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최초 여성 CEO 김만덕
홍종화 지음 / 주류성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만덕의 길은 해안의 길이었다. 이것은 작가의 길이기도 했다. 이 길이 우리 사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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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최초 여성 CEO 김만덕
홍종화 지음 / 주류성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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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들어가며


“최근에 20대 여성들의 자살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것이며 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이었다.”

소설 시작 전 ‘작가의 말’ 중 한부분이다. 격렬한 노동 뒤의 막막한 평정 속에서 무심히 토해 놓은 듯한 이 말에 실린 작가의 정신이 소설 김만덕을 쓰게 한 모티프이다. 이런 작가 정신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말로 대표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워킹푸어가 300만이며 청년 실업이 200만 그리고 외신으로부터 ‘자살 공화국’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말이다. 이 말은 그대로 풀면 귀족층의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뜻하는 것으로서 사회 지도층이 헌신하고 자선을 베품으로써 따뜻한 사회를 만들자는 정신을 얘기한다. 이와 같은 정신이 본소설 전체에 흐르고 있으며, 이는 작가가 ‘분노의 포도’ 등을 감명 깊게 읽고 소설에 투신하게 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작가는 사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칼보다 강한 펜을 들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작가가 거대담론을 형성하고 오피니언 리더로서 사명해야 된다는 작가 본유의 책임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소설은 일반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장편 역사 소설을 끝마친 작가 홍종화의 뜨거움과 치열함이 녹아있다. 따라서 본소설 속에는 작가의 땀냄새가 조선 시대 민중들의 치열한 삶으로 그리고 밤을 지새우는 작가의 고독한 숨결이 김만덕의 외로운 고투로 재창조되어 형상화 되어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작품은 작가의 삶과 사상이고 정신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본소설은 2000년대 장편 역사 소설 중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거대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골짜기와 봉우리 모두를 밟기란 힘들지만 작가를 본받아, 그의 도저한 열정과 고독을 새기며 본격탐사를 위한 예비적 고찰의 첫걸음을 떼기로 한다.


2.기생의 삶에 투영된 민초들의 한

본소설은 천민을 비롯한 민중들의 한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주인공인 김만덕이 조선시대 가장 천대받던 7계급에 속하는 기생으로써 벗어날 수 없는 신분의 굴레를 쓰고 신음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선시대의 모순된 신분제도는 제주도라는 월해금법(越海禁法)으로 묶인 도민들의 비참한 삶과 기생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통해 작품에 투영되었다. 다시 말하면 천민의 삶으로 대표되는 김만덕의 삶을 통해서 민초들의 눈물과 땀과 피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큰 주제 중의 하나인 천민층 민초들의 사랑과 증오, 슬픔과 기쁨, 삶과 죽음은 굽이쳐 흐르는 역사의 강물이 되어 굽이쳐 흐르고 있다.

그 중에 시체라는 이미지는 조선 시대 민초들의 삶을 반영하는 가장 형상화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지상에서의 고통스러운 생존은 견뎌야 하는 생명의 줄이기에 한은 더욱 깊어지고 여기서 ‘시체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섬뜩한 소재와 마주하게 된다.


전염병은 어머니마저 데려가 버렸다. 난데없이 쌀밥을 챙겨주던 어머니는 아이들이 쌀밥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다가 잠을 자더니 더 이상 눈을 뜨지 않았다. 그때서야 만덕은 깨달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간 곳이 같다는 것을. 그 곳은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극심한 배고픔이 만덕을 괴롭혔다. 벌써 며칠 째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식량을 구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시체를 먹는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떠돌았다. 무서워서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문틈으로 몰래 본 사람들의 눈동자는 흉악하게 변해있었다. 만덕은 가끔씩 산에서 나타난다는 귀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흉악한 표정으로 흙을 파먹으면서 죽음에 처절하게 저항하던 사람들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시체로 변해갔다. 시체를 먹고 목숨을 연명하던 사람의 시체를 먹고, 또 며칠을 버티다가 죽어서 다른 사람의 먹이가 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아무도 그 고리를 끊지 못했다.


