통해한다.
2. 왜 벌레인가?
책을 읽으면서 첫번재로 궁금해지는 것은 왜 벌레로 변신했냐는 것이었다.
이따금, 우리는 벌레만도 못하다라는 말을 내뱉는다.
인간으로서의 실존이 아닌 본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난 19세기 말 체코에서도 이와 같은 표현 내지는 생각이 존재했는지 궁금했다.
만약 그렇다면, 왜 벌레로 변신했는지는 간단하다.
그레고르 잠자는 가족과 직장에서 이미 돈 벌어오는 벌레로 취급을 받아온 사람이던가,
아니면 벌레가 되었기에 벌레 취급을 당하던가,
벌레가 될까봐 두려운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서던가 일 것이다.
어떤 이유건, 벌레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가치 저하가 담겨 있다.
소설의 결말은 그레고르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해 있던 아빠와 엄마와 여동생이 각기 경제활동을 하며,
그래도 희망이 있다라며 글을 맺는다.
가족들의 희망은 그레고르가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가족들의 희망은 일정한 수입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들의 수입에 의존하며, 빛을 갚아야 함에도 가정부를 고용하고 큰 집에 살던 그들에게,
그레고르는 이미 벌레였다.
꼭 남성 가부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현대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보다도,
안정적인 수입이라는, 최소한의 경제적 기반이라는,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 상태와 슬픈 생존이 가슴 아플 뿐이다.
누구도 자본주의 아니 속물일 수밖에 없는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은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말하는 꿈의 기능처럼,
불안한 우리들에게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를 준다.
3. 벌레인가, 인간인가? 실존철학
사람이 벌레로 변해있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궁금한 것은 변신한 그레고르는 사람인 것인가 벌레인 것인가이다.
당신에게 묻고 싶다. 그레고르는 사람인가? 벌레인가?
사람과 벌레를 구분짓는 것은 존재인가? 본질인가? 형태인가? 행위인가?
사람인가?
본질은 현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형태는 그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게해주는 현상의 한 종류이다.
바퀴벌레 같이 생긴 그레고르의 형태는 그레고르가 벌레임을 직관적으로 알려준다.
사람이라고? 눈 앞에 벌레를 보라.
그렇다면 벌레인가?
하지만 그레고르는 여전히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하며,
자신의 취향을 지키려고 하고,
여동생의 연주를 하찮게 여기는 하숙생들에게 분노를 표한다.
의사결정에 따른 행위는 지극히 착하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청년 가장이다.
즉, 정신과 의식은 그가 사람임을 보여준다.
사람인가? 벌레인가?
존재, 본질, 형태, 행위, 어떠한 기준으로 그레고르의 정체성을 규정할 것인가?
정답은 없다. 어차피 개인의 취사 선택일 것이다.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자기정립의 필연성에 따라 자기의 본질을 규정한다고 이야기 한다.
즉, 존재는 본질에 앞서게 되고 그렇기에 실존인 것이다.
그레고르는 스스로 벌레가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불안한 꿈을 꾼 다음날 일어나 보니 벌레가 되어 있었다.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었음에도 가족의 생계와 안위를 걱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금식을 하고 죽음을 재촉한다.
그레고르는 소설 속 어떠한 등장인물보다도 인간적이다.
4. 카프카,변신과의 만남 & 새로운 시작
처음 이 작품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문학회 활동을 하던 나는 동아리 친구들에게서 이 작품을 들었다.
변신이니, 벌레이니, 실존주의니, 꿀먹은 벙어리마냥 듣던 나는 도서관에 가서 찾았다.
아뿔싸, 스포일러는 이래서 돌맞을 짓이구나;
가장 충격적인 부분들을 이미 이야기듣고 책을 읽으려니, 도무지 집중도 감동도 오지 않았다.
솔직히 그 시절엔 인생의 쓴맛이 뭔지 몰라서 더더욱 그랬던 거 같다.
이번 독서 모임에 참가하게 되며 25년만에 다시 손에 쥔 카프카의 변신.
달라진 것은 하나. 이제 인생의 희노애락을 체험한 점.
나는 이제 돈벌어오는 기계같은 삶이 무엇인지 잘 알고있다.
그레고르와 나의 차이점은 사건의 선후관계.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고,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면,
난 이미 혼자가 된 후, 벌레가 되어간다는 차이?
인간성이 나빠야만 벌레만도 못한건 아닐 것이다.
목적이 없는 삶이야 말로 벌레만도 못한 삶이 아닐까?
별 생각없이 참가한 독서 모임에서 25년만에 다시 접한 카프카의 변신은,
내게는 다시 독서와 글쓰기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삶의 목적과 희망과 평온함을 소망한다.
아래는 독서 모임 숙제로 제출한 변신을 소재로 하여 쓴 시이다.
변신 - 묘후
어느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때
나는 홀아비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불안한 꿈은
언제나 나를 숨가쁘게 해
가쁜 숨을 몰아시며
돌아보면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몸을 뒤척여봐도
온기는 없고
주변을 더듬던 나의 손은
빈 자리만 맴도니
축축히 젖은 배게는
분명 땀이면 좋겠다
언제부터 일까
이혼을 꿈꾸기 시작한 것은
결혼 첫날
나의 사랑은 가벼워 날아가 버리고
남은 것은 흔한 약속 하나
이마저도 못 지키면
나는 벌레다
스스로 다짐하면서
그래도
망상만은 괜찮지 않을까
자유를 꿈꾸던 7년의 세월
그 배덕감은 나를 휘감고
유혹에 약한 마음은
억센 너의 기세에 초라해진다
어디서 잘못됐는지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몸을 누이면
나는 꿈을 헤매고
아침에 불안한 꿈에서 깨어날 때면
벌레로 변해 있으니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젖가슴을 찾던 손길로 넥타이를 메고
지독하게 반복되는 일상으로
더듬이를 분주히 흔들며
홀로 기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