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유친'

  
나는 김원일의 <아들의 아버지>을 읽는 동안 내내 나의 아버지를 머릿속에 그렸다. 이 책속에는 나의 아버지도 있었고, 내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김원일만큼 내 아버지를 그리지 못했다. 솔직히 나는 그분만큼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그릴 용기도 없고, 기억력도, 필력도 부족하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때로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눈물을 글썽였고, 내 아버지의 시대상을 제대로 모른 채 살아온 무지가 부끄러웠으며, 또한 아버지에 대한 불효에 가슴 아팠다.

 

아버지와 아들, 이는 아득한 옛날부터 모든 생명체들이 종족을 보전하는 근본 관계로 이어져 왔다.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어머니와 딸도 마찬가지다. 흔히들 아버지와 아들은 '부자유친'이라 하여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의 으뜸으로 삼고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맺는 인간관계이고,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친한 관계이다. 더구나 이 관계는 천륜인 만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륜 중에서도 그 첫째로 꼽는다. 이 덕목은 윤리 의식이 희박해진 현대 사회에서 더욱 강화해야 할 행동 규범이라 하겠다.

 

김원일 선생에게 '아버지'는 평생 화두요, 창작의 샘물이었다. 그동안 그는 여러 작품에서 아버지의 단면을 그려왔지만, 고희를 넘긴 이제야 정면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 전면을 가감없이 그렸다. 몇 해 전, 나와 대담 때 김원일 선생이 주신 아버지의 약력 유인물이다.


 

김종표(金鍾杓 · 1914~76) 일제강점기 때 마산상업고등학교 졸업. 한국전쟁 전 남조선노동당 경상남도 부위원장.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인민군 서울 점령 때, 성동구역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서울시당 재정경리부 부부장 역임. 연합군 인천 상륙 때 구로지역 방위선 전투지휘 후방부 부책임자로 있다가 인민군이 서울 철수할 때 단신 월북. 이후 의용군으로 유격대를 조직하여 남하. 195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남북회의에 북한 측 대표 일원으로 참가. 연락부 대남사업 책임지도원. 1968년 무렵 해운총국 간부를 지냄. 1976년 강원도 금강산 부근 요양소에서 신병으로 사망.

 

이 간단한 이력에서도 아버지의 삶이 매우 고난의 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난기에는 사회변혁을 꿈꾸거나 행동의 주체자인 당사자보다 그 부인이나 자식이 겪는 고통은 오히려 더 가시밭 길이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코뮤니스트라는 사실만으로도 재판도 없이, 심지어는 골짜기로 데려가 그대로 처형했던 야만의, 증오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세상에 남은 가족들은 숨소리도 죽이며 연명해 왔다.

 

후데이센징

 

진영주재소 순사와 사복형사가 대문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신발을 신은 채 불문곡직 안방과 건넌방에 나누어 들더니 다락·장롱·선반을 뒤졌다. 셋 중 하나는 부엌에서 집안 뒤란을 돌며 군도를 뽑아 여기저기를 쑤셔댔다. 어머니가 순사에게 무슨 일로 이러느냐고 물었다.

 

"당신 서방이 후데이센징[불령선인]인 줄 몰랐던 말인가? 여편네도 주재소로 가야겠어!"

조선인 순사가 윽박질렀다.…어머니를 주재소로 연행하자 취조를 당당한 일본인 형사와 조선인 순사가 합세해 매질부터 시작했다. 심문은 그다음이었다. 아버지가 진영 본가에 언제, 무슨 일로 왔다갔으며, 무슨 말을 하고 갔느냐고 족쳤다. 어머니가 글을 쓸 줄 모른다고 하자 사실대로 대라고 윽박질렀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부산에 살고 있었기에 어머니는 서방이 설을 맞아 차례를 지내러 당일치기로 왔다 간 뒤로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설에 왔을 때도 별다른 말이 없었고, 바깥에서 하는 일을 말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순사는 어머니가 거짓말로 둘러댄다며, 아버지가 바깥에서 하는 일을 자백하라고, 다시 매질을 시작했다.
- <아들의 아버지> 124~125쪽

 

