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에서 아방가르드까지의 현대시론
옥타비오 파스 지음, 윤호병 옮김 / 현대미학사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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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에서 아방가르드까지의 현대 시론>은 1974년에 출간된, 근대시사를 근대성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고찰한 책이다. 번역에 문제가 있지만, 파스의 이 책은 시를 전공하는 나에게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예감되는,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책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나 역시도 한국의 근대시를 근대성과의 관계에서 고찰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자 탁월한 사상가이기도 한 파스는 서구 근대시의 흐름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갖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시를 사랑하고 계속 창작의 노력을 경주하였기에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짐작되었다.

파스의 책은 스페인어권 시, 프랑스 시, 영미시를 꿰뚫는 넓이와 그 넓은 시의 자장 속에서 움직이게끔 하는 磁原-시의 근대성에 대한 반발과 매혹-을 끌어내어 보여주면서 근대시의역사를 맥락지워 보여준다. 파스는 근대성을 시간의식이라는 축을 통해 설명한다. 근대는 전대와 다른 특수한 시간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종교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였다. 전근대의 시간관, 순환의 시간관이나 낙원-현세-천국이라는 기독교적 시간관 등에서는 '미래'라는 개념이 중요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미래는 천국의 시간이므로 현세의 미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고 고대의 순환적 시간관에서 미래는 과거였을 따름이다.

근대적 시간관에 와서야 미래는 그야말로 현세적인 새로움이라는 의미를 띠게 되고, 그 미래는 현세의 인간들이 쟁취해야 할 것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고 한다. 이때 혁명, 유토피아 사상이 등장하게 되며 파스는 이 혁명을 근대를 지배한 근대적 시간관의 극단적 표명이라고 본다. 아날로지와 아이러니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시는 이 혁명과의 동화와 반발을 통해 근대 역사에서의 그 위치를 알 수 있는데, 시는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자 적자라는 것이다. 비판이 근대성의 한 특징이라고 할 때 적자라고 할 수 있으나, 근대의 사간의식의 결과-미래에 의해 현재가 차압당하는-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아날로지는 태초의 사간, 우주의 상응 상태를 지향하며, 아이러니는 죽음의 의식으로 미래의 덧없음, 유토피아적 의식의 비웃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시 역시 앞 시대를 비판하며 새로운 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대성의 자장 속에 있다.

파스의 이러한 생각은 나의 생각과 비슷하다. 근대 문학이 근대성의 산물이면서도 근대의 비판이라는 측면이 문학의 근대성이라는 생각을 나 역시 갖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같은 근대성의 띠를 생각하면 정말, 근대성을 벗어난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파스의 대안은 나는 약간 흥분 상태 속에서 주의 깊게 읽었다. 파스는 근대적 시간 의식이 이젠 역사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은 근대성의 황혼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예술 역시 이젠 새로움의 시학이 상투적인 되풀이에 떨어졌다고 진단하여, 예술과 시에 있어서도 근대성의 종말이 다가 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시의 종말은 아니고 근대시의 종말이라고 한다. 근대시 종말 이후의 시는 미래에 의해 차압당한 현재가 아닌 지금 바로 여기의 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변화의 시학이 아니라 변화의 토대가 되는 변하지 않는 원리를 찾는 시학이며, 미래와 과거가 수렴되는 지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감각, 그리고 육체성을 길어 올리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파스의 주장이다. 이를 나는 심각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근대시를 탈근대를 위한 하나의 지렛대로 작용할 수 있게 하는 기획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시의 근대성을 정화시키면서도 그 시적 특성을 과감히 전면으로 내세우는 것, 이를 통해 현재성의 재생, 감각의 재생, 의미의 감각을 추구하는 일, 그것이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생각하는 시를 위한 변론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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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비즘 20세기미술운동총서 7
존 골딩 / 열화당 / 198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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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역시 열화당에서 나온 20세기 미술 운동 총서의 한 권이다. 시인 황지우의 번역인데, 잘 읽힌다. 역시 짧은 해설 속에 큐비즘의 원리와 역사가 잘 해설되어 있다. 하지만 결코 만만하게 읽히지 않는다. 미술에 문외한인 나 자신 역시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만 큐비즘에 대한 풍문(?)을 어느 정도 정보를 알듯 안 정도에는 이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그림의 해설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그림이 어떻게 해서 큐비즘, 더 나아가 현대 예술의 막을 열었는지 설명한다. 큐비즘은 어떻게 보면 그림 자체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전에는 그림 자체가 아닌 어떤 대상의 재현으로서 그림을 생각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잔느의 선구적인 노력 이후, 그림은 자기 자신이 하나의 부피감과 질감을 가진 존재가 되려고 하였고 이를 극적으로 밀고 나간 것이 큐비즘이라고 할 수 있다. 골딩은 이러한 큐비즘의 노력을 잘 알려진 분석적 큐비즘의 단계와 종합적 큐비즘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분석적 큐비즘은 대상을 여러 각도로 관찰하면서 추상하는 단계로 볼 수 있는데, 종합적 큐비즘은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또는 추상에서 재현으로 나아가는 단계로 볼 수 있다. 이를 피카소는 꼴라쥬의 방법으로 브라크는 파피에 콜레라는 방법으로 성취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넫 저자는 피카소와 브라크의 차이를 지적하는데, 흥미로운 부분이다. 피카소는 충격의 요소가 더 많다고 하고, 꼴라쥬에서 예기치 못한 다른 의미를 뽑아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상적 요소들이 함께 용접, 각각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재현적인 전체를 형성한다. 하지만 브라크 작품에서는 각 요소들은 서로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29면 참조) 골딩의 글에서 또한 주목하고 있는 예술가는 후앙 그리로서,
그는 종합적 큐비즘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그리고 회화의 직접적 실천으로 밝혀내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큐비즘 원리는 후대 예술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러나 1920년대 오면서 큐비즘의 대가들이 큐비즘과 멀어지는 창작활동을 하면서 큐비즘은 사라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현대 미술계에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한다.

