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창세기 - 새천년을 과학으로 읽는다, 이인식 과학칼럼
이인식 지음 / 김영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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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인식씨는 독특한 사람이다. 대중적인 과학 책을 쓰기 위해 잘 나가던 직장 임원 생활을 떼려치운 사람이다. 이후 그는 2년 동안 고시원에 처박혀 책 읽는 데만 온 시간을 보냈다. 그런 다음 매년 책을 써내고 있다. <미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사람과 컴퓨터> <하이테크 혁명> <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제 <제2의 창세기>를 새로 써냈다.
직장을 떼려치운 후 그는 지금까지 컴퓨터 잡지와 과학 잡지 기획, 저술 등으로 '근근히' 먹고살아 왔다. 나는 그를 대여섯 차례 만났는데, 그때마다 김밥과 라면으로 점심을 함께 했다. 그런 다음 그는 늘 사무실 옆 횡단보도까지 배웅하고 나서, 전화도 컴퓨터도 없는 집필실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는 과학 저술가이면서 컴퓨터 전문가이다. 그런데 그는 워드 프로세서로 글을 쓸 줄 모른다. 지금도 그는 200자 원고지에 정자체 한글로 또박또박 글을 채워 넣는다. 오자라도 생기면 찢어버리고 다시 쓰는 탓에 그의 원고는 늘 교정부호 하나 없이 깨끗하다. 그는 왜 글을 쓸까. 그런 의문에 대해 그는 이번 책에서 다음과 같은 변명하고 있다. '나는 가장으로서 기초생계비조차 해결되지 않는 과학저술에 오랜 세월 매달린 무책임을 상쇄할 만한 명분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쪼가리 글로 여기저기 이름을 팔면서 다짜고짜 과학대중화를 부르짖는 사람들처럼 나이를 덜 먹지도 않았다. 아마도 나는 운명 절반, 선택 절반으로 과학저술의 길에 들어서게 된 성싶다. 과학저술의 한 전형을 제시하려는 나의 작업이 헛되지 않아 국내 과학저술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징검다리가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그는 <제2의 창세기>에서 과학의 숨겨진 다른 면을 찾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유전의 문제, 유아살해의 기원과 역사, 동성애의 원인, 로봇공학, 초심리학, 외계 생명체 논쟁 등 민감한, 그래서 제도권 과학자들이 함부로 발설하기를 꺼리는 주제에 대해 그는 거리낌없이 펜대를 가져다 댄다. 그는 많은 분자생물학자, 유전과학자들이 자연현상을 분석하고 증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자연을 창조하려는 욕심을 부리는 것에 대해서 주목한다. 과학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인류는 위험해질 수도 있음을 이 박식한 과학 저술가는 여러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경고한다. 과학은 약일 수도 있지만 '독'이 될 수도 있음을, 21세기 과학은 인간에게 '양날의 칼'이 될 수 있음을 그는 이 책 속에서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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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민 말루프 지음, 김미선 옮김 / 아침이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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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몽골을 다녀온 적이 있다. 거기서 몽골의 한 인사로부터 <몽골집사>라는 책에 대해 들었다. 자기도 일본어 번역본으로만 접했다는데, 아랍의 한 역사가가 몽골 제국의 역사에 대해 기술한 책이라고 한다. 한자로 쓰면 '蒙古集史'쯤이 될 것이다. '야만적인 아시아 인종의 침입'이라는 유럽 쪽 시각과 '위대한 칭기스 칸의 제국 건설'이라는 몽골 쪽 시각 중간쯤의, '객관적인' 몽골제국의 역사라는 것이 이 인사의 주장이었다. 그가 굳이 이 책 이야기를 꺼낸 뜻은 짐작할 만했다. 일종의 보상심리이자 콤플렉스 때문이다. 내 주장도 네 주장도 아닌, 객관적 시각은 약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긍심의 원천이 되는 법이다.

이 책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좀 다르다. 저자는 객관화보다는 주관화를, 즉 '내 시각'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런 시각이, 특히 우리에게, 선선하고 충격적이다. 지금껏 아랍을 유럽 문명의 '반(反)'으로, 피동적인 대상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는 지금껏 중세 초기 '프랑크인'들의 아랍 침략에 대해 한번도 심각한 의문을 가져보지 못했다. 십자군 전쟁에서 우선 떠오르는 것들이란, 얼굴까지 가린 투구를 쓰고 긴 창과 방패를 든 기사들의 용맹과 그들과, 귀부인들의 로맨스 정도였다. 그것도 영화의 실루엣처럼 부옇고 아름답게 기억될 뿐이었다. 우리에게 유럽은 이미 '우리'였다. 반면 아랍은 '그들'이었고, '적'이었다. 이 책은 그런 나의 선입관을 여지없이 깨부수었다. 이제 나는 몽골 군대가 고려를 침략하듯, 일본 군대가 조선을 짓밟듯, '프랑크인' 군대들이 아랍의 순진한 처녀들을 능욕하는 모습을, 낯설지만 실감나게 떠올릴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랍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식의 감상을 넘어선 인문학적 지적 충일감을 이 책이 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화형이나 수장과 같은 '신명재판(神明裁判)'으로 죄를 가리는 야만적인 유럽과는 달리, 당시 아랍은 10만 권이 넘는 장서를 소장한 도서관과 잘 정비된 우편 체계와 상하수도와 종합병원이 구비된 문명 세계였다. 이 책은 이런 거대한 문명 세계가, 야만적인 침략군을 맞아 싸우면서, 또 내부의 질곡에 얽혀들면서, 야금야금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다큐멘터리처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로부터 1천여년이 지난 2002년 현재. 그곳에는 지금도 똑같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십자가를 앞세운 유대인들과 초생달을 앞세운 팔레스타인인들이, 천년전 '프랑크인'들과 아랍인들이 그랬듯 아직도 전쟁을 치르고 있다. 무고한 아랍의 처녀와 아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름 없는 희생자일 뿐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인 처녀인 후와이다 아라프 씨(25세)는 자원봉사자로서 그 살육의 현장에 가 있다. 다음은 그가 한국의 시사주간지 <시사저널> 4월25일자에 기고한 글의 한 대목이다.

'아마 여러분들은 믿지 못하겠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끔찍합니다. ...우리는 언제 세계가 이같은 잔혹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개입할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일을 다 끝내고, 그래서 우리가 한 조각 생명과 죽은 시체를 추스르면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인가요. 이미 14일이나 늦었습니다. 거기 누가 듣고 있습니까?'

그 즈음 AP통신은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충돌해서 팔레스타인인 9명이 사망했다'고 아주 드라이하게 보도했다.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도 상원 회의에 출석해 '대량 학살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우리들 가운데 일부분만이 아라프씨의 기고문을 읽는다. 반면 대다수는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AP통신발 뉴스들을 무차별적으로 접하며 산다. 1천년 전 십자군 전쟁의 역사처럼, 현재의 팔레스타인 내전의 실상도 우리는 서양의 시각에서 서양의 잣대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지식과 정보의 편식은 역사나 현실 모두에서 심각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을 정신의 치유서로서 당신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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