그해(1950년) 여름 여덟 살 소년이었던 내게 인공 치하의 서울생활 석 달도 많은 부분 희미해졌으나 유독 잊히지 않는 몇 가지 기억은 남아 있다. 첫 번째가 지독한 허기였다. 그해 여름 내내 어질머리를 앓을 정도로 허핍하게 지낸 기억은 뒷날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인공 치하 서울시당 재정부 부부장 집이라면 배부르게 먹지야 못해도 삼시 세 끼 먹는 부족함이 없어야 했는데 사정이 그렇지가 않았다. 아버지의 무관심 탓이었다. 정말 아버지는 가족이 안중에 없었을까? 아버지가 당 사업에 너무 바빴다는 것은 한갓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만이 아니라 아버지는 평생 처자식을 버려두었다. 어머니가 당신께 저주를 퍼부은 말로 가족을 돌보지 않은, '사상과 계집질에 미치광이'란 것으로, 청년기에는 나 역시 그 말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 <아들의 아버지> 124~125쪽

 

복잡한 여자 문제가 흠결이었지만 아버지는 단연 진영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김 선상이 보기에는 예의 바른 얌전한 샌님인데 치마만 걸쳤다 하모 부뚜막부텀 먼첨 올라가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를 일이야. 허기사 영웅호걸은 다들 계집을 밝히는 법이긴 해."

아버지를 두고 장터어른들의 평이 그랬다. 이름이 알려진 혁명가나 정치가를 비롯해 지식인치고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드문 법인데, 그렇게 보자면 아버지 역시 그 범주에 들었다. 그들은 평생 한 여자와 살아야 한다는 계율을 무시한 채 다른 여자와 관계 맺음 또한 자기가 하는 일에 필요조건이란 듯 남의 눈치 같은 건 개의치 않았다.
- <아들의 아버지> 178쪽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그런 무심하고 무정한 아버지이지만 아들로서 혈육으로 그리는 원초적인 정이야 어찌 남과 다르겠는가. 9·28 수복 직전 김원일이 아버지와 마지막 헤어지는 장면이다.

 

그날 오후, 고물상 마당에서 첫째 아우에게 구슬치기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지프 한 대가 열린 마당으로 급커브를 돌며 들이닥쳤다. 지프가 일으킨 흙먼지가 가라앉아 차에서 내리는 군복 입은 전사가 바로 아버지였다. 운전병은 위장망을 걸친 젊은 전사였다. 군복을 입은 아버지를 보기가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견장이 달리지 않은 군복에 완장을 찼고, 옆구리에서는 권총이 덜렁댔다. 아버지에 대한 기다림에 지쳐 원망이 하늘에 닿을 듯 하던 어머니의 애타는 마음처럼 나 역시 아버지를 오매불망 기다린 탓인지 당신의 얼굴을 보자 너무 반가워 눈물부터 쏟아졌다. 군인의 모습으로 변한 당당한 아버지였다.

"아, 아부지!"

내가 부르짖으며 아버지를 불렀다. 눈물이 앞을 가려 군모 밑에 드러난 아버지의 수염 거뭇한 깜조록한 모습이 어려 보였다.

"넌, 남자잖아. 아버지를 보고 울다니. 남자는 함부로 눈물을 흘리면 안 돼."

아버지가 내 알머리를 한번 쓱 쓰다듬고는 빙긋이 웃었다.
- <아들의 아버지> 338쪽

 

그렇게 북으로 매정하게 떠난 아버지를 소년 원일은 평생 화두로 심아 기억 속에 희미한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며, 때로는 휴전선 너머 북으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여덟 살 때 아버지와 헤어진 그는 문제적 장편소설 <노을>에서 이 세상의 변혁에 앞장서는 행동가 아버지를 상상했고, 대작 <불의 제전>에서는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이념적 지식인 아버지를 찾았으며, 화제작 <마당 깊은 집>과 아름다은 단편 <미망>에서는 그 아버지가 사라진 후 가족이 겪는 설움을 아프게 회상한다."
- <아들의 아버지> 뒤표지 김병익 (문학평론가)

 

이 시대의 한 영웅

 

나는 김원일 선생을 이런저런 연유로 만나 많이 배우고 있다. 2005년에는 남북작가대회에 동행도 했고, 2007년에는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이라는 포토에세이집을 함께 펴내기도 했다.