큐비즘에 대한 역자 후기에서 황지우는 이른바 큐비스트의 동시적 시각의 원리라는 것을 '독점 단계에 이른 자본주의의 '관리된 세계' 속에서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무기력한 개인의 분열증에 다름 아'니다라고 평가하고 있지만(93면) 꼭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니다. 그는 큐비즘을 예술가의 주관 속에 있는 시각적 범주에서 자율성을 찾는 자기 만족적이고 자폐적인 양식이라고 연이어 말한다. 하지만, 이른 바 관리된 세계는 분열증적 개인을 양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을 주체화하여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시각의 동시성은 이러한 단일한 시각의 주체 양산에 대립되는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1987년에 쓴 역자 후기인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역자의 시각이 이해될 만도 하지만, 지금 상황의 이념적 발전 지형에서는 받아들일 수는 없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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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주의 20세기미술운동총서 3
노버트 린튼 / 열화당 / 198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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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버트 린튼의 <표현주의>는 열화당에서 나온 20세기 미술운동총서의 한 권이다. 이 총서는 도판을 글보다 많이 실려 있는 소책자 총서이다. <표현주의> 역시 50여페이지의도판과 20여남은 페이지의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짧은 해설이지만 표현주의 미술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표현주의가 다리파(드레스덴 그룹)과 청기사 파(뮌헨 그룹)으로 그 수맥이 나누어진다는 설명에서 시작하여 1차대전까지 존속했다가 1차대전 후 다다, 신즉물주의, 바우하우스 등의 반표현주의 운동에 밀려 사라졌다는, 하지만 그 반표현주의 역시 표현주의의 큰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으로 끝을 맺고 있는 해설이다.

다리파는 창조적 충동을 감추지 않는 것을 목표로 뭉크를 찬양하고 고호를 발견했으며, 아카데미 미술에 호응하지 않는 대중에게 손을 뻗쳤다고 한다. 뮌헨에서는 청기사 그룹이 형성되었는데 이들 전위예술가들의 개인주의를 공식화할 어휘를 구축하려고 하여 추상예술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 중 한사람이 유명한 칸딘스키인데,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라는 저술을 통해 인간성의 내적 본질을 전달하는 방편으로서의 추상예술을 주장하면서 과학-기술 발달에 도전하고 베르그송 철학의 영향을 받아들여 예술론을 폈다. 전후 표현주의의 물결은 사그라들었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 예로 바우하우스 운동의 토기는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클레나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 후기까지 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표현주의 물결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표현주의 미술에 접근하는데 다리를 만들어주기에 흡족하다. 번역문도 읽기 좋다. 우리가 보통 접하기 힘든 비대중적인 표현주의 그림들을 감상하는 기회도 해설문 뒤의 도판들이 제공한다. 우리는 표현주의 그림들에서 이 힘들고 피곤한 현대인들의 삶과 그 어둡고 쓸쓸한 내면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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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예술론
레나토 포지올리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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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올리의 책은 아방가르드에 대해 개념에 재한 접근과 심리, 사회학적 접근, 미학적 접근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연구서이다. 그러나 본격적 연구서이기 때문에 20세기 초반의 유럽 예술운동 빛 경향에 대해 사전 이해가 없으면 접근하기 쉽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아방가르드 예술의 흐름을 소개하지 않고 직접 아방가르드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리고 아방가르드의 특징 및 미학, 심리적 사회학적 배경 하에서의 접근 등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기 때문에 좀 난삽한 감이 없지 않다. 가끔 오역이 보이는 것도 흠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아방가르드 연구서로 어느 정도 고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으로 빈틈없는 아방가르드 연구서가 되기를 저자가 노린 것같은 인상이다. 아방가르드와 고전 예술을 운동과 학파의 개념으로 차이점을 보여준다든지, 그리고 아방가르드 운동의 특징을 행동주의에서 적대주의로, 적대주의에서 허무주의, 투쟁주의로 변증법적으로 발전해나간다고 지적한다든지 하는 대목은 아방가르드의 다양한 이념적 특색을 본질적인 면에서 다시 정리해내는 솜씨를 보여준다.

