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말하는, 즉 천부적인 선이라는 개념과 사회에서 사람으로서 실현할 수 있는 선의 개념의 괴리를 통해, 과연 현재에 선은 무엇이며, 정의된 선이 발현될 수 있는 사회는 어떠한가? 더 나아가, 어때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를 질문한다. 이를 통해 브레히트의 이 서사극은 관객들이 무비판적으로 당연시했던 것들에 대해 비판적 시선으로 질문하며, 행동할 수 있는 촉발제 기능을 한다. 이러한 비판적 시선에 대한 제시는 극의 내용과 극의 연출을 구분하여 말할 수 있다.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사천의 선인은 사천 즉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시대에서 선인, 착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연 현재의 체계, 사회에서 착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선에 대한 개념이 현대에 적용가능한가? 그렇다면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효율과 돈이 많은 사람이 선한 것인가? 만약 이가 아니라면, 현대의 변한 사회에서 선은 어때야 하는가? 아니면 선을 위한 사회가 바뀌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함의하는 제목이라 생각한다.

 대체적으로 인물들은 선에 대한 지향의 정도를 기준으로 세 가지 구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선한 마음을 지니거나, 악한 마음이 없는 인물이 부조리한 사회에 살아남기 위해 악한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왕씨나, 셴테에게 돈을 빌려준 노부부, , 목수, 그리고 8인의 가족으로 볼 수 있다. 왕씨는 신을 무시하는 세계에서 신에게 외경심을 품을 수 있는 가치를 중시할 줄 아는 인물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절 당하더라도,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추구할 줄 알며,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물장사를 할 때 속임수를 이용한다. 순은 진정한 사랑을 논할 줄 안다는 것에서, 자신의 꿈을 사랑하여, 열렬히 향할 줄 안다는 것에서 악하다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적 성공(비행사)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없어 허무주의에 빠진 인물로 보인다. 더불어 사회 비판을 공유할 친구 없는 고립된 이로서 허무주의는 증진되었을 것이라 추측가능하다. 이는 성적인 사랑을 이용하는 악한 행동으로 나타난다. 8인의 가족은 선하다는 개념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라는 꽤나 이기적인 정의를 하는 행위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궁핍한 시대에도 자신의 가족들을 챙기려 한다는 점에서 성품 자체를 의심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그들의 성품은 추측할 수 없는 사회의 우악스러운 성격을 나타내는 이들, 경찰관, 건물주가 있다. 이들은 대체로 사회의 악랄한 면모, 성품보다는 효율과 이익을 따지는 성향이 강조되며 각자 사회의 명분 혹은 명목으로 부조리한 위치를 정당화하는 부조리한 사회를 비유한다.

 마지막으로 선을 절대적으로 지향하지만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갈등하는 인물로서의 셴테와 신이 있다. 개인적으로 셴테와 신 모두 사회적 선과 개념상의 천부적 선에 대한 개념에 괴리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셴은 사회에 살아가는 인물로서 사회의 면모를 강조한 반면, 신은 천부적 선에 강조점을 두는 인물로 보인다. 선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이를 이용하려는 마을 사람들을 통해 셴테는 자신의 선을 행할 기본 자산을 잃고 자신마저 잃을 위기에 처한다. 그렇기에 가치를 추구하는 셴테와 효율을 높이려는 슈이타 사이에서 갈등한다. 신 또한 인간과 사회를 구분하여 착한 인간을 찾으려 하지만, 현재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서 갈등한다. 다만 신은 셴테의 갈등을 무시함으로써 현재의 사안을 두리뭉술하게 넘기고, 결국 선에 대한 갈등은 셴테에게로 오롯이 넘어간다.

가장 절대적인 선이라고 상징되는 신의 무책임적 행위는 관객에게 큰 비판적 시사점을 전달한다. 사회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관객으로서는 사회와 괴리된 천부적 개념의 의의를 간과하기 십상이거니와, 신의 선이라는 개념이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지는 않는 것인지, 그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지의 비판적 시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짙다.

개인적으로 왜 주인공이 셴테가 되었는가의 의문이 있다. 이 의문은 셴테와 왕씨의 차이에서 비롯되는데, 셴테와 왕씨의 차이는 무엇인가? 왜 셴테는 착한 이로 인정되었으나 왕씨는 착한 이로 인정되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둘 다 선한 성품임에도 사회적 구조에서 생존하기 위해, 소위 사회적으로 일컬어지는 비도덕적으로 행해지는 일을 했다. 셴테는 매춘을, 왕씨는 속임수를. 다만 셴테는 누군가를 재울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나 왕씨는 없다는 것이 차이였다. 굳이 셴테여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왜 매춘은 사회적 부조리의 행위로 보았으면서 장사의 속임수는 개인의 죄악으로 취급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남아있다. 어쩌면 이러한 부조리 조차도 작가는 비판적 시선을 갖기를 바랐을까.

내용적으로 선을 추구하려 하지만 지속적으로 이용당하며 자신을 잃는 셴테의 이야기를 통한 비판적 거리감과 동시에 무대의 연출도 의도를 분명시한다.