 

나는 선생을 만날 때 두 번 당신의 모습을 담았는데 카메라 앵글에 잡힌 그 얼굴과 눈매에서는 어딘가 모를 깊은 우수와 비원, 그리고 오뇌가 보였다. 마치 김동리의 <등신불>처럼. 이즈음 내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어떤 약속>을 연재하면서 한국전쟁 문학의 대목에게 한 수 배우고자 서울로 가 선생을 찾아뵙고 몇 가지 여쭸다. 선생은 내 작품에는 대사가 많고 묘사와 지문이 부족하다는 처방을 내리며, 다시 책으로 펴낼 때는 그 점을 유념하며 퇴고하라고 아주 약방문까지 써주었다. 그때 김원일 선생은 곧 나올 신간 <아들의 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나는 이 작품을 시작할 때 세 가지 형식을 활용하고자 했다. 첫째, 해방과 전쟁 사이의 시대적 공간을 역사적 사실에 의거해 르포식으로 기술하고, 둘째 아버지의 생애와 내 유년을 사실대로 쓰고, 셋째 아버지를 형상화한 부분은 내가 너무 어린 나이이기에 추측과 허구로 썼다."

 

내가 선생에게 앞으로 구상하고 있는 다음 작품을 여쭙자, 낙동강 다부동 전투를 배경으로 바로 내 고향 구미 옆인 약목의 어느 분이 겪은 그때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어떤 약속>과 같은 배경이라 선생이 그려낼 그 이야기가 잔뜩 기대가 된다.

 

김원일, 그는 지난 세월 문둥병 환자보다 더 무섭다는 코뮤니스트의 아들로, 고난의 삶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 서초동 한 밥집에서 점심을 나누고, 차 한 잔을 마신 뒤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6척 장신의 그 뒷모습이 나에게는 이 시대 한 영웅처럼 보였다. 그는 그 어려운 시기에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소나무 그루터기를 부여잡은 뒤 그 절벽에서 산삼을 캐낸 사람이다. 그가 몸소 체험하고 쓴 한국전쟁 문학은 두고두고 그 시대의 귀한 증언록이 될 것이다.

 

나는 지난 주말부터 382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아들의 아버지>에 깊이 빠져 정독했다. 오늘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이 소설은 한 가족사라기보다 바로 우리나라 역사요, 그분의 아버지는 바로 분단된 우리나라임을 느꼈다. 지난날 외세에 무릎을 꿇지 않고, 그들에 맞서 저항한 우리 아버지들 가운데는 그렇게 힘들게 사신 분이 많았다.

 

