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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행 일기 ㅣ 지만지 한국희곡선집
이강백 지음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평점 :
영월행 일기는 3중 구조의 형식을 지니며, 단종, 김시향(여종)과 조당전(남종), 이동기(한명회)와 부천필(신숙주)의 이야기
구조를 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의 이중 플롯으로 1457년
세조의 과거와 현재의 구성의 중첩으로 구성되며, 이 구분의 경계가 모호하여, 과거와 현재의 반복 및 변형으로 유사한 구조를 시사한다. 이는 과거로
들어가 영월로의 행을 하는 제 3장, 5장, 7장 전반부(극중극, 내포구조)와 현재에서 과거를 연기하고 논평하는 제 4장, 6장, 7장 후반후(극, 포괄구조)로 대별 가능하다. 영월행으로의
일기 속에서 단종의 3가지 표정의 변화를 중심으로 세 여정을 구분할 때, 권력의 양상과 그 안에서의 인간의 자유추구 양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3,5,7전반부의 극중극(포괄구조)을 통해 단종과 여종 남종의 서사를 확인하고, 조당전과 단종의 유사성을
조명할 것이다. 그리고 4,6,7후반부의 극을 통해 이동기와
부천필, 주인과 세조의 유사성, 마지막으로 조당전과 김시향을
비출 것이다. 인물의 특성에 이어 돔 구형의 공간적 특성을 권력을 통하여 해석하고, 단종의 웃음, 조당전의 다른 길 제안 및 고서적의 여백과 피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인물, 공간, 특정 소재 및 행위의 조명을 통해 영월행 일기에 드러난 이강백의 권력의 임의성과 자유의 이중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극중극 형식인 영월행일기의 제 3,5,7전반부 장을 살펴보면, 단종의 표정을 기준으로 3장, 5장, 7장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이를 단종, 여종과 남종, 조당전과 단종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우선적으로 단종의 표정을 중심으로 볼 때, 단종은 무표정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슬픔, 그리고 웃음으로의 변화를 나타낸다. 단종의
웃음은 몸에 대한 통제를 몸의 작용에 의해 해체한 결과이며, 이항대립이라는 유의 질서에서 벗어나, 즉 현실과 권력 관계의 너머에서 무용의 자유를 얻은 표정이다.
안에서 밖으로의 소통이 불가능하고 밖에서 안으로의 소통만 일방적으로 허용되는, 하지만 그마저도
단종을 감시하기 위한 일환일 뿐인 고립된 영월에서
단종의 웃는 표정과 동시에 안에서 밖으로의 소통이 시도되면서 그토록 공고해보이던 안과 밖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무너뜨린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권력 하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는 세조는 이에 위기심을 느끼며 사형이라는 선택을 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여종과 남종을 볼 때, 여종으로서의 김시향은 자유라는 것에
눈을 뜨기 전, 굉장히 수동적인 면모를 띈다. 이는 물위의
다리에서 김시향의 소극적인 태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남종으로서의 조당전은 자신의 종신분에
반발심을 느끼며 자유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는 다리에서 남종의 적극적인 태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여행에서는 둘의 태도가 변화하는데, 남종은
권력의 양상을 지레짐작함으로써 자신의 자유 획득이 불가능할 것을 우려한다. 자신의 행위가 자유에서 비롯된, 자유를 향한 행로가 아닌 권력에 의해 이미 짜여진 행로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없을지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그에
비해 여종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인지해서인지 전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다. 마지막
세번째 여행에서 남종은 걱정과 자존심이 그를 압도하지만, 결국 자존심을 버린 텅 빈 마음으로 귀결하며, 영월이 아닌 다른 길을 제안한다. 이는 앞서 단종처럼 권력의 이항대립에서
해탈한 면모를 나타낸다. 그러나 여종은 주인에게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잠시 단종의 웃음을 통해 머뭇거릴 지언정 원래의 소극적인 태도로 회귀한다. 이는 권력의
실상을 직면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의 유형을 나타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종은 그럼에도
자신의 내면을 찾아가려는 도전적이고 능동적인 면모를 보인다면, 여종은 무기력하고 회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남종의 행적은 단종의 표정의 궤적을 따라 걷기에 둘은 유사성을 띈다고 볼 수 있다. 내면적, 육체적 자유를 추구하던 남종은 단종의 무표정과 또다시 하는
영월행으로 인해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조급함을 지니며 무표정과 유사한 소극적 태도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여행에서 울고 있는 단종을 미리 보여주기라도 하듯, 강물에서
비추는 또 다른 슬픈 자신을 발견한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여행에서 웃고 있는 단종을 예언하듯, 남종은 자존심을 버리고 다른길을 제안하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다.