 첫 번째로, 단막극의 형식이다. 극의 플롯과는 분리된 단막극으로 인해 사람들은 극에서 잠시 거리를 가지며, 셴테의 결정 혹은 마을 사람들의 행태에 대해 사유할 시간을 지닌다. 더불어 사천의 선인에서 단막극은 신과 왕씨의 대화로 이루어지는데, 이 둘의 맹목적 선의 추구의 대화로 인해 관객은 선을 사회적, 현실적 차원이 아닌 가치적 측면에서도 비판할 수 있도록 돕는다.

 두 번째로, 중간중간 나오는 음악이다. 이 음악은 구체적인 극의 내용과는 생뚱맞게 보일 수 있지만, 이 극의 조금 더 추상적인, 일반화된 내용을 노래함으로써 구체적 사례의 미시적 측면에서 거시적 측면으로, 다른 차원으로 문제를 고찰할 수 있게 돕는다. 뿐만 아니라 듣기 좋은 선율의 노래를 통해 더욱 섬세한 비판적 감수성을 지닐 수 있다.

 세 번째로, 무대의 유동성이다. 셴테의 담배가게로 나오는 세트는 후에 담배공장으로 바뀐다. 뿐만 아니라 담배가게는 8인 가족을 수용하는 일종의 난민촌 느낌이 나기도 한다. 바뀌는 무대를 통해 관객에게 바뀌는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우리의 행동의 영향력을 시사한다. 이는 사유하지 않으면 부정적으로 변할 세상이, 변화하고 행동한다면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하며 행위의 시도를 촉진하고자 도모한다.

 네 번째로, 비판적인 연기이다. 우선 희곡만을 보았을 때, 인물이 셴테일 때는 사근사근하고, 따스한 어조로, 배려와 가치의 언어를 다채롭게 사용한다. 하지만 슈이타일 때는 딱딱하고, 차가운 어조로, 효율과 실효성, 쓰임새의 언어를 고정적으로 사용한다. 이를 기반으로 연기를 할 때에는 말투와 시선, 움직임의 차이를 두어 한 인간 안에서의 모순을 보이며, 관객은 이 사이에서 인물에게 공감하고 몰두하기보다 이라는 개념에 대해 사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본 영상을 참고하자면 셴테일 때와 슈이타일 때의 의상을 교체시키기도 하고, 셴테일 때는 부채를, 슈이타일 때는 모자와 지팡이를 드는 것을 통해 소품을 이용하여 한 인물 사이에서 차이를 표현하기도 한다.

 다섯 번째로, 조명의 이용이 있을 것이다. 희곡에 따로 제시된 것이 없기에 추측을 하자면, 조명은 관객을 비춰서 관객이 극장에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게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광원 자체 혹은 스태프를 무대에 노출시켜 연극일 뿐이라는 것을 환기하여, 집중을 방해하고, 사고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소한 조명을 이용하거나 생뚱맞는 곳을 비춰 관객이 극에 집중하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천가2009>(이자람, 두산 아트센터 space111)공연과 <사천의 착한 여자>(단국대학교 극예술 연구회 50주년 기념공연, 예술나무 씨어터)의 공연을 보면서, 신에 대한 연출들의 묘사가 눈에 띄었다. <사천가>에서 신은 굉장히 기이하게 표현되었다. 기이한 의상과 현대무용을 결부시켰으며 자아도취감이 흘러보이게 연출하여, 마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흐느적 거리는 괴물처럼 느껴지도록 하였다. 이는 아예 다른 차원의 존재로, 존재만으로 괴리를 느끼게 만들었다. 반면에 <사천의 착한 여자>에서는 신을 게임에 미친 자로 재창조하여 굉장히 무능하고 무관심한 존재로 전락시켰다. 두 연출 모두 현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신으로서 연출하였으나 그 방법이나 위치가 매우 상이하였기에 사회마다 상이하게 신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나라면, 신이 조금 더 셴테에게 감정이입을 할 줄 아는 신으로 재창조하고 싶다. 맹목적 가치에 대한 비판에서 끝나기 보다 신들이 맹목적 가치에 대해 비판하거나 고민을 할 줄 아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희망을 줄 수 있는 결말로 변형을 주고 싶다. 그래도 조금의 희망이라도 있어야 관객이 사고할 의의를 느끼지 않을까?

 나는 브레히트의 연극시조에 적극 공감한다. 개인적으로 사회의 시류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분야는 예술, 특히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2020년 현대의 시대도 모순의 양상이 변했을 뿐, 브레히트가 주장한 모순이 만연한 사회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가치와 신념, 감성의 몰락, 효용과 실용성, 이성의 우위 속에서 자본주의는 인간소외를 지속적으로 양산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정, 사람의 생명력과 같은 지루해 보이지만 자극적인 요소가 시류를 변화시킬 불씨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브레히트의 연극이상에 공감했다.