이와 같이 시체까지 먹어 가면서 연명하는 민초들의 한이 작품 기저에 흐르고 있다. 조선 시대에 토지 관계와 신분 제도를 통한 가혹한 착취는 평민들의 삶을 죽음에 직결된 극도의 궁핍으로 내몰았다. 얼음보다 차가운 겨울, 유행하는 전염병은 모순과 착취의 현실을 상징하는 섬뜩한 심상이다. 필사적으로 시체까지 먹어가며 하루의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눈물겨운 모습이 모질게도 질긴 목숨의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목숨이란 소중하며 자신만의 것이 아니기에 더욱더 서러운 것이다.

이처럼 한이란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죽음에 처절하게 저항하는 것’,이고 착취당하고 살아온 계급들의 체험적 사상의 덩어리에 머물러 있지만 바로 이것이 무의식에 머물러있으면서 김만덕과 같은 인물을 만드는 역사 전환의 원동력으로 폭발할 수 있는 것이다.


퇴기인 월중선이 외삼촌에게 찾아왔다. 만덕 때문이었다.

- 나에게 만덕을 맡기시오.

- 아니 되오. 그 아이는 김해 김 씨 가문이오.

- 양반이라는 허울이 누구의 입에 밥이라도 한 술 넣어준단 말이오? 고아가 퇴기의 수양딸이 되는 것이 이제 아무 일도 아니지 않소.

- 시끄럽소이다. 아무리 굶어죽는다 해도 양반이 어찌 퇴기의 수양딸이 될 수 있겠소.

- 양반의 몸은 기생의 몸과 다르답니까. 먹지 못하면 죽는 것이오. 어린 아이라도 잡아먹을 심산이오?

- 아무리 인륜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들, 어떻게 아이를 잡아먹겠소.

-그렇지 않으면 다 굶어죽을 것이오. 나라에서 무엇을 해주기를 기다리지 마시오. 제대로 정신이 박혀 있는 나라라면 이렇게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오. 우선 살아 있는 목숨은 살아야할 것이 아니요. 내 서운치 않게 곡식을 줄 테니 잘 생각해 보시오.

그때, 만덕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외삼촌, 나는 기생이 되어도 좋으니 곡식을 달라 하시오.

-너는 기생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하는 소리다.

-어디가나 사람이 사는 세상이겠지요. 이대로 모두 굶어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만덕이 핍절한 가난 속에서 스스로 기생이 되기로 선택하는 장면이다.

작가는 단순한 감정적 차원에서 한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 그 생성과정과 본질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본문과 같이 죽기 싫어 기생이 되고 이것은 만덕의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의 본질을 고려하려는 작가의 사상은 당대 한국 사회의 토대를 분석하였고 신분제도와 천민들의 삶을 구현하는데 소설의 무게 중심을 두게 되었다. 기생으로 대표되는 만덕의 삶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동정을 잃는 것으로 대표된다.


목사는 간간히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음흉함이 묻어 있었다.

몇 차례의 술잔이 오가고 불이 꺼졌다. 까만 어둠이 물기를 가득 품고 진하게 펼쳐졌다. 남자의 음흉함에 여자도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음흉하게 변해가는 그런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만덕은 목사에게 순정을 바쳤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만덕이 일부러 비음을 내면서 적극적으로 임하자, 목사는 빨리 흥분이 되어 버렸는지 서둘러 만덕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딴에는 힘껏 일을 치른다고 용을 쓰더니 짐승 같은 소리를 서너 번 낸 후에, 푹 하고 만덕의 몸 위로 쓰러져 버렸다. 만덕은 목사의 몸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허무함에 몸을 떨었다.


만덕이 제주 목사에게 동정을 잃는 장면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이런 고통스러운 인식이라는 것도 추상적 논리로서가 아니라 구체적 형상화로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니, 기생의 삶으로써 대표되는 분하고 억울한 민초들의 삶은 안으로만 삭이는데 그치지 않고, 만덕이 거상이 되게 하는 역사전환의 원동력을 내재한 적극적 의미가 부여되는 한과 동의어가 된다. 한의 드러냄과 실현에의 의지, 생명의 온전한 싹틔움과 꽃피움을 향한 지향성이 고통 받고 절망하며 몸부림치는 서럽게 살아가는 만덕의 삶을 끝내 좌절하지 않게 만들고 해한(解恨)의 피안을 꿈꾸며 나아가게 만든다.



