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 산업도시 거제, 빛과 그림자 질문의 책 22
양승훈 지음 / 오월의봄 / 2019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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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 내용과 크게 유기적 연관은 없지만 우선 내 경험을 떠올려보는 것으로 시작을. 내가 중학생 때 진학 관련 체험 행사로 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舊 북공고, 서태지가 다녔던 그 학교)에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전반적으로는 특성화고(실업계) 고등학교에서는 어떤 걸 하는지 알기 위해서 당시 담임 선생님이 기획했던 행사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교실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가 끝에는 고등학교 교장이 학생 유치를 위해 잠시 동영상과 같이 홍보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내용인즉슨 북공고가 이제 쇄신하여 이름도 바꾸었고 주목받는 신진 산업인 해양플랜트 특성화 고등학교로 방향을 정하기로 했다, 운운. 나는 플랜트라 하면 게임 플랜트 vs. 좀비밖에 몰랐었고, 그리고 이것은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해양플랜트가 뭔지에 대한 설명도 뒤따라왔다. 들으면서 음 이런 산업도 있구나. 그때는 신문도 안 보고 그랬으니까 뭐 누군가는 바다에서 원유 시추하는 그런 기계를 만들어야 하겠지 그런데 왜 이름이 플랜트일까 심는다고 해서 플랜트인가… 하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에 이 고등학교는 해양플랜트 전문 마이스터고등학교로 지정된다.

이번에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양승훈, 오월의봄, 2019)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해양플랜트’라는 단어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해양플랜트 산업은 책의 전반적 내용을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2008 세계 금융위기 이후 선박 수주가 감소하고 한국의 조선업 기업들은 위기를 타개할 해결책으로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해양플랜트 수주를 시도했다(168-9쪽). 그런데 이러한 결정은 우선 아주 미시적으로는 현장 노동자들이 그동안 축적해온 지식이 어느 정도 쓸모없어지게 되는 문제를 낳았고(145-6쪽), 그 이외에도 생산관리, 엔지니어-현장의 관계 문제, 그리고 세계 경제의 구조 변동과 긴밀하게 엮여 있는 비정규직·하청 문제와 유럽 업체들과의 기술력 격차(3부 참고)까지 조선소 안과 밖의 맥락을 모두 아우르게 되는 복잡한 문제를 낳게 된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조선업의 위기에 대해서는 자주 듣고는 했지만, 이상하게 플랜트에 대해서는 듣거나 신문에서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읽고 나니, 그저 신문 헤드라인으로만 접했던 조선소 위기에 대해 이런 역사가 있었구나 하고 이제야. 그리고 중학생 때의 잊었던 기억이 소환되며, 사실 친구들 중에 도시과학기술고 간 친구는 없지만, 그때 학생들에게는 생소한 해양플랜트산업의 미래를 홍보했던 그 학교 교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2. 
책의 프롤로그를 읽고 조금은 반가웠다. 저자 양승훈은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는데, 대학원 다니는 중에 우석훈의 『조직의 재발견』을 읽으며 전통적인 사회과학에서는 잘 다루지 않지만 “기업의 이런저런 ‘실무’를 담당하는 사무직”과 “자본주의의 주요 배역 중 하나인 기업”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28쪽).(그리고 또 조주은의 『현대 가족 이야기』를 읽으며 산업 도시 가족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고 했는데, 조주은의 같은 책은 아니지만 『기획된 가족』을 읽으며 중산층 가족들의 생존 전략이랄지 그런 ‘실제적인’, 꼼꼼한 인터뷰와 민속지로 드러날 수 있는 이야기들에 대해 관심이 생겼던 사람으로서도 반가웠다.) 나는 정치학도 문화인류학도 전공하지 않았지만 경제학이나 경영학이 아닌 이상 비슷한가 보다.(경제학도 그런가?) 어쨌든 적어도 학부 수준에서 가르쳐지는 사회학은 기업이나 산업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다. 뭐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고 조직, 산업 얘기를 꼭 사회학이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급되어야 할 부분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인상은 있었다. 조직사회학이나 복지사회학 수업이 갈증을 좀 채워주기는 했는데… 현대 사회의 주요 행위자인 ‘기업’의 행태와 영향을 이해할 수 있는 테마를 다루는 수업은 별로 없었고 그리고 사실 주변에 정치경제학에 관심이 있다는 사람들도 좌파 이론 같은 거나 공부하고 그랬다.(불평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산업의 흥망성쇠를 세계적 맥락과 한국 내부의 특수했던 역사적 맥락과 함께 포괄적으로 다루고 그에 덧붙여 기업 내부의 조직 문화와 숙련의 문제, 산업 도시의 가족들의 생활세계 등의 미시적인 측면까지 조망한 이 책은 참 반가웠고 도움이 많이 됐다. 아쉬운 점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인사이트가 참 많은 책이었다. 트위터에서 약간 화제가 되어 읽었는데 읽기 참 잘한 것 같다. 