연극을 준비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할 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막상 관객은 내용의 이면에 관심 없어. 그냥 즐기려고 오는 거야””누가 연출이나 내용보고 오냐, 배우 보고 오지””연극 관객층 자체가 편협한데 여기서 얼마나 큰 변화가 가능할까등의 비판이었다. 그렇기에 브레히트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공부하니, 어쩌면 앞서 받았던 비판을 전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지속적으로 회자되고는 있지만, 그가 말하던 이상은 실현되지 못 했다. 독일은 한국에 비해 예술 향유 문화가 보편적이기도 하고, 브레히트의 모든 연극요소 곳곳에 비판적 사유를 도모할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왜 실패했던 것일까. 문화에서 시작해서 문화에서 그치면 사회는 변화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화에서 시작하여 다른 요소로 뻗어나가면 분명 브레히트의 주장은 현실성이 있다. 앞서의 분석을 통해 이 연극은 내용뿐 아니라 연출적으로도 사고를 할 수 있는 장치를 충분히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천의 선인을 본 관객들의 반응과 사회의 변화가 미미했던 것은 어떠한 이유였을까. 이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일까? 혹은 공연으로는 애초에 브레히트가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이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에 대한 궁금증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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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의 감각 이음 희곡선
고연옥 지음 / 이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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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의 감각은 원형의 가치 및 성스러움이 산업화, 세속화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소외되는가를 다룬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여인숙에서 펜션으로 변화, 역무원의 기계도입 등의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고립되는 아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제목이 처의 감각인가? 우선 처라는 단어의 개념은 남편의 아내이기에, 개념 자체가 소유격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처의 남편은 곰과 인간으로 구분 가능하다. 곰이 성스러움, 인간이 현실을 상징한다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인 처는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살아가야 하는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 처의 감각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만 같고, 작가의 의도는 곰의 지향을 내포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소유격을 함의하는 작품은 고선웅의 각색 및 연출된 작품에서 곰의 아내 라는 이름으로 제목이 바뀌어 상연되었다. 소유격이 더욱 직접적으로 명시된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위 제목은 여성의 수동성을 내포할 수 있다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게 할 수 있다. “이 제목은 결국 누구의 아내, 누구의 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아내나 처나 누구인가가 소유하거나 누구인가에게 소속됨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아내나 처의 이야기가 아니라누구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1] 두 번째는 인간을 환경의 구성원으로서 보는 태도 견지이다. 인간은 외딴 섬이 아님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어떤 세계에서 살아간다. 앞서의 이분법적 상징처럼, 곰을 성스러움, 즉 가치의 세계, 인간을 세속적인 현실의 세계라고 대별한다면, 곰의 아내라는 제목을 통해 인간은 세속적인 현실보다는 성스러운 가치 세계의 존재임을 옹호하는 함의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처의 감각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곰의 아이를 낳은 여자가 사냥꾼에 의해 아이 죽임을 당하고, 인간남편과 아이를 낳고 살지만, 결국 여자는 인간아이를 사냥꾼에 의해 죽여달라 요청하고 곰 남편을 찾는다.

극의 인물들 중 곰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곰은 세 가지의 접근이 가능하다. 앞서 말했 듯, 곰은 성스러움 즉 가치의 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곰이라는 메타포는 신화적 접근을 가능케 함으로써 인간의 근원 혹은 원초적이고, 초월적 실재로서 파악할 수 있다. 신화적 접근으로는 단군신화의 웅녀, 곰나루 설화, 그리고 동북아시아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곰신화를 차용[2]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낳은 어머니는 곰이므로, 우리는 곰의 후손인 셈이다.[3] 그렇기에 극에서의 곰은 인간의 원형 혹은 원형의 개념에 기인한 성스러운 가치를 상징한다. 더불어 공주 지역의곰나루 설화는 어부를 데려와 동굴에서 살던 암곰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자식들을 낳고 살았으나, 어부는 끝내 동굴을 빠져나가 배를 타고 도망가 버리고, 암곰은 어부를 애타게 부르다가 새끼들과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시베리아, 만주에 산재해 있는 곰신화들도 이와 비슷하다. 인간남자와 암곰의 결합, 혹은 인간여자와 수곰의 결합을 얘기하고 있는데, 대체로 인간이 곰을 떠나거나 곰과 살았던 여자의 오빠나 동생이 숲에 찾아가 곰 혹은 곰과 여자 사이의 자식들을 죽이는 결말로 이루어져 있다. 또 곰과 살던 여자는 인간세계로 데려와도 결국 숲으로 떠나 곰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곰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자기 부족의 시조가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신화들은 곰이 사냥 감이면서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던 수렵시대의 신화적 사고와 상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조금씩 변형을 보이고 있는 곰신화들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적 신화소는 곰과 인간이 자식을 낳고 살다가 곰이 인간에게 버림을 받거나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 혹은 곰과 살던 여자가 인간세계를 떠나 곰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4]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내용과 앞서의 곰의 성스러움의 특징을 결부하여, 성스러운 세계와 세속적인 현실의 대비를 보여준다고 해석하고자 한다.