나는 단풍이 곱게 물든 이 계절에 아버지가 영원히 잠드신 월정사 수목원에 찾아가 깊이 고개를 숙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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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아버지 - 아버지의 시대, 아들의 유년
김원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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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시대의 정직한 작가다. 남들은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드러내며 해방 전후의 굴곡진 현대사를 올곧은 필치로 증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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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 진실 - 독도는 우리 땅인가
강준식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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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한국과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말한다. 김포공항이나 인천공항에서 도쿄 하네다공항이나 나리타공항에 가는 비행기를 타면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만에 닿을 수 있다. 맑은 날 부산 태종대 전망대에서는 일본의 대마도가 가물가물 보일 정도로 일본은 매우 가까운 이웃 나라다.
이렇게 가까운 나라이지만 일본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 자신도 60여 년을 살아오면서 일본의 실체를 잘 몰랐다. '일본' 하면 무조건 왜놈, 쪽발이 등 비어를 써가며 말해야 할 아주 고약한 민족으로,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할 백성들로 교육받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집집마다 일제 가전제품이나 생활용품 한두 점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일제라면 무조건 좋아했던 이중성을 지닌 채 살아온 점이 없지 않았다.
사실 사람은 이웃을 잘 둬야 한다. 위급하거나 아쉬울 때는 먼저 이웃을 찾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이는 비단 개인뿐 아니라 나라와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예로부터 좋은 이웃사촌을 두지 못했다.
역사책을 펼치면 아득한 옛날부터 왜구들의 노략질이 근세까지 거듭 반복되었다. 필자가 최근 10여 년간 일본을 여러 차례 역사기행하면서 공부하고 보고 들은 바는 옛날 일본은 물자 특히 곡물이 귀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없어 심지어 낳은 자식까지도 굶겨 죽여야 하는 식량난을 겪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연안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그런 그들의 부끄러운 취약점 때문이었다.
최근 일본 후쿠오카 박물관과 도쿄 국립박물관을 견학하고 느낀 바지만 일본 문화의 원류는 우리나라로, 일본에게 한국은 문화의 아버지다. 오늘날 일본 문화의 대부분은 한반도를 통해 받아들인 것이다. 그네들의 고대문화는 우리의 것과 거의 같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그런 일본이 근대에 와서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룬 다음 지난날 은혜를 원수로 갚았던 근현대사였다.
도쿄 일본국립박물관
ⓒ 박도
독도의 진실
요 며칠 피서의 한 방법으로 강준식의 신간 <독도의 진실>에 빠졌다. 저자 강준식은 <손자병법>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를 빌어 철저한 고증을 통해 독도의 진실을 낱낱이 파헤쳤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섬 하나를 놓고 싸우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두 나라 사이에 자리한 탓에 100여 년 동안 맘 편할 날 없이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었던 바로 독도. 365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독도는 아직까지도 어느 한쪽으로 명확한 결론이 맺어지지 못한 채 통한의 역사와 전쟁의 아픔을 끌어안고 시름하고 있다.
우리는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이유 같은 건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빼앗길까 불안하다. 저들이 계속해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 저들은 대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아직까지 우리와 국제사회를 상대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독도의 진실>은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그것을 정밀히 추적했다.
저자는 무엇보다 먼저 상대를 잘 알아야 한다고 일본의 시각에서 독도 분쟁이 일어나게 된 경위를 신라, 고려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철저한 자료 조사와 연구를 토대로 현재에 이르는 날까지의 독도의 진실에 대해 낱낱이 파헤쳤다. 어쩌면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화가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화가 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그 분노가 희미한 미소로 바뀌며 완벽하게 감정 이완을 시켜준다. 이유는 간단하다. 왜 독도가 우리 땅인지를 사료를 바탕으로 논리적이고도 쉽고 재미있고 통쾌하게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 소담출판사 <독도의 진실> 소개의 글에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국제 관계는 영원한 적도 동지는 없다"는 말과 함께 우리 국민 모두가 독도에 대한 진실을 알고서 일본인들의 억지 주장에 이론적으로 맞설 정신 무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국력이 강해야 이웃나라에게 침략을 당하거나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금과옥조와 같은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실 한 세기 전에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것은 그들을 탓하기 전에 우리가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조상이 아무리 큰 땅덩어리를 물려줘도 후손이 변변치 못하면 빼앗기게 마련이다. 아니 빼앗기기 전에 제 손으로 이웃 강자에게 갖다 바친다. 개인의 재산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후손이 못나면 조상이 물려준 땅을 남에게 다 팔아버리지 않는가.
사실 한 세기 전에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것은 그들을 탓하기 전에 우리가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조상이 아무리 큰 땅덩어리를 물려줘도 후손이 변변치 못하면 빼앗기게 마련이다. 아니 빼앗기기 전에 제 손으로 이웃 강자에게 갖다 바친다. 개인의 재산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후손이 못나면 조상이 물려준 땅을 남에게 다 팔아버리지 않는가.
독도
모르면 당한다
1905년 일본이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우리나라 독도를 자기네 영토로 편입시킨 것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이승만 라인'으로 독도를 되찾았다. 그 뒤 박정희 정권의 1965년 한일회담과 김영삼 정부의 외환위기, 그 환란을 극복해야하는 김대중 정부를 겪으면서 1999년의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일본에게 독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또 다시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이 한 세기 전과 같은 무지 무능 부패로 나라의 살림을 거덜 내어 독도뿐 아니라 울릉도, 제주도까지 이웃나라에 팔아버리는 사태가 올까 걱정이 갔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여야 가릴 것 없이 조선조 말기나 대한제국 시절 때처럼 무지몽매하고 부패하기 짝이 없다. 강원 산골의 한 서생은 이 책을 읽은 후유증으로 간밤에는 잠을 설쳤다.
내가 겪어본 일본인들은 대단히 정확하고, 치밀하며, 친절하다. 몇 해 전 나는 일본 하카다 항 입국장에서 여권을 압수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일본 관리는 내 여권에서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여권발권자가 내 영문이름 'D'자를 'O'자로 오타한 뒤 칼로 긁고 그 위에 'D'자를 다시 타이핑한 것을 발견하고 나를 여권 위조범으로 몰아 한동안 조사실에 억류당하는 모욕을 당했다. 나는 그 여권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지만 유독 일본 입국 때에 저지당했다. 그들은 세계 다른 나라 사람보다 치밀했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허점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모르면 당한다.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이여! 제발 공부 좀 하고, 국토 좀 제대로 지키고, 나라 살림 좀 튼튼히 하라. 한 세기 전에 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으며 두 눈 뻔히 뜨고도 내 나라 땅이 남의 나라에 편입되는 걸 보고도 입도 벙긋 못했던 그 치욕을 되새겨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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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는 살아있다 - 자유.민주의 탈을 쓴 대한민국 보수의 친일 역정
정운현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한 작품이 이룬 쾌거