3.해한(解恨)을 향한 생명의 몸짓

해한(解恨)을 향한 생명의 몸부림의 양상은 다양한데 다음 장면에서 나오는 만덕의 기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만덕은 침착하게 화살을 활에 재더니 막 나뭇가지에 앉으려하는 까마귀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단 한 사람 선화만이 코웃음을 쳤다. 사람들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화살은 곧바로 날아가서 나뭇가지에 앉으려던 까마귀를 맞추어버렸다. 나뭇가지에 앉아 피곤한 몸을 쉬려던 까마귀는 돌처럼 굳어져 땅으로 떨어졌다.

- 악, 정말 까치가 떨어지다니......

양석진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더 놀란 것은 선화였다. 다음번에는 한 번에 노루를 잡아 보이겠습니다.


위의 장면을 통해 만덕은 한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구심점을 찾게 되는 것이다. 타인 보다 뛰어난 기예와 넓은 인격, 이것들을 통해서 넋 놓고 세월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치유에 나선 것이다. 이와 같은 부분은 몇 군데 더 나오게 되는데,


- 어젯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저 년이 요분질을 하는 소리였나?

입이 삐뚤어진 여자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말이 괜찮았다고 느꼈는지 그녀는 웃고 있었다. 만덕은 대답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저들에게 말리는 것이었다.

- 개처럼 뒤로 붙어먹는 년이라 개가 되었나? 사람 말이 들리지 않나 봐.

만덕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아낙네들이 이를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웃었다.

- 어라, 제법 성깔이 있네. 우리 하고 한판 붙어보자는 건가?

무시해야 했다. 저들이 느끼고 있는 불온한 감정들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다. 만덕은 침묵하기로 했다. 불온한 감정이야 더 이상 기승할 곳이 없으면 저절로 사라지지 않던가. 만덕은 그녀들의 불온한 감정을 떨치듯이 밀어내고 바닷가로 눈을 돌렸다. 짙푸른 바다가 가득 눈으로 들어왔다. 만덕은 이 순간만은 바다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조롱과 멸시도 품을 줄 아는 여장부로서의 면모가 만덕을 많은 고난 속에서도 살아남게 한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강인함과 진취적 기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소설은 점점 더 만덕의 거상으로써의 앞날에 대해서 많은 복선을 제공하며 이는 소설의 플롯을 구성하고 있다. 노루 사냥에서 나타나는 만덕의 말타기와 활쏘기 재능, 그리고 동네 아낙들의 멸시를 넓은 가슴으로 품는 모습은 만덕이 거상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재목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은 만덕의 타고난 지도자적인 큰 마음의 표현들에서도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은 큰 인물로써의 면모는 “오라버니들, 꼭 좋은 날이 올 것이니 그때까지 참고 기다립시다.”에서도 구체적으로 예시되고 있다.

본 소설을 읽으면서 민초들의 한을 대표하는 기생들의 삶을 볼 때, “주어진 자기 삶에 밀착하여 혼신으로 끌어안고 치열하게”살아가는 생동의 삶 그 자체가 바로 삶의 진실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덕도 기생의 삶을 인정하고 그 삶에 최선을 다했기에 양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한은 언제나 생명과 함께 하고 그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생명을 타고나 유지시켜 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상실이며 상처이니 인간의 삶이란 한과의 끝없는 동행이다. 어디 인간만이 그러하겠는가. 삼라만상, 생명 지닌 모든 존재의 운명이 그러하다.

그러나 작가는 한을 단순히 운명으로 받아들여서 승화하는 것이 아니고 대의를 위해 극복할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본소설의 인물들은 대의를 위해 삶을 불태우고 기꺼이 역사 너머로 사라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하고 본받아야 할 한의 승화일 것이다.


4.색채의 상상력

소설의 문장과 분위기는 이미지를 만든다. 그러면 이미지란 무엇인가. 루이스는 ‘말로 그린 정열적 그림’이라고 이미지를 정의했다. 그렇다면 본 소설은 작가의 추상화인 것이다. 이를 가리켜 사르트르는 작품의 언어는 거울과 같다고 했다. 소설 작품 속에서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간적인 고뇌를 가지고 있지만 낙천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행동파 붉은색이라고 생각된다.

‘김만덕’ 전반부의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 원과 한으로 가득찬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 당연히 어두둘 수밖에 없는데, 뜻밖에도 화사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작가의 섬세한 색채 감각이 그 요인인 것 같다.