이는 곰의 두 번째 접근 방식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 남편과 대조적으로 기억되는 곰 남편을 통해, 포용성과 상상력을 파악할 수 있다. 같은 은폐된 장소인 동굴과 집에서 곰인 남편은 물과 바다 등의 여러 곳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고 하지만, 그에 비해 인간인 남편은 스트레스와 자신의 푸념만을 토로할 뿐이다. 물론 이에 남편만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편이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든 환경의 원인도 분명 지대할 것이다. 이러한 비교는 자식을 살인하는 경우에서도 대조된다. 아내는 곰의 자식을 살인할 때와 인간의 자식을 살인할 때 다른 태도, 다른 환경을 겪게 되는데, 이는 각 자식의 상징성을 시사한다. 곰의 자식은 자연 및 포용성, 신뢰를 함의하며, 인간의 자식은 현실 및 위계성, 배신의 가능성을 함의한다고 할 때, 곰의 자식이 살인때는 고통스러워하던 아내의 모습이, 인간의 자식에 대해서는 오히려 사냥꾼을 부르는태도를 취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로, 곰은 비가시적이지만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곰은 무대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내의 기억에 의해 지속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는 어쩌면 곰이 가시적이지 않은 가치를 의미한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비가시적이기에 주목할 수 있는 점은 과연 곰이 실제로 아내의 옆에 있는가?하는 질문이다. 아내는 지속적으로 곰이 옆에 있음을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곰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실제로 옆에 곰이 있는가 보다 아내가 지속적으로 곰을 옆에 있다고 인지하는 점에 주목해야할 필요성을 제기할 수 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스메르자코프라는 인물이 아버지를 죽인 인물을 찾는 중에, “실제로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누가 더 원했을까 그게 더 중요해와 같은 궤라고 생각한다. 실제 있는가 없는가보다 그가 옆에 있다고 믿고,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그녀의 인식과 믿음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가시적이지 않지만 분명 인간의 원형, 성스러움이 인간의 세속된 세상에도 잔재해있음을 함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곰의 성스러운 가치적 특성은 현실적 존재인 아내와 연결되는데, 이는 당신은 내 아내였지요.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다가 남김없이 빼앗기고 쫓겨나야 했던,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5]의 대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곰은 자신과는 다른 인간을 사랑하여, 남김없이 빼앗기고 쫓겨나야 했고, 아내는 그녀의 세상과 다른 세상을 사는 남편을 사랑하여, 남김없이 빼앗기고 쫓겨나야 했다. 둘 모두 자신보다 세속적인 것을 사랑하였고, 자신의 영적인 가치적 측면을 빼앗겼다고 볼 수 있다. 가치가 세속적인 것보다 더욱 값지다는 가정 하에, 희생을 하여 보상이라도 받아야 마땅할 것 같은 곰과 아내는 역설적으로 각자의 선택에 대가를 치뤄야 했고, 대가를 치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내는 인간 남편이 아닌 곰의 남편을 선택했다는 것에서 세속이 아닌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곰의 특징을 통해 현 시대를 보았을 때, 현 시대에 곰의 아내는 과연 어떤 모습이며, 존재하는가? 현대의 유물론을 기반으로 한, 합리성과 이성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과연 보이지 않는 성스러움은 존재할 수 있는가? 빠르게 변하는 세태 속에서 인간의 원형을 추구하는 것이 존중될 수 있는가? “곰이 사라지니, 무서워서 더는 못 살겠더군요. 그 튼튼하던 집도 허물어지기 시작하는데, 생각해보면 그게 다 사람을 쫓아내는 거였어요. 거기서 평생을 살았던 나 같은 사람도 싫다고 내보낼 정도니, 이제 거기로는 아무도 못 갈 겁니다.”[6] 현 시대를 잘 묘사한 문구라고 생각한다. 성스러운 가치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서 인간을 지지할 수 있는 튼튼한 집이 완고히 인간을 지탱할 수 있을 가능성은 굉장히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현재에 대두되는, 성스러움을 상징하던 종교의 타락이 시대에서 가치의 소실을 예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가시적이지만 영향력을 끼치는 대상은 종종 권력을 가리키곤 하는데, 이 희곡은 성스러움을 나타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권력을 통해 그 시대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시대가 더 좋은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입장에서, 성스러움을 지적하는 점은 색다른 발걸음이라고 생각하고, 흥미롭다. 마치 사회적 소수자 안건을 논의할 때, 피해자의 피해가 아닌 가해자의 부조리한 권력을 논하는 것처럼. 더 나아가, 현 세대에서 곰이라는 성스러움은 어떻게 소외되는지, 그리고 왜 인간은 인간을 존엄하게 하는 존재(성스러움에 의해)인 곰을 왜 살해하려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 및 비판의식을 제고시키는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성스러움에 비교할 때, 인간의 추구점과 비판점을 여실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유연주. 처의 감각. 누구의 아내이거나 처이거나, 공연과 이론, 2018, p. 254.

[2] 김성희. 신화적 상상력과 연극성의 놀이 〈처의 감각〉, 연극평론 89, no.0, 2018, p. 48.

[3] 위의 논문, p.48

[4] 위의 논문, pp.47-48.