아방가르드와 낭만주의와의 관계를 엮어내는 부분도 주목할만하고 아방가르드와 대중성의 문제, 그리고 거기에서 유행과 현대성의 문제를 엮어내는 부분도 아방가르드를 생각할 때 빠질 수 없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아방가르드의 담당자로서 지적 엘리트를 들고, 이 지적 엘리트의 현대 사회에서의 소외 문제를 파고 든 것은 아방가르드를 하나의 예술적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 문화 속의 한 현상으로 보아야 함을 주장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방가르드에 적대적이거나 찬미하는 비평에 유보를 두면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아방가르드의 시학과 역사적 흐름 속에서의 아방가르드의 변모와 현재적 위치를 논한 것은 저자의 균형잡힌 시각을 돋보이게 했다.

아방가르드에 대한 이만큼의 포괄적인 연구는 그다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아방가르드의 기존 비평들에 대한 충실한 수용 및 비평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언급을 재치있게 인용하면서 책에 생기를 불어놓고 있다는 점 역시 이 책의 장점일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인 시각의 확보가 아방가르드를 과연 정말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가는 면은 생각해볼 문제다. 어떠면 아방가르디스트의 편향적인 주장을 보는 것이 아방가르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책은 아방가르드에 '대한' 연구서이지 아방가르드의 책은 아니다. 그래서 아방가르드의 이해에 어떤 한계가 작용할 수 있다. 또한 저자에게 어떤 일관된 사상적, 방법론적 시각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이 책의 흠일 수 있다. 소외의 개념이 어떤 이론적 망 속에서 개념화되어 사용되고 있는가가 불명확한 것이 그 한 예일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사상의 망 속에서 인식되어진 아방가르드가 아니기에 독자가 안심하고 아방가르드에 대한 정보를 습득할 수도 있지만, '객관적'이라는 것이 결코 어떤 시각을 제거하지 않는 것이라 볼 때 탄탄한 시각의 확보가 더 객관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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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분리파 20세기미술운동총서 23
베르너 호프만 / 열화당 / 199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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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30여 페이지밖에 안되는 글과 또한 30여 페이지 정도의 칼러 도판으로 구성된 작은 책이다.하지만 도판의 그림들은 빈 분리파의 그림이지만 본문 내용과 그것이 서로 연결되지 않아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지 못한다. 또한 본문의 내용 중에 중요하게 취급되는 작품들은 여백에 작게 실려 있거나 아예 실려 있지 않아 글의 내용 파악과 독서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번역도 좋은 편은 아닌 듯싶고 30여 페이지의 작은 분량에 빈 분리파의 주장과 역사를 담으려고 하다보니 내용이 산만하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 인물들에 대한 충실한 소개 없이 등장해 독서 진행을 자주 막는다. 문제가 있는 책이다.

하지만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일단 빈 분리파를 단독으로 소개한 책은 한국에서 이 책 이외에는 없는 것 같다. 나도 빈 분리파가 어떤 예술 유파인지 이 책을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매혹적인 클림트의 그림이 칼라 도판으로 열 다섯장 정도 실려 있어 클림트의 미술 경향을 한 눈에 일별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는 책이다. 또한 보기 힘든 다른 분리파 출신 화가들의 그림, 에곤 쉴레라든지 아돌프 뵘, 칼 몰, 콜로만 모저 오스카 코코쉬카 같은 이의 그림도 비록 소량이지만 볼 수 있어서 미술을 폭넓게 감상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산만한 내용을 정리해보면 아마 이렇게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빈 분리파는 예술이 총체적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예술이 생활과 떨어져 있다는 데에 반기를 들고 생활 속의 예술을 지향했다. 그것은 자율적인 미학의 영역을 생활 속에 옮겨놓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 이동은 삶의 변화를 이끈다는 아방가르드적 기획이 아니라 생활과 친밀한, 생활 속의 하나의 도구가 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분리파는 완전히 고전적 시민사회 미학과 떨어져 나올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미술이 '아름다움'의 의미를 고전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예술을 공구화하면서 그 공구의 장식으로서 예술을 전화시키는 모습을 띄게 되었던 것이다. 로스같은 이는 이에 반발, 예술은 매끄러운 현실을 방식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 절규와 공포와 성이라는 어두은 내면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며 분리파와 결별하게 되고 결국 표현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빈 분리파는 그러므로 표현주의의 전단계의 예술 유파로서 이야기될 수 있다.

빈 분리파에 대해서 처음으로 접하는 글이라 아, 이런 유파도 있었구나 하며 호기심을 가지고 본 책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정보를 전달받을 수 있는 책이다.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과연 예술을 삶에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이념과 방법을 통해야할까. 빈분리파의 실패는 표현주의가 비판했듯이 하나의 장식으로 추락해버리는 경우였다. 물론 장식의 경향을 띄었던 그들의 회화가 마냥 장식이 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장식을 지향하게 되었지만 독특한 양식을 개척, 이전의 고전주의적 미감을 파괴하여 버린 것이다. 그러하기에 표현주의의 다리를 놓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술 기획은 비판력을 상실하고 현실에 흡수되어 버리는 기획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20세기 초, 그 격동의 시기에 이 유파의 주장은 젊은 예술가들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수박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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