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고] 베어 그릴스, 뜨거운 삶의 법칙
베어 그릴스 지음, 김미나 옮김 / 이지북 / 2014년 10월
평점 : 
작 년인가 버스에 달린 TV에서 외국 다큐를 본 적이 있었다. 배우 제이크 질렌할이 다큐에 나오길래 잠깐 봤던 것 같다. 질렌할과 이름 모르는 남자가 어마무시하게 긴 외나무 다리를 건너고 있던 장면이었다. 보는 내가 오금이 저리고 있는데! 딱 광고타임. 그때 이 다큐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Man vs. Wild]
집에 와서 유투브에서 이름을 찾아봤다. 시리즈가 7까지 나올 정도로 엄청난 인기의 다큐였다. 그 중에서 고른 게 사하라 사막에서의 생존 법칙편이었다. 휴가가려고 탄 비행기가 추락을 했다. 근데 사막.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는 당신이 알아두면 유용할 사막 생존 방법들을 알려주는 것이다. 최소한 구조 헬기가 올 때까지는 버텨야 하니까. 버스에서 질렌할과 나왔던 그 남자는 장갑도 안 끼고 그냥 손에 멕가이버 칼 하나 들고 광활한 사막으로 걸어간다.
불행하게 기내식을 먹기 전에 추락했다면 일단 뭐라도 먹어야지. 이 남자, 사막에는 좋은 단백질원이 많다며 엄청 잽싸게 도망가는 전갈을 잡는다. 전갈은 독이 있으니 꼬리인지 침인지 하는 부분만 떼어 씹어 먹는데 먹을 때 그 크리스피한 효과음이 죽여준다. 근데 이거 먹었다고 속이 부를 리가. 좀 더 먹어야겠다. 누구나 알고 있는 최고의 단백질원 굼벵이발견. 문제는 단백질이 너무, 지나치게 가득할 것 같다는 점이다. 통통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거 먹을 때 남자의 표정, 정말 기가 막힌다. 씹다가 퍽 하고 터진다. 표정이... 그냥 애벌레 씹은 표정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적절할 것 같다.
배가 부르고 말고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겠지? 슬슬 목이 말라질테니 사막에서 물 찾는 법을 배워보자. 어! 가다보니 죽은 낙타가 보이네? 남자는 멕가이버 칼을 꺼내 낙타의 가죽을 벗겨낸다. 나는 가죽을 벗기는 데 피가 안 난다는 건 이제 알았다. 가죽을 모두 벗기고 그가 죽은 낙타의 위를 잘라서 아직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부식물(?)을 양손 한 가득 꺼내 쥐어짠다. 물이 떨어진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물맛은.... 역시 표정이 말해준다. 물맛이야 이상하면 어때, 그래도 목숨은 살렸으니까.
그러다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려고 한다. 사막은 낮과 달리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 예전에 인도에서 사막투어를 했을 때 침낭에서 잤는데 추워서 담요를 돌돌 말고 침낭 안으로 들어갔었다. 아침에 보니 침낭 위로 이슬이 맺혀있었다. 생각해보니 침낭 정리할 때 새끼 전갈이 엄청 도망가는 것도 봤었다. (배고파서 억지로 먹었던 짜빠티 말고 그거를 먹었어야 했나) 근데 이 남자가 침낭따위 있을 리 없다. 그럼 새벽에 어떻게 자느냐... 바로 아까 벗겨둔 낙타의 가죽 안에 쏙 들어가서 자는 것. 보기만해도 엄청 따뜻해보이긴 하다. 물론 들어가기는 꺼려 질 것 같지만 일단 너무 추워서 잠을 못 자는 건 피할 수 있다.
이 에피소드 외에도 설원에서 생존하는 법, 아마존 정글에서 생존하기 등 정말 기상천외한 생존법이 많다. 한동안 재미있게 보다가 시들해졌는데 우연히 그의 자서전을 발견했다. 그의 이름은 Bear Grylls (Bear는 누나가 지어준 별명으로 실명은 에드워드). 근데 이 남자, 그저 그런 상남자가 아니었다. 영국 정치가 집안에 (영국 귀족 자제들까지 보내려고 한다는) 이튼 스쿨을 졸업했고, 세계 최고의 영국 특수 부대 SAS에서 복무했다.
그가 그렇게 많은 성취를 한 이유가 빵빵한 집안, 학벌, 괜찮은 외모도 아닌 딱 하나, 끈질긴 도전. 징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단련하고 인내 끝에 인내, 쓰러지기 전에도 인내, 오직 인내 하나 뿐으로 모든 것을 이뤄냈다. 군대 훈련 중 낙하산 사고로 척추가 세 조각이 나서 의가사 전역을 한지 2년 후 세계 최연소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했다는 것만 봐도 그의 도전정신과 인내는 그의 가장 큰 자산이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것.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항상 나를 가로막는 나에게]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책 제목처럼 결국 내 가능성을 막는 건 강남에 못 살고, 평범한 부모님에, 나랑 다르게 잘난 형제도 아닌 그냥 나 자신이었다. 재밌는 건 나를 키우는 것 또한 나라는 것. 결국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넘어야 할 제일 큰 장애물은 나인 것이다. 오늘 어제의 나를 조금 넘고, 내일은 조금 더 넘으면 되는 거였다. 그러나 이게 제일 힘들지... 맨날 도서관에 박혀서 공부하고, 휴가도 겨우 가고 열심히 일하는데 ‘왜 이정도 밖에 못 돼있지’ 라고 생각한다.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현재는 제자리. 근데 문제가 바로 ‘나름’이었다. ‘나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어’하고 내 한계에 멈춘 지난 날의 편안한 어리석음이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엔 그렇게 와 닿지 않는 문장이다. 시작은 절대 반이 아닌 것 같다. 달성을 100으로 봤을 때 시작은 0.1%일 뿐이다. 시작은 누구나 하니까, 대신 0.1%를 1로 10으로 25로, 50으로 올리는 사람이 극소수이니까. 더운 날 얼음물에 손을 담그기는 쉬워도 오랫동안 참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베어에게는 인내, 끈기에 겸손함까지 있다. 어딜 봐도 ‘나 이렇게 많은 걸 한 사람이야’라며 뻐기거나 ‘좋은 일도 한다’고 으스대는 것을 찾기 힘들다. 오히려 자신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일 뿐이라고 한다. 요즘 SNS 신조어로 humbrag라는 단어를 봤다. humble(겸손함) + brag(자랑)의 합성어로 겸손한 척하면서 자랑하는 것을 일컫는 단어라고 한다. 다들 상대가 진짜 겸손한 건지 겸손한 척하며 자랑질하는 건지 정도는 다 안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는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정도 많은 걸 이룬 사람에게서 진심어린 겸손함을 찾기란 어려운데 말이다.
쓰고 보니 이 사람을 너무 찬양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사람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이 남자의 끈기와 겸손함에 감동했다. 좋은 글이어서 제대로 된 서평을 써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읽으면서 시작은 잘 하나 끈기가 없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언제나 노력하고 도전하는 삶을 살도록 자극도 주었던 좋은 책이었다.
그가 에베레스트 정상을 120m 남겨둔 상황에 대해 ‘속도는 느리지만 전진은 전진이다’ 라는고 썼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행동했기에 나는 정상에 0.5cm 가까워졌음에 기뻐하면 되는 거였다. 그래도 충분했다. 내일은 1cm만 가도 어제의 2배를 가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