[5] 고연옥, 처의 감각, p.63

[6] 위의 저서,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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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행 일기 지만지 한국희곡선집
이강백 지음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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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행 일기는 3중 구조의 형식을 지니며, 단종, 김시향(여종)과 조당전(남종), 이동기(한명회)와 부천필(신숙주)의 이야기 구조를 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의 이중 플롯으로 1457년 세조의 과거와 현재의 구성의 중첩으로 구성되며, 이 구분의 경계가 모호하여, 과거와 현재의 반복 및 변형으로 유사한 구조를 시사한다. 이는 과거로 들어가 영월로의 행을 하는 제 3, 5, 7장 전반부(극중극, 내포구조)와 현재에서 과거를 연기하고 논평하는 제 4, 6, 7장 후반후(, 포괄구조)로 대별 가능하다. 영월행으로의 일기 속에서 단종의 3가지 표정의 변화를 중심으로 세 여정을 구분할 때, 권력의 양상과 그 안에서의 인간의 자유추구 양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3,5,7전반부의 극중극(포괄구조)을 통해 단종과 여종 남종의 서사를 확인하고, 조당전과 단종의 유사성을 조명할 것이다. 그리고 4,6,7후반부의 극을 통해 이동기와 부천필, 주인과 세조의 유사성, 마지막으로 조당전과 김시향을 비출 것이다. 인물의 특성에 이어 돔 구형의 공간적 특성을 권력을 통하여 해석하고, 단종의 웃음, 조당전의 다른 길 제안 및 고서적의 여백과 피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인물, 공간, 특정 소재 및 행위의 조명을 통해 영월행 일기에 드러난 이강백의 권력의 임의성과 자유의 이중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극중극 형식인 영월행일기의 제 3,5,7전반부 장을 살펴보면, 단종의 표정을 기준으로 3, 5, 7장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이를 단종, 여종과 남종, 조당전과 단종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우선적으로 단종의 표정을 중심으로 볼 때, 단종은 무표정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슬픔, 그리고 웃음으로의 변화를 나타낸다. 단종의 웃음은 몸에 대한 통제를 몸의 작용에 의해 해체한 결과이며, 이항대립이라는 유의 질서에서 벗어나, 즉 현실과 권력 관계의 너머에서 무용의 자유를 얻은 표정이다.[1] 안에서 밖으로의 소통이 불가능하고 밖에서 안으로의 소통만 일방적으로 허용되는, 하지만 그마저도 단종을 감시하기 위한 일환일 뿐인 고립된 영월[2]에서 단종의 웃는 표정과 동시에 안에서 밖으로의 소통이 시도되면서 그토록 공고해보이던 안과 밖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무너뜨린다.[3]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권력 하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는 세조는 이에 위기심을 느끼며 사형이라는 선택을 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여종과 남종을 볼 때, 여종으로서의 김시향은 자유라는 것에 눈을 뜨기 전, 굉장히 수동적인 면모를 띈다. 이는 물위의 다리에서 김시향의 소극적인 태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남종으로서의 조당전은 자신의 종신분에 반발심을 느끼며 자유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는 다리에서 남종의 적극적인 태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여행에서는 둘의 태도가 변화하는데, 남종은 권력의 양상을 지레짐작함으로써 자신의 자유 획득이 불가능할 것을 우려한다. 자신의 행위가 자유에서 비롯된, 자유를 향한 행로가 아닌 권력에 의해 이미 짜여진 행로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없을지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그에 비해 여종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인지해서인지 전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다. 마지막 세번째 여행에서 남종은 걱정과 자존심이 그를 압도하지만, 결국 자존심을 버린 텅 빈 마음으로 귀결하며, 영월이 아닌 다른 길을 제안한다. 이는 앞서 단종처럼 권력의 이항대립에서 해탈한 면모를 나타낸다. 그러나 여종은 주인에게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잠시 단종의 웃음을 통해 머뭇거릴 지언정 원래의 소극적인 태도로 회귀한다. 이는 권력의 실상을 직면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의 유형을 나타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종은 그럼에도 자신의 내면을 찾아가려는 도전적이고 능동적인 면모를 보인다면, 여종은 무기력하고 회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남종의 행적은 단종의 표정의 궤적을 따라 걷기에 둘은 유사성을 띈다고 볼 수 있다. 내면적, 육체적 자유를 추구하던 남종은 단종의 무표정과 또다시 하는 영월행으로 인해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조급함을 지니며 무표정과 유사한 소극적 태도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여행에서 울고 있는 단종을 미리 보여주기라도 하듯, 강물에서 비추는 또 다른 슬픈 자신을 발견한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여행에서 웃고 있는 단종을 예언하듯, 남종은 자존심을 버리고 다른길을 제안하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다.


 4, 6, 7장 후반부는 이동기와 부천필, 주인과 세조의 유사성, 마지막으로 조당전과 김시향을 고찰할 것이다. 이동기와 부천필은 각각 한명회와 신숙주를 대변하는데, 이들의 단종의 표정에 대한 대립되는 시선은 과거와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한다. 이동기는 과거는 과거의 시각으로 봐야 오류가 없다는 입장으로서, 역사단절론을 기반으로 하여, 특정한 시점의 특정한 현상을 중요시하는 한명회의 입장과 유사하다. 과거는 현재와 유사하여 현재를 위해 참조할 수 있다는 입장의 부천필은 특정한 현상이 미칠 파장을 생각하는 신숙주와 같은 궤를 맺는다.[4] 이들의 단종의 표정에 대한 평은 극단으로 나뉜다. 무표정일 때 이동기는 무표정은 연기이며 원한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부천필은 감정이 없으니 괘념치 않아도 된다는 주장으로 극단을 나타낸다.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이동기는 이는 역모술수이며 은덕을 진 자의 눈물은 용납하면 안된다는 주장을 하지만, 부천필은 눈물로 처형 시 제왕의 위엄이 실추된다며 처형을 반대한다. 이를 통해 권력의 힘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특정 시대, 특정 맥락, 특정 인물의 해석으로 달라질 수 있는 임의성이 있음을 드러낸다. 더불어 이들의 대립을 통해, 기본적으로 이 극은 과거와 현재가 순환적 위치에 놓여져 있으면서 서로를 비춰보는 거울의 역할을 해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5]


