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지 한국희곡선집
유치진 지음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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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비극, 특히 한국의 과도기를 다룬 극이라고 생각한다. 총동원법이 시행되어 혼란이 극에 치달은 1930년대의 일제강점기, 그와 더불어 농촌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이자 혼란기.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민중끼리의 분란 및 파멸을 다루며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한다.

 풍년 속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시작하여, 귀찬이를 사랑하여 혼인을 원하는 말똥이와 만주로 나가 성공을 원하는 개똥이의 이중 플롯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특히나 모두가 개똥이가 소를 팔았을 것이라 예상하여 개똥이를 적대시하다 마름의 행위로 원흉이 밝혀질 때 극의 절정으로 치닫으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급전과 발전의 형태와 유사하다.

 이 극에서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 혹은 가치를 지닌다. 국서는 소(과거의 권위, 공동체를 지탱할 것이라는 믿음을 내포), 말똥이는 사랑, 개똥이는 목표 혹은 도전심, 국서의 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추구한다. 이들의 욕망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사회의 구조적 억압으로 인해 무너지거나 제약된다.

 극에서 부조리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농촌사회의 계급, 이는 논임자, 마름, 국서인 소작농, 하인으로 구분 가능하다. 두 번째는 국제적 계급으로 일본과 한국의 계급이 나누어진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법이 있다.

 제목 답게 소의 의미가 굉장히 다양한 층위를 상상하도록 돕는다. 소는 어찌보면 변하는 가치, 사회의 변화를 보지 못 하고, 과거의 권위에 매달리는 봉건적인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말똥이의 가족이 몰락한 이유로 구조적인 사회의 원인을 찾지 못 하고, 소에서 찾는 것에서 실질적인 구조적 문제를 미신으로 전환시키는 왜곡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과거 공동체의 전통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현대의 누가우리 소의 사촌의 큰아버지뻘 되는이라는 가족의 관계를 외우고, 고려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과거의 가치를 어느 누가 쉽게 폐기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과거의 가치를 쉽게 폐기해버리는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가치로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풍년 속의 극은 공동체의 미덕의 기류가 꽤나 원활하게 흐른다. 주고 받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회이며, 상호 소통하고,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스스로가 정당하다고 믿을 수 있는 사회다. 하지만 이는 토지의 수탈 및 노동의 착취로 금이 간다. 그리고 이 착취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구조적인 원인에 기인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농민들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같이 연대할 줄 알고, ‘의 일에 관심을 가질 줄 알며, 같이 분노할 힘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는 분명 극을 쓴 당시의 사회를 비판했겠지만, 현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양극화가 심화되는 요즈음, 많은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을 줄줄 모르고, 연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다. 이 작품은 어찌보면 현대의 사회가 보기에 배울 점이 많을 이점을 보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사회적 구조적 부조리를 드러내는 이 희곡은 사람이기에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랑, 모험조차도 불가하게 만들며, 가족의 생활도 영위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의 문제를 고발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말똥이의 방화의 행위에서 작가의 긍정적 메시지를 읽고자 한다. 분명 방화의 행위는 사랑 하나에 울고 웃는, 수줍은 청년인 말똥이가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비극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똥이가 허무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행한다는 것에서 작가가 긍정적인 메시지를 시사하지는 않았을까 싶다. 투쟁, 혁명을 시사하는 이미지인 불을 적극 활용한 것은 아닐까

이 세상이 어디 주먹다짐으로 되는 세상인가? 돈이 제일이지[1] … “그러니까 아무리 세상 이치를 캐도 그건 소용없는 일이야. 배만 꺼질 뿐이지. 그저 우리들 농사꾼은 구경만 허구 있어. 세상이야 바로 돌 건 외로 돌 건 그저 구경만 해.”

이처럼 마을 사람들은 세상에 무관심함으로써 스스로를 세상에서 도태시키는 행위를 택한다. 이에 비해 분노하며 적극적인 행위를 취하는 것은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씨앗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조적 폭력 속에서 모두가 피해자로 전락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 중 유자나무집 딸이 부각되어 보인다. 모두가 피해자이지만 모두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의 구성원이다. 자신의 고통을 표하면 누군가가 무슨 일이야하고 안위를 물어보고 같이 걱정해준다. 하지만 유자나무집 딸은 예외이다. 그 누구도 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공동체인 마을에서조차 도태되고 고립된다. 어쩌면 이는 폭력의 이중성을 나타낸다. 마을 사람들은 구조의 폭력을 당하지만, 폭력을 당해 결핍을 띄는 인물에게 유사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개똥이와 유자나무 집 딸 모두 폭력을 당한 피해자이지만 자신의 이상향에로의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 이는 현실가능성이 없는 빈 말로 들려 더욱 구조의 거대함을, 개인의 초라함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말똥이와는 다른 방향의 변화를 도모할 씨앗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대, 사회 구조적 폭력을 다룬 이 작품은 그 사회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는 현대의 모습과도 굉장히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목적은 매우 다르지만 몇 년 전, 한국도 최저임금제가 올라가면서, 근본적 사회의 문제인 사회 소수의 기득권층의 독점 문제는 교묘히 은폐되고, 자영업자들과 알바생들, 즉 소시민들간의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소시민인 마름과 소작농의 싸움과 유사하다. 물론 역사에서 계급이 없는 사회는 없었다지만, 기름을 부었다고 볼 수 있는 일제강점기의 일본의 경제적 수탈 속에서, 지속적으로 검열없이 사회의 톱니바퀴를 굴려온 현재의 한국은 『소』의 사회와 다를 것이, 혹은 더 나아진 것이 있을까.



[1] , 유치진,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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