전 언론인 정운현씨의 <친일파는 살아있다>라는 신간을 펼치면서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지난 날에는 영화가 개봉되면 먼저 서울 유명극장에서 상영되다가 관객이 시들할 무렵에야 지방 중소도시에서 상영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서울 지방 중소도시가 거의 동시개봉으로 영화 문화만큼은 시공을 초월케 되었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발끈 달구었던 영화 <도가니>를 지난달 하순 개봉 다음 날인 원주의 한 극장에서 보면서 경악과 함께, 내가 사람이라는 게, 내가 평생 교육계에 몸담았던 사실이 못내 부끄러웠다.

곧 영화 <도가니>에 대한 관객들의 분노는 볕 좋은 봄날 산불처럼 번져 실제 도가니 사건이 일어난 인화학교의 폐교가 추진되는가 하면, 도가니 방지법이 국회에 제출되고, 광주경찰서는 도가니 사건을 재수사한다는 보도가 연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도배하다시피 덮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 사회에서 한 작가의 소설이, 한 영화감독의 작품이 큰일을 해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내 마음이 무겁고 우울한 것은 이 '도가니' 열풍도 시간이 흐르면 곧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식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점과 학교 사회의 비리가 비단 그 학교만이 아닐 거라는 점,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건은 자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지겹게 들어온 '친일파' 문제
 

'친일파는 살아있다'. 언제 적부터 들어온 말인가. 해방 후 67년째다. 지겹게 들어온 말이고, 지겹게 들어왔어도 늘 그때뿐으로 유야무야 넘어간, 단골 화두였다. 몇 해 전 친일문제를 연구해온 한 인사(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에게 "왜 아직도 친일파 척결문제냐?"고 시침을 떼고 물어보았다.

나는 오히려 그들(비판세력들)에게 "왜 해방 60돌이 되도록 친일파를 옹호하려고 하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친일파 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문제입니다. 민주화의 바탕이 될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언론, 문화 등 우리 국가와 민족의 모든 개혁이 친일파 청산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화통일 문제까지도 친일파 청산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다시 그들에게 "친일파 청산을 하지 않고도 이 모든 문제를 다 개혁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 친일파 청산은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 현재의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 사회의 도덕이 무너지고 정의감이 사라진 것은, 또 교육계와 검찰,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한 것은, 해방 후 첫 단추인 친일파 문제를 제대로 해결치 않은 데서 그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999년 항일유적답사 길에 베이징에서 한 독립 운동가를 만났다.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는 기타 범죄는 범죄가 아닌 세상이다. 나라 팔아먹은 놈도, 왜놈 앞잡이 하던 놈도, 대를 물려가며 높은 벼슬하며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에 배고파서 도둑질한 사람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 그런 나라는 부패하기 마련이고 도의와 양심은 땅에 떨어져 버린다.

그때 그분(이명준 선생)은 93세의 고령임에도 서릿발 같은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내 무딘 양심을 두들겼다. 평생 해외에 사시면서도 우리 사회의 부도덕을 단 한 마디로 진단하는 말씀이었다.