 세조로서의 염문지는 이동기와 부천필의 의견대립을 통해 결정을 하지 못 하다가, 그의 웃음이라는 진정한 자유를 안 순간 즉시 처형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권력 하에서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권력을 지닌 이로서 누군가를 통제하려는 세조는 현재의 김시향의 주인과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선 권력을 지니며, 내용이 아닌 형식만을 지닌 껍데기라는 것에서 유사하다. 세조는 진정한 자유를 지니지 못 한 채 단종을 죽이는 셈이 되며, 주인은 영월행 일기 즉, 고서적의 내용은 알지 못하고, 김시향의 진심을 얻지 못한 채, 형식만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더불어 둘은 누군가를 통제한다는 점에서도 궤를 같이 한다. 세조는 단종을 통제하기 위해 여종과 남종을 이용하여 단종을 고립시키지만, 주인은 도청장치를 사용하여 김시향을 자기자신으로부터 고립시키며 통제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더욱 고려할 점은, 세조는 극에서 나오지만 주인은 극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주인의 형상을 관객에게 맡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대통령이, 누군가에게는 회사의 상급직원이, 누군가에게는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시향과 조당전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연결성, 권력과 자유에 대한 태도를 고찰하고자 한다. 김시향과 조당전은 극중극에서 권력의 임의성과 자유의 이중성을 파악한다. , 권력이 어떻게 결정되고,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력을 미치는지는 자의적 해석에 의해 가해질 수 있다는 것, 진정한 자유란 육체적인 자유 만이 아닌 물리적 관계를 초월한 정신적 자유와 그에 수반되는 육체적 자유를 같이 누릴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를 갖게 된다는 것[6]과 정신적인 온전한 자유를 취할 시에 곧 죽음이 수반된다는 것을 파악한다. 이에 대해 김시향과 조당전은 여종과 남종의 태도와 궤를 같이 한다. 김시향은 오백년 전을 여행하면서, 현재의 저 자신을 봤죠. 그러나 결국 달라진 건 없군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7] 라며 현실로 돌아가며 과거와 현재가 달라진 것이 없다 실토하지만, 조당전은 아예 다른 길을 제안하며 권력의 이해관계에서 탈피하며 다른 길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는 마지막 여백을 통해 앞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관객에게 어떠한 경로를 만들어나갈지 제안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인물들이 행위하는 공간은 돔이라는 구형의 형태를 띄는데, 돔은 권리를 함축하는 곳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건물 중 판테온, 성 베드로 성당, 타지 마할, 미국 국회의사당, 도쿄 돔 등의 돔 형식의 건물은 권력의 상징으로서 작용해온 건물들로서, 공간의 형태를 돔으로 구성했다는 것이 권력 하에 작용하는 여러 역학관계를 조명한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돔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세기 조절이 권력을 통한 통제 및 조작의 기능을 시사한다. 돔에 의해 빛이 조절된다는 말은, 빛이 관객이 무대를 지각함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볼 때, 시각적 감지에 의한 인식의 흐름을 자의적으로 조절하는 천장 양식은 권력이 억압하는 방식을 무대화한 표현방식이 되기 때문이다.[8] 비단 빛은 권력 억압 방식으로만 표현되지는 않으며, 작가의 추구를 표현하는 것으로도 쓰이기도 한다. 주인에게 완전히 속박되어 불안해하는 김시향을 만나는 2장은 어두운 조명을 사용하지만, 상상력과 권력의 진면목을 관찰할 수 있고, 행위할 수 있고 난 후의 성찰을 할 수 있었던 7장에서는 밝은 빛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단종의 웃음과 조당전의 영월행과는 다른 길 제안을 통해 내면을 제한하는 권력이 아닌, 내면을 확장하는 자유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인위적인 구분을 하지 않는 불교의 노장사상의 특성을 띈다. 이는 만물의 차이를 비교하거나 우열을 매기지 않고 차이들의 동거를 긍정한다는 점[9]에서 알 수 있다. 더불어 둘 모두 형식이 아닌 내용을 추구한다. 내용에는 권력과 같은 타인의 영향력 혹은 과시가 따로 필요 없는 것으로 단종의 내 마음이 진정 왕과 같거늘, 어찌 구차한 왕관을 쓰기 바라고, 구태여 곤룡포를 입기 바라겠느뇨?”[10]와 조당전이 책으로서의 읽기 혹은 소장품으로서의 지니는 것이 아닌 행동을 함으로써 실제 느낀 육화의 방식과 같다. 이는 권력과 이성의 논리를 벗어난 자리, 권력과 이성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자리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유와 동거하는 무의 발견이고, 차이의 긍정이며, 차이를 포유한 채 반복하는 세계에 대한 탐구라 볼 수 있을 것이다.[11]


