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안녕, 꼬마병정들아. 우리 또 만나자!
작은 책방 길벗어린이 문학
엘리너 파전 지음, 에드워드 아디존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길벗어린이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책으로 가득 찬 방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주황색 하드커버로 멋들어진 그림과 함께 장식용 세계소년소녀명작 시리즈 50권이 생겼다. 3단짜리 책꽂이를 가득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책상위에 한 줄로 더 나열을 한 주황색 전집 병정들. 그렇다. 50권의 전집은 어린 내게 꼬마병정같은 책이었다. 밤에 자려고 불을 끄고 나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꼬마병정 50명이 나를 지켜주는 것처럼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다시 일어나 불을 켜고 주황색 커버로 치장을 한 책을 한 권씩 만져보는 기쁨. 지금은 제목도 지은이도 주인공 이름도 잊어먹었지만 꼬마병정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빛나는 유년의 초롱불이 여전히 반짝거린다. 거기에는 거지와 신분이 바뀌어서 템즈강변에서 울고 있는 착한 왕자님이 있었고, 미시시피 긴 강을 따라 모험을 하는 용감한 소년이 있었다. 얼굴에 주근깨투성이지만 책을 즐겨 읽는 초록지붕에 사는 빨간 머리 여자 아이도 만났다. 분홍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과 어깨에 금빛 숄을 걸치고 옆구리에 늠름한 칼을 차고 있는 멋진 왕자님과, 사람의 무릎 뼈로 과자를 만들어 먹는 못된 마녀도 함께 만났다. 책꽂이에 일렬로 사열을 하고 있는 50명의 병정들로부터 슬픔과 기쁨과 행복과 고통과 눈물과 사랑의 이야기를 들었다. 밤하늘에 별이 보석처럼 빛났지만 주황색 병정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상상의 꿈은 지붕을 뚫고  성장했다. 그 후 사는 게 핍핍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책방은 먼지로 덮인다. 주황색 병정의 몸에 먼지가 쌓여갔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병정을 돌봐주지 않았고, 병정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 읽은 <작은 책방>속의 스무 편의 이야기를 읽으며 잊었던 주황색 병정들이 생각났다. 지금은 어느 별 나라에서 깔깔 웃고 있을까. 먼지 덮인 그 책들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중학교 입학 후 어느 날인가 책꽂이에는 ‘완전정복’이라는 무시무시한 전쟁의 냄새가 나는 책들이 자리를 잡았던 것 같다. 달콤한 꿈을 꿨던 병정의 주황색 꿈은 전쟁에서 패배했나보다. 입시라는 단어에 더 가까워질수록 책꽂이의 책들이 달고 있는 제목은 더 무섭게 변했다. ‘필승’, ‘승리’, ‘성공’의 깃발을 휘날리는 초강력 군대에게 밀린 주황색 병정들. 저자는 이 책을 먼지가 낳은 책이라고 말한다. “먼지가 낳은 이 책을 읽다보면, 내가 공상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50년 동안이나 빗자루를 들고 쓸어 때던 일곱 하녀도 내 마음 속에서 그 먼지를 몰아 낼 수는 없었다.”


책으로 가득 찬 방에서 먼지에 덮인 책을 읽으며 성장한 저자의 글쓰기는 그녀의 말대로 공상과 사실의 혼합으로 잇는 이야기다. 먼지가 낳은 책은 주황색 병정의 기억을 불러왔다. 기억은 책을 읽는 내내 얌전히 현재의 문(門)을 열고 들어와 앉는다. 그 위로 새 깃털 같은 먼지가 함박눈처럼 소리 없이 내린다. 추억의 눈은 내리고 달은 환하다. 달을 갖고 싶은 공주님은 달빛처럼 반짝이는 은쟁반을 얻으며 행복해하고, 세상의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세상의 신비함을 모두 알고 싶은 호기심 많은 금붕어는 그물에 걸려서 소망을 이룬다. 가난한 나무꾼 소년은 강아지 한 마리로 인하여 공주님과 결혼을 하고, 울타리 너머를 위험한 경계로 지정하는 어른들의 고정관념을 엎고 임금님은 어린시절 추억을 찾으며 사랑도 찾는다. 마음씨가 착한 재봉사 아가씨는 행복하게 살게 되었으니 주황색 병정의 안위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기쁨과 행복으로 상상의 세계를 뜀박질하는 병정들. 빨간 손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궁전 밖으로 뛰어나가 강으로, 언덕으로 자유롭게 살게 된 일곱 번째 공주는 금빛 구두를 신고 있다. 금빛 햇살이 눈부시고 금빛 고양이가 나오고 금빛 머리 공주님이 까르르 웃는다. 금빛처럼 빛나는 건초더미를 발견하는 기쁨은 이 책의 절정이다. 왜 금빛이냐고? “묻기 시작하면 그곳은 더 이상 천국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에 금빛 발굽, 꼬리에 장미꽃을 달고 있는 눈처럼 새하얀 코네마라 당나귀가 거짓말이라고 우기지 말자. 천국이란 허구일 뿐이며, 공상의 비대한 뚱뚱한 돼지 형상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른이다. 어른의 세계에서는 단 1페니로 기차역 주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노는 방법을 모른다. 1페니의 즐거움이 주는 초콜릿의 달콤함에 충치 걱정을 하는 어른의 세계. 다시 내 주황색 병정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과 더불어 웃고 울던 작은 방. 일렬로 씩씩하게 때로는 다정하게 친구가 되어 들려주던 상상의 이야기들. 슬픈 인형 생페리앤은 캐시 굿맨과 상냥한 레인 부인과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 이 책의 키워드는 단연코 ‘금빛’이다. 금빛은 욕심쟁이 처든처럼 부귀와 권력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희망의 상상적 동반자다. ‘금빛=희망, 명랑, 낙천, 긍정, 환희, 꿈, 행복’ 이라는 등식을 성립한다. 최소한 그것을 산술적 의미로만 계산하려드는 어른의 욕망을 배제한 경우라면.


사라진 주황색 병정, 사라진 유년의 꿈, 사라진 책방... 책을 읽는 동안 주황색 병정이 다시 찾아왔다. 사라져서 슬픈 것들이 아닌, 사라짐으로 열매를 맺은 이야기가 이 아름다운 스무 편의 이야기라면 내 기쁨은 충족한다. 현실 속에서 거짓처럼 연결되는 상상의 이야기. 판타지의 미덕은 꿈을 꿀 수 있는 기운을 불어 넣어준다는 점이다. 엘리너 파전은 이 책에서 일벌레 나라에서 계산기만 두드리고 사는 어른에게 유년기의 꿈을 상기시켜준다. 다시 내 주황색 병정들이 자리를 뜬다. 그렇지만 그들의 먼지 앉은 어깨위로 ‘상상의 나비’가 핀업되는 것을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느낀다. 거기에는 목장의 풀빛 여자로부터 꽃을 선물 받고, 강의 임금님에게 노래를 들으며, 숲 속의 젊은이와 춤을 추는 일이다. 열린 세상, 사랑으로 출렁대는 벅찬 가슴으로 내 주황색 병정과 따뜻한 작별 인사를 나눈다.

 

안녕, 꼬마병정들아. 우리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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