대책 없는 사람

정운현, 나는 그를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라는 책을 통해서 알았다. 그 책 속에서 나는 내가 다녔던 학교, 내가 몸담았던 학교의 전 교주도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내가 즐겨 읽던 시의 지은이도, 기미독립선언서를 쓴 분도,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도 친일에 발 담갔다는 사실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 글을 줄곧 써온 정운현을 2000년 여름, 내가 한 독립투사에 감명 받아 북만주를 헤매고 돌아온 뒤 한 대학연구실에 만났다. 그날 이후 그와 나는 기자와 작가로, 편집국장과 시민기자로, 심지어 학부모와 교사로, 요즘에는 같은 저술인(사실은 피차 백수로)으로 인연의 끈을 이어왔다.

그가 가정으로나 사회로도 한창 일해야 하는 49세 나이로 황당하게 직장에서 쫓겨난 이후 이따금 서울 가는 길에 만났다. 그의 집 가까운 독립문 공원 나무의자에서 음료수를, 인사동 주점에서 소주잔을 나누며,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곤 하다가 입에 발린 내 위로의 말조차도 오히려 그의 아픔을 가중시킬 것 같아 올봄부터는 연락도 삼가한 채 적조하게 지냈다. 그런 가운데 어제 그의 인생에 족쇄가 된 친일파 문제를 또 다룬 신간 <친일파는 살아있다>는 책을 보내왔다.

연전에 그를 만났을 때 "이제는 전문 저술가로 밥벌이를 해야겠다"는 말을 들고서는 나는 반가운 마음에 다산도 유배시절에 수백 권의 책을 저술했다는 얘기를 들려주며 애틋하고 뜨거운 사랑 얘기나 이런저런 흥미진진한 세상 뒷골목 이야기책을 펴내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정체성을 속일 수 없었던 듯, 또 기득권층에 가시가 되고, 일반 독자들이 별로 눈길을 주지 않을 책을 펴낸데 대해 다소 역정도 났다. 정말 정운현, 그는 대책 없는 가장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 날 바른 역사를 쓰다가 궁형을 당한 현대판 '사마천'이요, 우리 사회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과 같은 의인이다.

우리 사회가 그래도 이나마 유지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안일보다 나라와 겨레의 양심이나 정의감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의인들이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는 곳에 더러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성서에서 말한 "의인 열 사람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다"는 이야기 속의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 역할을 정운현 그가 지금 하고 있다.

친일파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이제 나의 글 마무리로 '친일파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를 말하고자 한다. 나는 오늘 아침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는데, 문득 2010년 10월 안중근 유적답사 길에 하얼빈에 갔을 때 일이 떠올랐다. 그때 하얼빈 동포 사학자 김우종 선생은 이제는 동북열사기념관이 된 옛 하얼빈경찰서 지하에 재현 놓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고문 및 신문 장면을 안내해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은 일제 폐망 후 전범(戰犯)과 한간(漢奸, 일제 협력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재판에 회부하여 처리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고, 그들이 개전의 정으로 참회 눈물을 흘린 자는 모두 감형 등으로 용서하거나 석방했습니다. 가장 오랜 수형자가 25년 감옥에서 징역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황제 푸의까지도 처벌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벌써 그렇게 처리했어야 했다. 해방 후 즉시 우리나라도 반민특위를 제대로 운영하여 민족반역의 무리를 처벌했다면 오늘까지 친일문제가 우리 사회의 갈등요인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이제 곧 해방 70년을 맞이한 오늘 사실 물리적 친일파 척결은 이미 그 시기를 놓쳤다. 대부분 친일 당사자들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물리적 제재보다 더 무서운 바른 역사의 기록을 남겨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친일파 척결이 우리 앞에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 마음 속에 있는 외세 숭상 의식을 뿌리 뽑고, 우리 언저리에 남아 있는 일제 찌꺼기를 없애고, 최소한 우리나라 선출직 지도자만큼은 친일 세력의 고리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뽑아야 그나마 흔들리는 나라의 바탕을 다질 수 있고 잦아진 우리 사회의 정의감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친일파 무리나 후손들도 자신 조상들의 친일 행위를 뼈저리게 반성 자숙케 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 그들 가운데 깊이 참회하는 자에게 조상의 잘못에 면죄부를 주는 일련의 사회운동이 필료한 때다. 이러한 시민 사회운동이 우리 사회에 누적된 도덕 부재, 양심 불감증 등을 근본 치유하는 처방전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명제를 충족시키는 거룩한 사업이리라.