 하지만 이러한 권력과 이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권력의 작동이 만연해 있는 사회에서, 그리고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살아왔던 사회인으로서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막연한 해피 엔딩이 아닌 여백의 결과를 남겨둔다. 그리고 김시향은 현실로 회귀하는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조당전의 자유추구의 행위를 통해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둔다. 여백은 채워 나가야 할 숙제이며, 권력에 기인하여 더 쓸 수 없는 한계를 지니지만 그와 동시에 비어 있기에 새로운 대안행위를 제시할 수 있는 지대한 잠재력을 지닌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 여백은 필연 조당전과 김시향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관객에게로 뻗어 나간다. 행동하거나 보아야만 할 수 있는 기억이 아닌, 행위 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상상력을 통해 과거로의 여행을 했던 관객들의 상상력이라면 이 행위를 자신에게 대입할 수 있는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백을 자신의 일로서 사유하기 위한 하나의 기제가 일 수 있다. 피는 조당전이 고서적의 진위판명을 위해 자를 때 같이 자신의 손의 표피를 자르면서 묻은 것으로, 조당전과 고서적의 동일시를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과거와 현재의 반복 및 동일시, 중첩을 의미하며, 관객의 동일시된 능동적 사유를 고취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


 권력의 임의성과 자유의 이중성 및 권력의 역설(권력에서 벗어나야만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유로우면 죽음이 수반됨)을 통해 사회에 사는 관객들은 자신의 현실고찰과 추구점 모색을 재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우리에게 일종의 다른 방향성을 제안한다. 이는 단종의 사건과 조당전의 태도를 통해 암시한다.


조당전: “14571024일 기쁨의 얼굴은 사약을 받아 삼켰고아니, 아닙니다. 사약을 먹지 않으려고 뭄부림치다가참혹하게 목이 졸려 죽게 됩니다. … 하지만 우린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12]

조당전: 이럴 때일수록 못 본 척하고 태연히 가는 거야. 머리를 들고 가슴을 펼치고서의젓하게 가는 거라구.”[13]


 , 과거와 현재의 중첩, 세 사건의 구조, 빈 여백을 통해 영월행 일기는 권력 구조와 인간의 추구점, 자유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며, 관객의 상상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앞으로의 경로를 같이 논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권력에 대한 비판을 한 그는 긍정적인 시각을 조심스레 관객에게 건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 백현미. (1999). 이강백 희곡의 반복 구조와 반복의 철학. 한국극예술연구, 9(), pp.255-256

[2] 최승연. "< 영월행 일기 > 의 공간에 나타난 권력의식 연구" 한국연극학 15, no.0 (2000) p. 362

[3] 위의 논문, p.365

[5] 위의 논문, p.353

[6] 위의 논문 , p.361

[7] 이강백, “영월행 일기”p.75

[8] 최승연, p.368

[9] 백현미, 앞의 논문, p.255

[10] 이강백, 앞의 저서, pp.69-70

[11] 백현미, 앞의 논문 p. 276

[12] 이강백, 앞의 저서, p.74

[13] 이강백, 앞의 저서,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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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지 한국희곡선집
유치진 지음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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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비극, 특히 한국의 과도기를 다룬 극이라고 생각한다. 총동원법이 시행되어 혼란이 극에 치달은 1930년대의 일제강점기, 그와 더불어 농촌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이자 혼란기.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민중끼리의 분란 및 파멸을 다루며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한다.

 풍년 속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시작하여, 귀찬이를 사랑하여 혼인을 원하는 말똥이와 만주로 나가 성공을 원하는 개똥이의 이중 플롯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특히나 모두가 개똥이가 소를 팔았을 것이라 예상하여 개똥이를 적대시하다 마름의 행위로 원흉이 밝혀질 때 극의 절정으로 치닫으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급전과 발전의 형태와 유사하다.

 이 극에서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 혹은 가치를 지닌다. 국서는 소(과거의 권위, 공동체를 지탱할 것이라는 믿음을 내포), 말똥이는 사랑, 개똥이는 목표 혹은 도전심, 국서의 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추구한다. 이들의 욕망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사회의 구조적 억압으로 인해 무너지거나 제약된다.

 극에서 부조리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농촌사회의 계급, 이는 논임자, 마름, 국서인 소작농, 하인으로 구분 가능하다. 두 번째는 국제적 계급으로 일본과 한국의 계급이 나누어진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법이 있다.