제 4, 6, 7장 후반부는
이동기와 부천필, 주인과 세조의 유사성, 마지막으로 조당전과 김시향을 고찰할 것이다. 이동기와 부천필은 각각 한명회와 신숙주를 대변하는데, 이들의 단종의
표정에 대한 대립되는 시선은 과거와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한다. 이동기는 과거는 과거의 시각으로
봐야 오류가 없다는 입장으로서, 역사단절론을 기반으로 하여, 특정한
시점의 특정한 현상을 중요시하는 한명회의 입장과 유사하다. 과거는 현재와 유사하여 현재를 위해 참조할
수 있다는 입장의 부천필은 특정한 현상이 미칠 파장을 생각하는 신숙주와 같은 궤를 맺는다. 이들의
단종의 표정에 대한 평은 극단으로 나뉜다. 무표정일 때 이동기는 무표정은 연기이며 원한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부천필은 감정이 없으니 괘념치 않아도 된다는 주장으로 극단을 나타낸다.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이동기는 이는 역모술수이며 은덕을 진 자의
눈물은 용납하면 안된다는 주장을 하지만, 부천필은 눈물로 처형 시 제왕의 위엄이 실추된다며 처형을 반대한다. 이를 통해 권력의 힘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특정 시대, 특정 맥락, 특정 인물의 해석으로 달라질 수 있는 임의성이 있음을 드러낸다. 더불어
이들의 대립을 통해, 기본적으로 이 극은 과거와 현재가 순환적 위치에 놓여져 있으면서 서로를 비춰보는
거울의 역할을 해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세조로서의 염문지는 이동기와 부천필의 의견대립을 통해 결정을 하지 못 하다가, 그의 웃음이라는 진정한 자유를 안 순간 즉시 처형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권력 하에서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권력을 지닌 이로서 누군가를 통제하려는 세조는 현재의 김시향의 주인과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선 권력을 지니며, 내용이
아닌 형식만을 지닌 껍데기라는 것에서 유사하다. 세조는 진정한 자유를 지니지 못 한 채 단종을 죽이는
셈이 되며, 주인은 영월행 일기 즉, 고서적의 내용은 알지
못하고, 김시향의 진심을 얻지 못한 채, 형식만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더불어 둘은 누군가를 통제한다는 점에서도 궤를 같이 한다.
세조는 단종을 통제하기 위해 여종과 남종을 이용하여 단종을 고립시키지만, 주인은 도청장치를
사용하여 김시향을 자기자신으로부터 고립시키며 통제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더욱 고려할 점은, 세조는 극에서 나오지만 주인은 극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주인의 형상을 관객에게 맡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대통령이, 누군가에게는 회사의 상급직원이, 누군가에게는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시향과 조당전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연결성, 권력과 자유에 대한 태도를 고찰하고자 한다. 김시향과 조당전은 극중극에서
권력의 임의성과 자유의 이중성을 파악한다. 즉, 권력이 어떻게
결정되고,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력을 미치는지는 자의적 해석에 의해 가해질 수 있다는 것, 진정한 자유란 육체적인 자유 만이 아닌 물리적 관계를 초월한 정신적 자유와 그에 수반되는 육체적 자유를 같이
누릴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를 갖게 된다는 것과
정신적인 온전한 자유를 취할 시에 곧 죽음이 수반된다는 것을 파악한다. 이에 대해 김시향과 조당전은
여종과 남종의 태도와 궤를 같이 한다. 김시향은 “오백년
전을 여행하면서, 현재의 저 자신을 봤죠. 그러나 결국 달라진
건 없군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
라며 현실로 돌아가며 과거와 현재가 달라진 것이 없다 실토하지만, 조당전은 아예 다른 길을
제안하며 권력의 이해관계에서 탈피하며 다른 길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는 마지막 여백을 통해 앞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관객에게 어떠한 경로를 만들어나갈지 제안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인물들이 행위하는 공간은 돔이라는 구형의 형태를 띄는데, 돔은 권리를 함축하는 곳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건물 중 판테온, 성 베드로 성당, 타지 마할, 미국 국회의사당, 도쿄 돔 등의 돔 형식의 건물은 권력의 상징으로서
작용해온 건물들로서, 공간의 형태를 돔으로 구성했다는 것이 권력 하에 작용하는 여러 역학관계를 조명한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돔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세기 조절이 권력을 통한 통제 및 조작의 기능을 시사한다. 돔에 의해 빛이 조절된다는 말은, 빛이 관객이 무대를 지각함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볼 때, 시각적 감지에 의한 인식의 흐름을 자의적으로 조절하는 천장 양식은 권력이