대한민국에서 펜은 칼보다 강한가? 이 명제에 오늘을 사는 잘난 사람 가운데는 콧방귀를 뀌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두고 보시라. 그 언젠가는 역사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사실을 증명할 것이다. 칼의 개혁은 일시적이지만 펜의 개혁은 영구적이라는 사실도.

우리나라 사회 구석구석에 치유 불능의 도덕과 양심 부재의 현상은 백성들 사이 자발적 의식 개혁과 같은 시민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남과 아울러 우리 모두가 코페르니쿠스식 발상으로 생각과 삶의 태도를 확 바꿔야 나라도 살고 우리 모두도 산다. 정운현의 <친일파는 살아있다>에는 우리 사회 도덕 양심 불감증의 원인과 그 처방전을 함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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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뒤에서 온다
문순태 지음 / 오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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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의 작가 문순태

문순태의 산문집 <그리움은 뒤에서 온다>의 첫 장을 펴고는 한 자리에서 단숨에 읽다시피 끝장까지 읽었다. 그는 1941년 생이고 나는 1945년 생으로 거의 동시대를 살아온 탓인지 그가 태어난 광주 무등산 기슭과 내가 태어난 구미 금오산 기슭과는 공간의 차이가 수백 리 있음에도 마치 이웃 마을인 양 내 유소년시절을 되새기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그는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발 1187미터의 무등산만 바라보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유년시절에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산 너머 넓은 세상을 동경했었고, 광주로 나가 살면서부터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고 했다.

그런 그가 교직(광주대)에서 65세 정년을 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지난 추억의 실오라기를 한 올 한 올 풀어내고 있다.

"나는 지금도 밥을 빨리 먹는다. 아내는 내 밥 먹는 속도에 맞추느라 위장병까지 생겼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는 나와 밥 먹는 습관이 같기에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6 . 25를 만나 한 동안 고향을 떠나 걸식하듯 떠돌음 했던 우리 가족은 4년 동안 외가에 빌붙어 산 적이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외가에 소꼴을 베어주고 밥을 얻어먹곤 했다. 그림자처럼 숨을 죽이고 밥상 앞에 앉은 나는 늘 외삼촌 눈치를 보며 후닥닥 밥을 먹어치우고 방에서 뛰쳐나와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늦게 먹으면 "저 자식, 무슨 밥을 저렇게 많이 주었어"하고 외삼촌이 고함을 쳐댔기 때문이다.
- 19쪽'외갓집 가는 길'

정말 그 시절은 극소수를 빼고는 세 끼 밥 먹는 집은 없었고, 하루 한두 끼는 죽이나 수제비, 범벅, 국수요, 밥조차도 쌀이나 보리보다 배추나 무, 콩나물 등 나물을 더 많이 넣은 나물밥이 대부분이었다. 흰 쌀밥을 먹는 날은 명절 날이나 제삿날로 그래서 생겨난 속담이 "조상 덕에 이밥"이었다.

어머니 향기

농사꾼의 아내였던 어머니는 도시로 나와 살면서부터는 텃밭을 갖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오죽 텃밭이 갖고 싶었으면 집안에 있던 화분의 꽃들을 모두 뽑아버리고 고추나 가지 모종을 하셨을까. 오래전의 일이다. 내 소설집 <고향으로 가는 바람>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직후, 아내와 외출을 하고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축하화분의 난이나 꽃을 모두 뽑아 없애고 대신 고추와 가지를 심어놓으셨다.
- 22쪽 '어머니 텃밭'

그 어머니는 꽃은 들이나 산에 가면 지천으로 널려 있다고 하면서 난이나 장미보다 먹을 수 있는 풋고추나 호박, 가지 한 개가 더 소중하다고 그랬던 것이다. 아들집에 살면서 도시의 2층 슬러브 집 마당에 호박을 심어 온통 호박넝쿨로 집을 뒤덮어 놓았다고 했다.