 제목 답게 소의 의미가 굉장히 다양한 층위를 상상하도록 돕는다. 소는 어찌보면 변하는 가치, 사회의 변화를 보지 못 하고, 과거의 권위에 매달리는 봉건적인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말똥이의 가족이 몰락한 이유로 구조적인 사회의 원인을 찾지 못 하고, 소에서 찾는 것에서 실질적인 구조적 문제를 미신으로 전환시키는 왜곡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과거 공동체의 전통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현대의 누가우리 소의 사촌의 큰아버지뻘 되는이라는 가족의 관계를 외우고, 고려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과거의 가치를 어느 누가 쉽게 폐기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과거의 가치를 쉽게 폐기해버리는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가치로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풍년 속의 극은 공동체의 미덕의 기류가 꽤나 원활하게 흐른다. 주고 받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회이며, 상호 소통하고,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스스로가 정당하다고 믿을 수 있는 사회다. 하지만 이는 토지의 수탈 및 노동의 착취로 금이 간다. 그리고 이 착취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구조적인 원인에 기인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농민들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같이 연대할 줄 알고, ‘의 일에 관심을 가질 줄 알며, 같이 분노할 힘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는 분명 극을 쓴 당시의 사회를 비판했겠지만, 현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양극화가 심화되는 요즈음, 많은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을 줄줄 모르고, 연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다. 이 작품은 어찌보면 현대의 사회가 보기에 배울 점이 많을 이점을 보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사회적 구조적 부조리를 드러내는 이 희곡은 사람이기에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랑, 모험조차도 불가하게 만들며, 가족의 생활도 영위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의 문제를 고발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말똥이의 방화의 행위에서 작가의 긍정적 메시지를 읽고자 한다. 분명 방화의 행위는 사랑 하나에 울고 웃는, 수줍은 청년인 말똥이가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비극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똥이가 허무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행한다는 것에서 작가가 긍정적인 메시지를 시사하지는 않았을까 싶다. 투쟁, 혁명을 시사하는 이미지인 불을 적극 활용한 것은 아닐까

이 세상이 어디 주먹다짐으로 되는 세상인가? 돈이 제일이지[1] … “그러니까 아무리 세상 이치를 캐도 그건 소용없는 일이야. 배만 꺼질 뿐이지. 그저 우리들 농사꾼은 구경만 허구 있어. 세상이야 바로 돌 건 외로 돌 건 그저 구경만 해.”

이처럼 마을 사람들은 세상에 무관심함으로써 스스로를 세상에서 도태시키는 행위를 택한다. 이에 비해 분노하며 적극적인 행위를 취하는 것은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씨앗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조적 폭력 속에서 모두가 피해자로 전락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 중 유자나무집 딸이 부각되어 보인다. 모두가 피해자이지만 모두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의 구성원이다. 자신의 고통을 표하면 누군가가 무슨 일이야하고 안위를 물어보고 같이 걱정해준다. 하지만 유자나무집 딸은 예외이다. 그 누구도 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공동체인 마을에서조차 도태되고 고립된다. 어쩌면 이는 폭력의 이중성을 나타낸다. 마을 사람들은 구조의 폭력을 당하지만, 폭력을 당해 결핍을 띄는 인물에게 유사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개똥이와 유자나무 집 딸 모두 폭력을 당한 피해자이지만 자신의 이상향에로의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 이는 현실가능성이 없는 빈 말로 들려 더욱 구조의 거대함을, 개인의 초라함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말똥이와는 다른 방향의 변화를 도모할 씨앗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대, 사회 구조적 폭력을 다룬 이 작품은 그 사회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는 현대의 모습과도 굉장히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목적은 매우 다르지만 몇 년 전, 한국도 최저임금제가 올라가면서, 근본적 사회의 문제인 사회 소수의 기득권층의 독점 문제는 교묘히 은폐되고, 자영업자들과 알바생들, 즉 소시민들간의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소시민인 마름과 소작농의 싸움과 유사하다. 물론 역사에서 계급이 없는 사회는 없었다지만, 기름을 부었다고 볼 수 있는 일제강점기의 일본의 경제적 수탈 속에서, 지속적으로 검열없이 사회의 톱니바퀴를 굴려온 현재의 한국은 『소』의 사회와 다를 것이, 혹은 더 나아진 것이 있을까.



[1] , 유치진,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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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 - 가부장제, 젠더, 그리고 공감의 역설
김미덕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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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단순히 이분법화하여 복합적 양상을 공백으로 만들어 버리는 관점이 아닌,

복합적 인간 권력의 층을 볼 수 있는 인식틀로 볼 수 있게 하는 저서 

라고 말하고 싶다


위 저서는 본인이 '겪은' 학생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와 이론적인 양상들을 고찰하고, 페미니즘을 다양한 층위의 인식틀로서 보기를 제안한다. 더불어 현재에 만연하게 인식되는 페미니즘에 대해 분석하며, 페미니즘을 성적인 틀로만 보는 것이 아닌, 계급, 인종, 민족, 성 등의 복합적인 축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해결책으로 차별 및 고통에 대한 공감, 동일시의 해결책의 문제를 비판하고, 오히려 탈동일시로서 다름을 수용하는 개인으로 나아가는 방안을 제안한다.


대개 많은 사람들은 페미니즘의 정의를 묻곤 한다. 혹은 지레 스스로 들은 정보를 조합하고, 그것으로 단정지어버린다. 그리고 이를 수용하기를 주저한다.

왜 그럴까?

왜 은밀한 차별을 수면 위로 꺼내고 싶어하지 않는 걸까? 은폐하는 걸까?

이는 비단 성의 측면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개인적인 문제라고만 치부하기도, 사회적인 문제라고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저자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분석하고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는 분명 그 기저에 비판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 책은 인간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양상을 볼 수 있게 한다는 측면에서 시사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을 가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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