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로 본 번역의 세계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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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어린왕자>로 본 번역의 세계 / ‘어린왕자’는 무례한 아이가 아니었어!

 

‘어린왕자로 본 번역의 세계’는 불어 원문을 1:1로 대응해 번역한 책이다. 사실, 이 전에 읽었던 <어린왕자>의 번역이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책을 읽기 전에는 굳이 이 책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번역의 세계를 내가 알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그런데 불어 원문을 1:1로 대응하고, 이전에 한국어판 어린왕자 번역을 다시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번역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그동안 내가 알던 어린왕자는 뭐지? 번역에 따라 아예 의미가 달라지는데?’
 

 


번역자의 과도한 작품 개입은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어린왕자의 첫 등장부터 오역이 등장한다. 원문에서는 ‘나’를 만난 어린왕자의 첫 마디는 “부탁인데요.. 내게 양 한 마리만 그려 줘요!”다. 우리말처럼 불어에도 ‘존칭’이 있다. 생텍쥐페리가 쓴 어린왕자에는 이 대사가 분명 존칭으로 쓰여졌다. 어린왕자가 나에게 존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전의 우리 번역은 “저기..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저..양 한 마리만 그려줘!”라고 번역했다. 어린왕자를 ‘버릇없는 아이’로 만들어버렸다.
 

 

 


어린왕자 별에 두고 온 ‘장미’의 이미지도 번역자로 인해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각인됐다.
 
지구에서 ‘나’를 만난 어린왕자는 자신의 별로 돌아가려 한다. 정확히는 자신의 별에 있는 ‘장미’에게 돌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전에 번역들은 ‘장미’를 오만하고 까탈스러운 꽃의 이미지로 그려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왕자가 왜 자신의 별로 돌아가려 하는지 감정이입도 잘 안됐고, 그 내용을 기억하는 이도 드물다.
 
직역와 그 전에 번역된 의역들을 비교해보면 이렇다. ‘도도한 꽃’은 ‘오만한 꽃’, ‘너무나도 자존심이 강한 꽃’이 돼버렸다.
 

(이정서 번역)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우는 모습을 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도한 꽃이었다..

이전 번역 A.

꽃은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도 오만한 꽃이었다..

이전 번역B.

꽃은 제가 우는 모습을 어린왕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나도 자존심 강한 꽃이니까..


 
어린왕자(어린이)의 시선에서 장미와의 대화를 이해한 게 아니라, 어른(번역자)의 시선에서 장미와의 대화를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를 번역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이 와 같은 꽃에 관한 이미지였습니다. 적어도 제가 어릴 적부터 읽어 온 번역서 속의 꽃은 저런 ‘오만하고’ ‘까다롭고 앙탈스러운’ ‘여자’의 이미지였던 것입니다. 145p


 
아직도 번역의 세계에서 직역이 옳은지, 의역이 옳은지 판단할 깜냥은 없다. 이 책을 읽고, 최소한 문학작품이라면 작가의 의도를 고스란히 옮긴 직역이 더 좋겠다는 취향을 확고해졌다. 작가가 고심해서 쓴 쉼표 하나까지 전달받고 싶다. ‘친절하다’로 표현되는 번역자의 과도한 해석이 들어간 문학작품을 읽고 싶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알베르 카뮈 ‘이방인’,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는 꼭 이정서 님이 번역한 책을 읽겠노라. 믿고 읽을 번역서가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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