그 어머니가 연로하여 병원에 입원하시던 날, 어머니는 당신이 다시 집에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아들에게 저금통장과 도장을 맡겼다.

"나 죽으면 이 돈으로 관이나 사거라."

어머니를 입원 시키고 돌아온 아들은 그날 밤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원고지를 메웠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청국장 냄새가 난다
세월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쓰디 쓴 삶의 발효
사무치게 보고 싶은 오늘
그 향기 더욱 푸르고
빛이 바랠수록 그립다

이튿날 날이 밝은 뒤 아들은 돌집으로 달려가서 어머니 키 높이만한 오석에 <어머니 향기>라는 시비를 세웠다.

그의 거친 삶이 큰 작가로 만들다

문순태, 그는 6 . 25 한국전쟁을 몸으로 겪은 세대다. 그가 전남 담양군 남면 구산리 남면초등학교 5학년 여름이었다. 늦은 점심으로 삶은 감자를 먹고 있을 때였다. 붉은 별을 붙인 그물모자에 카키색 제복을 입은 사내 두 명이 사격자세로 다발총을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 이후로 소년 문순태는 끔찍한 동족상잔, 피의 제전 6․25 한국전쟁을 두 눈과 두 귀로 보고 들었다.

나는 요즈막 백아산에 자주 간다. 백아산 골짜기마다 6 . 25의 영혼들이 떠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5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6 . 25를 소리로 듣는다. 골짜기를 흔든 총소리며 아무도 없는 물방앗간에서 삐꺼덕거리며 돌아가는 빈 물레방아 소리, 때로는 피를 토하는 듯한 울부짖음과 죽어가면서 마지막 내지른 비명이 잠든 나를 벌떡벌떡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그때마다, 6 . 25 때 아무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얼굴이 뙤록뙤록 살아난다. 이제는 잊힌 그들의 이름을 찾아주고 떠도는 고혼에 안식을 주기 위한 진혼제를 올려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되살려주고 떠도는 고혼을 달래주기 전에는 6 . 25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202쪽 '골짜기마다 떠도는 고혼들'

6 . 25로 인해 내 삶은 유년시절부터 순탄치 못했다.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인 내가 초등학교를 네 곳(담양군 남면 인안분교, 신안군 비금 중앙, 화순군 이서 서유, 광주 학강)이나 옮겨 다녀야만 했었고, 대학도 세 학교(전남대 철학과, 숭실대 기독교철학과, 조선대 국문학과)를 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굴곡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211쪽 '나의 삶 나의 소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였다.

5월 21일, 정오를 알리는 애국가 소리에 맞춰 계엄군의 총부리에서 시민들을 향해 실탄을 발사하는 장면에서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27일 도청에서의 마지막 밤, 새벽의 어둠을 찢는 듯한 가두방송의 애절한 목소리가 극장을 나온 후에까지도 귓전을 맴돌았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광주사람이라면 그날 새벽의 처절했던 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177쪽 '<화려한 휴가>의 교훈'

문순태는 한국 현대사를 현장에서 보고 들으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의 삶이 고난의 길이었기에 그는 큰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산문집 <그리움은 뒤에서 온다>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감탄과 감동, 때로는 공감과 공분을 느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부러움을 느꼈다.

나는 일찍 어머니를 잃었고,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늘그막에도 타향에서 어슬렁거리는 데 견주어, 그는 당신 문학의 밑바탕이 된 어머니를 오래도록 모신 것과 퇴직 후 다시 고향 무등산으로 돌아간 점 때문이다. 지금 그는 고향 생오지 마을에 '생오지 문학의 집'을 꾸며놓고 당신 기억 창고에 가득 찬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 음미하며 원고지에 옮기고 있다.

이 책 3부에서는 이성부, 한승원, 황풍년, 5부에서는 김현승, 김동리, 허백련, 김대중, 박현채, 유공희, 이청준, 진양욱, 신복진 등 질곡의 현대사를 꿋꿋하고 치열하게 산 여러 인물의 일화를 들을 수 있다.

볕 좋은 날 그가 사는 생오지 마을로 찾아가 무등산 산채에 막걸리를 마시며 미처 원고지에 토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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