기생으로 대표되는 붉은 색채와 작품 곳곳에서 드러나는 화사한 색채의 이미지들은 작품 전체를 화사하고 경쾌하게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진부할 수도 있는 주제와 검은색으로 대표될 수 있는 민초들의 한의 묘사가 경쾌한 속도감을 가지고 독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색채 감각은 상상력 차원의 것인데, 대상의 안팎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훨씬 더 핍진하게 그 속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 가을날, 한라산 골짜기마다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단풍을 배경으로 노루사냥을 나온 그들에게 뜻하지 않은 두 여자의 신경전이 먼저 펼쳐졌다. 하지만, 어느새 그들은 두 여인의 다툼을 즐기고 있었다. 둘 다 단풍만큼이나 색깔이 뚜렷한 여자들이기 때문이었다.

- 두향은 말을 마치자마자, 만덕이 얼굴을 향해서 발길질을 했다. 만덕은 피하지 않았다. 이마 부근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기생들도 일제히 만덕을 향해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

한참동안 만덕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았다. 단 한 차례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면 저들의 무모하고 야비한 소란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 큰 이유는 기생들이 질투를 이기지 못해 싸우는 모습을 굳이 벼슬아치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 독하고 독한 년. 네가 언제까지 참는가 보자.

기생들은 더 심하게 발길질을 하였다. 옷이 찢어지고 입술이 터졌다. 온 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만덕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 피와 뼈까지 고집으로 가득 물들어 있으니 그 어디에 백성이 들어갈 곳이 있겠느냐. 너 같은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사라지는 것이 이 조선을 위해 좋을 듯하구나.

검객이 한발 더 앞으로 다가와서 칼을 쳐들었다. 어둠 속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순간,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복면은 침착하게 심환지에게 다가가서 목에 칼을 대고 소리쳤다.

- 밖의 사람을 물리치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먼저 죽을 것이다.



처음 장면은 기생 모습에 대한 묘사인데 마치 조선 시대 화려하게 차려입은 기생의 모습이 상상되고 그를 통하여 붉고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질투에 눈이 먼 동료 기생들이 만덕을 폭행하는 장면으로써 입술이 찢어지는 장면으로 피의 붉은 색이 나타나 있으며, 마지막 장면의 부폐한 관리를 협박하는 장면에서도 붉은 색채의 조합을 이루어 내고 있다.

두 예를 들었을 뿐이지만, 우리는 ‘김만덕’ 작품 곳곳에서 작가의 섬세한 색채 상상력을 만난다. 그것이 간결한 문체를 통한 언어 운용력에 실렸으니 이미지 표현에 있어서 한 경지라 할 만하다.

이처럼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색채는 푸르른 하늘 아래 동백의 꽃으로 피어나고 풀국새의 울음으로 토해지는 붉은 색이라고 생각된다. 이 색채의 이미지는 작품 전체에 걸쳐 빠르고 경쾌한 느낌을 주며 테마를 무겁지 않게, 즐겁고 상쾌하게 이끌어 가고 있다.


5.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

재산을 모으기도 힘들지만 모은 재산을 잘 관리하는 것은 더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불삼세(富不三世)’라는 말을 한다. ‘부자가 삼대를 못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삼대도 넘기기 힘들다는 부를 300년 동안 이어온 가문이 있다. 12대에 걸쳐 만석꾼을 지낸 ‘경주 최부자집’이다. 어떻게 해서 ‘경주 최부자집’은 무려 12대에 걸쳐 300년 동안이나 만석꾼의 부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집안 대대로 전해져오는 6가지 가훈에 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은 하지 말라. 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셋째,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넷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다섯째,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여섯째,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경주 최부자집이 12대에 걸쳐 부자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존경받는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재산을 자신들만을 위해 쓰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여 ‘부자에게 주어진 도덕적 의무’를 다했던 것이다. 그런데 작금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지 작품의 감상과 함께 꼭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은광연세(恩光衍世)’로 대표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은 무엇인가? 소설의 원동력과 같은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이 소설 전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단어가 필연적으로 떠오른다. 이는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전쟁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평생 모은 재산을 기탁하는 사람이 신문과 방송에 등장한다. 하지만, 부자가 기탁했다는 보도는 흔하지 않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경제가 어렵고 실업률이 증가한다는 말들이 떠돌 때면 나는 버릇처럼 만덕을 떠올린다. 만덕에게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 앞부분에 있는 작가의 말이다. 작가는 이와 같은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소설을 썼지만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부끄러운 사례지만, 조선의 멸망 과정을 돌아보면 자신의 나라를 망하게 한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상을 받은 지배층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로부터 1910년 10월 7일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등 모두 76명이 합방 공로작을 수여받아 당대에도 호의호식했을 뿐 아니라 해방후에는 조국을 팔아먹은 그들의 자손들까지 당당하게 부와 명예를 대물림했다는 점이다. 또한 6.25 때 전선에서 총에 맞으면 빽이 없어 죽는다 하여 '빽'이라는 비명을 지르며 죽었다는 농담이 단순한 우스갯 소리가 아니였다는 것이 요즈음 증명되고 있다. 부끄러운 우리의 과거이다. 반면에 외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솔제니친은 소련 시대에 전체주의 비판으로 정부로부터 탄압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국외로 추방되는 것을 거부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앞다투어 망명을 받아 주려고 했지만 본인은 자신을 핍박하는 조국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작가의 말에 있는 데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전쟁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비단 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물론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직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이 우리 사회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이 먼저 필요함을 얘기하며, 이와 같은 사상은 소설 중후반부에 들어가면서 더 구체화 된다.


