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 무루의 어른을 위한 그림책 읽기
무루(박서영)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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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책 표지부터 아름다운 책. 그림책을 매개로 작가는 삶의 지향과 태도를 작은 목소리로 전달한다. 그것이 개인적 취향과 한계에 머물지 않고 읽는 이의 공감을 끌어내는 이유는, ‘실은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뒤로 하고 세상 속에서 타인의 마음에 닿는 일을 찾아 먼 곳 까지 가보는 일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삶에서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들은 관성 밖에 존재했다는 추상적인 말이 일상적 작은 실천과 결합되어 구체적으로 세상을 확장시키는 의미로 전달된다.

 

작가는 산책을 하고, 식물을 돌보고, 드로잉을 배우고, 고양이와 생활하며, 채식을 지향한다. 이러한 생활의 기저에는 좋은 습관을 지니고자 하는 노력이 놓여 있다. 이 책에서 습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매우 의미 있게 읽었다. ‘한 사람의 습관이 그 사람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는 문장은 올해의 베스트 문장에 해당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어떤 것을 반복해 나가는 것은 내가 그 일을 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사람으로 살겠다는 마음 때문이라는 말도 큰 울림을 주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살고자 하는 방향으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선택의 결과로 만들어진 정체성(고유성)을 갖는다. 희망적이면서 잔혹하다.

 

아이가 아닌 다 자란 어른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더 선택할 수 있을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미 굳어진 습관들 사이에서 어떤 좋은 습관을 더 가질 수 있을까? 이 비관적인 질문의 답이 이 책의 제목이 될 수 있겠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면 된다. 이상한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관습적인 삶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경험을 사소한 것이라도 자주 해야 한다. 그리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 토대 위에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습관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노동과 생산에 관여되어 있어야 한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는 세상을 확장해 가면서 생기있게 성장해 나가는 한 존재이다. 그래서 굳이 물리적 시간으로 가늠할 필요가 없는 존재이다. 성장이 아이들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는가.

 

작가는 낮은 목소리로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와 태도를 그림책의 메시지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주제에 따라 여러 그림책들이 언급되는데 그림책에 대한 선입견(그림책=어린이책)을 여지없이 날려주었다. 삶과 연결되지 않은 책읽기는 무용하다. 그런 면에서 책과 삶을 결합하고 서로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 준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길잡이 역할도 해주었다.

 

 

 

한 사람의 습관이 그 사람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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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사랑한 세계 명작의 첫 문장
김규회 엮음 / 끌리는책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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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문장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힘이 있다. 첫 문장만으로도 그 책을 읽을 당시의 그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저자는 문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서문에서 말하고 있지만 선택된 작품들을 보면 문외한이라는 표현이 겸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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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unyu 2023-04-11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성장 드라마를 좋아한다. ‘성장‘ 이라는 코드는 미래를 전제로 기능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암울하고 불안한 현재의 상황에 ‘지지 않게‘ 해 준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장드라마는 해피앤딩으로 끝난다. 어려움을 겪는 주인공을 응원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응원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 될 때도 있다. 성장은 청소년의 전유물이 아니고, 인생의 해피엔딩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므로 성장 소설이나 성장 드라마의 주 소비자가 청소년으로 국한될 필요는 없다.

<꼬리와 파도>의 마지막 장면이 좋았다. 세상에 지지 않는 아이들, 안전하고 믿을만한 어른으로 성장한 그들이 함께 있는 장면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그 평화를 얻기까지 그들이 보낸 시간의 기록을 힘들게 읽었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작품에서도 학교는 안전한 공간이 아니며, 어떤 교사는 학생들에게 가해자로 등장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형태의 폭력을 고발하고 바로 잡기 위해 애쓰는 것은 소위 말하는 교육 당국이 아니고 학생들이다. 반은 희망적으로 또 반은 절망하며 읽었다. 학교 폭력과 부조리한 교사들의 행태를 바로 잡는 책임이 학생들에게 있나? 정령 학생들 스스로 나서야 하나? 학교-교육청-그 위에 교육부나 정부로 이어지는 견고한 교육 관료적 시스템은 개별 학생이 겪는 고통을 하나의 ‘사건‘이나 ‘문제‘로 접근하고 해결하려 한다. 아니, ‘문제‘나 ‘사건‘이 커지기 전에는 무마시키려고 한다. 이런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무경과 현정과 서연과 예찬은 ‘꼬리‘로 ‘파도‘를 일으키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현실에서 이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상처입고 주저앉은 아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기 까지는 지난하고 힘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무경의 존재는 주변 인물에게 조용하게 파장을 일으키고 친구들이 저마다의 힘든 상황에 주저앉지 않고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를 준다. 그것은 무경이 어른의 권위에 휘둘리지 않는 존재로 구현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무경과 같은 학생 청소년이 흔치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분히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지 생각하게 된다.

분명한 건, ‘꼬리‘로 ‘파도‘를 일으킨 아이들의 경험은 그 어떤 것으로도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근거이다. 성장 드라마는 이래야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성장 드라마에는 판타지가 가미된다. 냉혹한 현실에서 비전을 찾을 수 없을 때에는 미래라는 환상에 기대서라도 앞으로 나가는 것이 한 방법일 수 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학교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런 경험을 지지하는 최아라 같은 교사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