억압하는 방식을 무대화한 표현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비단 빛은 권력 억압 방식으로만 표현되지는 않으며, 작가의 추구를 표현하는 것으로도 쓰이기도
한다. 주인에게 완전히 속박되어 불안해하는 김시향을 만나는 2장은
어두운 조명을 사용하지만, 상상력과 권력의 진면목을 관찰할 수 있고,
행위할 수 있고 난 후의 성찰을 할 수 있었던 7장에서는 밝은 빛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단종의 웃음과 조당전의 영월행과는 다른 길 제안을 통해 내면을 제한하는 권력이 아닌, 내면을 확장하는 자유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인위적인 구분을 하지 않는 불교의 노장사상의 특성을 띈다. 이는 만물의 차이를 비교하거나
우열을 매기지 않고 차이들의 동거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더불어 둘 모두 형식이 아닌 내용을 추구한다. 내용에는
권력과 같은 타인의 영향력 혹은 과시가 따로 필요 없는 것으로 단종의 “내 마음이 진정 왕과 같거늘, 어찌 구차한 왕관을 쓰기 바라고, 구태여 곤룡포를 입기 바라겠느뇨?”와
조당전이 책으로서의 읽기 혹은 소장품으로서의 지니는 것이 아닌 행동을 함으로써 실제 느낀 육화의 방식과 같다. 이는
권력과 이성의 논리를 벗어난 자리, 권력과 이성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자리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유와 동거하는 무의 발견이고, 차이의 긍정이며, 차이를 포유한 채 반복하는 세계에 대한 탐구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권력과 이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권력의 작동이 만연해 있는
사회에서, 그리고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살아왔던 사회인으로서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막연한 해피 엔딩이 아닌 여백의 결과를 남겨둔다. 그리고
김시향은 현실로 회귀하는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조당전의 자유추구의 행위를 통해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둔다. 여백은 채워 나가야 할 숙제이며, 권력에 기인하여 더 쓸 수 없는
한계를 지니지만 그와 동시에 비어 있기에 새로운 대안행위를 제시할 수 있는 지대한 잠재력을 지닌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 여백은 필연 조당전과 김시향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관객에게로
뻗어 나간다. 행동하거나 보아야만 할 수 있는 ‘기억’이 아닌, 행위 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상상력’을 통해 과거로의 여행을 했던 관객들의 상상력이라면 이 행위를
자신에게 대입할 수 있는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백을 자신의 일로서
사유하기 위한 하나의 기제가 ‘피’일 수 있다. 피는 조당전이 고서적의 진위판명을 위해 자를 때 같이 자신의 손의 표피를 자르면서 묻은 것으로, 조당전과 고서적의 동일시를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과거와
현재의 반복 및 동일시, 중첩을 의미하며, 관객의 동일시된
능동적 사유를 고취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
권력의 임의성과 자유의 이중성 및 권력의 역설(권력에서 벗어나야만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유로우면 죽음이 수반됨)을 통해 사회에 사는 관객들은 자신의 현실고찰과 추구점 모색을 재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우리에게 일종의 다른 방향성을 제안한다. 이는 단종의
사건과 조당전의 태도를 통해 암시한다.
조당전: “1457년 10월24일 기쁨의 얼굴은 사약을 받아 삼켰고… 아니, 아닙니다. 사약을 먹지 않으려고 뭄부림치다가… 참혹하게 목이 졸려 죽게 됩니다. … 하지만 우린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당전: “이럴 때일수록 못 본 척하고 태연히 가는 거야. 머리를
들고 가슴을 펼치고서… 의젓하게 가는 거라구.”
즉, 과거와 현재의 중첩, 세 사건의 구조, 빈 여백을 통해 영월행 일기는 권력 구조와 인간의 추구점, 자유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며, 관객의 상상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앞으로의 경로를 같이 논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권력에 대한 비판을 한 그는 긍정적인 시각을 조심스레 관객에게
건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