#3. 
아쉬운 점. 저자 분도 자주 지적받았겠지 싶지만 사실 책에서 ‘가족’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부분이 많지는 않다. 가족 이야기는 1부 2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진다. 그런데 95쪽에서 107쪽까지의 절 ‘직영과 외주: 외주 도입의 계보’는 조금 뜬금없다고 생각될 듯하게 조선소의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다룬다. 이는 2부 2장 193쪽 이후 ‘벼랑으로 내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부분과 내용상의 연속이 있다. 아쉬운 것은 “‘중공업 가족 프로젝트’”가 “배제와 포섭을 전제로 한 프로젝트”인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중공업 가족들이 어떻게 “하청 노동자들을 배제”했을까 그 구체적 과정에 대한 내용의 부족이다(113쪽). 단순히 젊은 노동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이 거제에 뿌리내린 삶보다는 보다 유동적인 삶을 선호한다는 묘사로만은 부족해 보인다. 숙련 없이 하청의 신분으로 거제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기존의 중산층 가족을 전제로 짜여진 거제의 생활양식과 도시 인프라에 어떻게 적응하거나 불화할까? 결혼은 어떻고? 등등의 의문이 남는다. 물론 이것에 대해 말하려면 분량 상으로는 책 하나가 더 필요할 것이고 거제 뿐만이 아닌 다른 도시의, 또 다른 산업의 청년 노동자들에 대한 비교도 필요할 것이다. 사실 연구자 한 사람의 역량으로 모두 다루기는 부족한, 거대한 주제긴 하다. 거제를 비롯해 울산 등 도시의 청년·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사회적 차원에서 더 많은 관심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 

#4. 
책에서 다뤄지는 중요한 테마 중 하나가 재교육, 성장의 문제. “하지만 이제는 배움과 성장의 양식이 달라졌다. 산업 보국을 위해 뛰었던 작업장 엔지니어들의 방식이 ‘현장 중심’ 기풍과 이른바 ‘쟁이 근성’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지금의 우수한 랩실 엔지니어들은 오픈소스판에서 뛰노는 해커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배워 일을 해내려고 한다”(152쪽; 이러한 맥락에서 해커 문화도 다뤄진다). 엔지니어들이 꾸준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적 뒷받침과 문화의 변화가 필요할까? 조선업의 문제는 단순히 구세대의 학습 문화와 신세대의 학습 문화가 충돌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지리적 문제, 서울-지방의 격차까지 포괄한다(153-5쪽). 뿐만 아니라 IT 산업은 ‘현장’이 필요하지 않은데(160쪽) 제조업 분야는 그렇지 않다는 차이점도 있다. 

이런 설명을 읽어 보고 의문 두 가지.
(1) 조선소 이외 산업—특히 제조업—에서는 엔지니어의 교육을 어떻게 도모할까? “사실 젊은 엔지니어들은 자비를 들여서라도 외부 세미나나 밋업 등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154쪽). 다른 산업에서라고 해봤자 문제가 해결될까, 하는 질문은 아니고, 내가 너무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라 그저 궁금하다. 자기들끼리 깃헙(github) 같은 플랫폼이나 세미나 등의 오프라인 미팅을 통해 지식을 공유하고 네트워크를 쌓는 IT 분야의 문화는 익숙하다. 그런데 그런 문화의 전형이 IT 산업에 국한되어 있으니 그것은 IT 쪽에만 특유한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좀 있게 되는 것 같은데… 다른 제조업 부문에서는 어떨지 궁금하다는 지극히 순수한 궁금증. 
(2) 앞의 것과 연결되는 의문? 지금은 안 하지만 중학생 때 프로그래밍도 배우며 서울 지역에서 이른바 ‘코딩’하고 ‘개발’한다는 동년배 친구들(90년대 후반생)과 짧게나마 교류했던 적이 있었다. 신기했던 것은 다들 페이스북이든 트위터로든 연결이 되어 있었고 스타트업 창업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고등학교 생활이 바빠도 많은 이들은 자기가 짜 놓은 코드도 종종 공유하고(내가 중고등학생 때는 github이 대중화가 안 되어 있어서 알아서 페북 그룹이나 개인 웹사이트에 올려 놓았던 기억) 뭐 그랬다. 그러다가 Seoul Bus 같은 앱 만들면 언론에도 나와서 대박 치고… 뭐 그런 것이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중고등학생 나이대 청소년들이 (물질적 보수 없이) 직접 기술을 배우고 커뮤니티도 이루고 직접 시장에서도 경쟁력이 있을 만한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참 별난 것이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코딩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것도 아니다. 이 원동력은 대체 어디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새삼스레 궁금해진다. 

이런 책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Kevin F. Steinmetz, Hacked: A Radical Approach to Hacker Culture and Crimehttps://www.amazon.com/Hacked-Radical-Approach-Alternative-Criminology/dp/1479869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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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훈 2019-03-31 15: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실 ‘중공업 가족‘ 자체가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고, 실제 피붙이 가족의 이야기는 빈 곳이 좀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거제에서 가족을 부양하면서 살았다면 좀 더 섬세했을 텐데 떠날 때까지 결혼은 하지 않아서 더 그렇기도 했고요.

말씀하신대로 촘촘하게 더 채워야 할, 즉 빈 곳이 많은 책입니다. 추후에 가족의 부분이든, 엔지니어의 부분이든 더 채워야겠지요.

꼼꼼한 서평 감사 드립니다.

- 양승훈 드림 -

karenin 2019-04-01 08:1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원글에는 가족 이야기가 적어 아쉽다고 했지만 작은 아쉬움이었고, 오히려 책이 아니었으면 알 수 없었을 거제 산업 얘기를 잘 전달해 들을 수 있어서 독서 경험이 참 소중했습니다.
경향신문에 쓰시는 칼럼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