-그런 불안이 계속되고 있는 중에 만덕이 사백오십 석이라는 구호곡을 제주 관아로 보내어 백성들을 구휼하게 했으니 나중에 이 사실을 안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만덕을 칭찬하였다. 제주 목사 이우현은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아전들에게 몇 번이고 물었다.

- 그게 정말이냐. 만덕이 구호곡으로 사백오십 석을 보냈다는 말이.

- 예. 사실이옵니다. 만덕이 배를 육지로 보내서 구호곡을 싣고 왔다 하옵니다.

- 참으로 고마운 일이구나. 배고픈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서 관덕정에서 구호곡을 나누어 줄 것이니 받아가도록 하라.

제주는 물론, 대정, 정의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왔다.


- 제주 목사의 장계를 읽은 정조는 감동했다. 장계 속에서는 한 여인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정조는 그곳에서 역동적인 힘을 느꼈다. 그 여인은 일생동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 끝내는 자신까지 뛰어넘은 여인이었다.

만덕에게 소원을 물어서 국법에 연연하지 말고 모두 들어주도록 하라.

정조의 뜻은 말을 타고, 배를 타고 제주목사에게 전해졌다. 제주 목사 유사모는 만덕을 불러 임금의 뜻을 전했다. 만덕은 사람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며 어렸을 때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킨 것뿐이니 굳이 상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첫 번째 장면은 만덕이 거상으로 성장하면서 구체적으로 사람들을 돕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두 번째 장면은 김만덕의 선행이 조정에도 알려져서, 정조는 제주 목사를 시켜 김만덕의 소원을 묻게 했고, 만덕은 “임금을 뵙고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다”고 답했다.

기생 출신의 장사치가 임금을 알현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시절, 게다가 제주도민의 섬 밖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던 당시 상황에서는 파격적인 요구였다. 그러나 정조는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궁에 들어올 수 있도록 여성의 벼슬 중 가장 높은 ‘의녀반수(醫女班首)’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정조의 배려에 대한 만덕의 답을 봐도 알 수 있는 것은 만덕은 대의를 위해 생을 불사르고 기꺼이 역사 너머로 사라지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의 대표라는 것이다.

작품을 직접 읽어보면 작가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대표되는 시대 정신, 즉 거대담론을 읽을 수 있다. 직접 읽어보기를 바라며,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은 마지막에 드러난다. 주인공이 어떻게 자신의 성공을 마무리 짓고 떠나는 가가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을 완성하는 것이다.

성공하기는 쉽다. 그러나 명예롭게 물러나기는 참 어렵다. 그것은 경제계, 법조계, 종교계까지 차별이 없이 똑같다. 최근에 법조계의 생리를 다룬 어떤 책을 보면 법조계도 특별히 마지막에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생각해 이익을 축적한다. 자신의 신분을 대물림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필히 불법과 술수가 동원된다. 제계는 말할 것도 없다. 최근에 특별 사면되었지만 재벌 기업 총수도 탈세와 불법 증여를 일삼았지 않는가?

정조 앞에서 하는 만덕의 답을 보라. 만덕은 대의를 위해 생을 불사르고 기꺼이 겸손할 수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의 대표이다.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은 마지막에 명예를 탐하지 않고 역사 속으로 사라짐을 통해 완성된다. 자신의 이익이나 측근의 이익을 탐하지 않고 스스로 겸손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짐을 통해 완성된다.



6.결론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에덴 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 나위 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라고 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의 주인공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시간도 인식하지 못했으며, 너와 나라는 대극도 인식하지 못한 수진무구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일체의 관념이 배제된 존재 자체였다는 말이다.

이러한 에덴동산을 신화학에서는 원형이라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본향이라고 하며, 일반적으로는 고향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이 본향에서 쫓겨났고, 인간은 그 존재의 원형을 상실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고향을 상실한 존재이며, 인간 본래의 모습인 원형을 상실한 존재임을 상징한다. 인간은 모두 고향을 떠나온 떠돌이이며, 영원한 나그네임을 말해 준 것이다.

인간의 현존재가 고향을 떠나온 떠돌이이며, 영원한 나그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바로 인간이 이상(理想)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하와는 신과 대화했으며, 바람과 구름 그리고 뱀과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에덴동산의 모든 나무와 그 가지의 푸른 잎들, 그리고 모든 꽃들과도 사랑을 속삭였던 것이다. 에덴 동산은 이상의 동산이었으며 완벽한 이야기의 동산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곧 이야기의 나라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러면 누가 신과 대화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무래도 남은 듣지 못하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시간의 때가 묻어 동심과 이상의 세계를 떠나 똑똑해졌다. 그래서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었고, 이야기의 나라에서도 쫓겨난 것이다. 오직 작가만이 향수에 젖어 신과의 대화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동심이라고 한다. 작가의 마음은 동심과 같다고 한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 그것을 위해서만 일한다면 좋은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본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 홍종화도 누구보다도 짙은 그리움의 병 때문에 아이 같은 면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간은 누구나 운명적으로 이러한 향수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홍종화는 좀 유별나다. 그래서 홍종화는 작가가 된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하는 일이 ‘생각하다’이며, 언어가 바로 이 생각의 길이라고 언어철학자들은 말한다. 이 말은 언어가 없으면 생각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 ‘생각하다’라는 동사는 마음이 언어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마음의 움직임인 ‘생각하다’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이성을 바탕으로 사물의 의미를 탐색하는 ‘사고하다’와 감성을 바탕으로 없는 것을 마음으로 그리는 ‘상상하다’이다. 그래서 사고하는 힘인 사고력은 학문의 기본이며, 상상하는 힘인 상상력은 예술의 바탕이 된다. 말할 것도 없이 소설을 쓰는 것도 상상력이 바탕이 된다. 예술가의 우열은 상상력의 우열에 의해 결정된다.

‘상상하다’의 우리 말은 ‘그리다’이다. ‘그리다’라는 동사는 그 대상이 없을 때에만 활동한다. 부모가 없는 고아들은 부모의 모습만 그리고, 연인이 없는 외톨이는 연인의 모습만 그리며, 고향을 떠난 떠돌이는 고향만을 그린다.

우리 모두는 천상의 고향을 떠나 이 땅을 지나가고 있는 순례자들이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 몸과 영혼의 균형이 깨어졌다. 에덴동산에선 신과의 교감이 있었는데 거기서 쫓겨남으로써 신과의 교감이 끊긴 것이다. 이것은 등불이 꺼졌다는 의미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워한다. 이를 가리켜 존재에 대한 향수라고 한다. 나는 글을 마무리하며 홍종화 작가는 이 향수병에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그리움이 없이는 본소설을 끝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땅 곧 물질만을 바라고 살기 때문에 물처럼 땅으로만 파고든다. 그러면 영혼의 불이 꺼진다. 작가가 향수병에 걸려 있다고 하는 것은 영혼의 불이 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을 타인에게도 붙여줘야한다. 작가는 영혼의 등에 불을 켜 주는 점등자이기 때문이다. 홍종화 작가의 작품을 읽는 사람마다 그 변에 전염될 것으로 믿는다. 그의 소설이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들의 영혼의 등에 그리움 반짝이는 등불을 켜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20대 여성들이여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몹시 불행하다고 느껴진다면 조선에서 신분적으로 천대 받던 7계급 중의 하나였던 기생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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