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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6 - 볼라뇨 20주기 특별합본판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송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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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뇨가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보여준 괴기스러운 이야기들이 몇곱절 불려져서 일종의 묵시록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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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위기 - 스웨덴 출산율 대반전을 이끈 뮈르달 부부의 인구문제 해법
알바 뮈르달.군나르 뮈르달외 지음, 홍재웅.최정애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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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으로서 서적을 제공받은 글입니다.)


1930년대에 스웨덴에서 나온 책으로, 우리에게 지금은 매우 익숙한 인구 절벽/저출산 문제를 처음으로 국가가 마주해야 할 위기로 강력하게 지적한 책이자, 마찬가지로 꽤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복지국가에 대한 구상을 제시한 책이기도 하다. 이렇게만 말하면 매우 진보적이고 긍정적인 이미지로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백 년 사이의 간극은 어떤 곳에서는 매우 좁고, 어떤 곳에서는 또 매우 넓다. 저출산 위기의 원인과 그 대처 방법-복지국가로서 국가가 해야 할 일 등을 이야기하는 곳에서는 매우 좁다. 반대로, 부적격자들의 중절수술 등의 우생학적 접근에서는 매우 넓다. 그런 점들을 감안해가며 이 책에 대해 정리하는 겸, 현재의 관련 연구를 찾아본 것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먼저, 당시 1930년대 스웨덴은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률 폭등과 신멜서스주의적 인구 변화 속에 있었다. 가정은 해체되고, 실직자들은 이민을 꿈꾸거나 반대로 해외에서 이민을 오려는 사람들을 막고자 하였고, 피임과 낙태는 뜨거운 감자로서 법적으로 금지되거나 규탄 받으며 멜서스적 인구 구조는 그가 의도한 보수주의적이고 도덕적인 어조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유럽이 사람들에게 국가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기 위해 복지국가 기획을 시작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스웨덴은 유럽 내 최악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로서 이 급격한 변화로 인한 피해를 줄이고자 하였다. 사회는 변화하는 가정 형태에서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했고, 마찬가지로 최대한 불평등을 줄이며 애매한 부적격자들이 사회에서 낙오되어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반사회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런 정책적 전환은 당시 스웨덴의 여러 문화가 반영된 것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인 접근-복지국가는 급진적인 제도 개혁을 막음으로서 오히려 불평등의 구조를 그대로 고착화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과 우생학적인 접근-국가는 물론 낙오된 자들이 그대로 최악의 길로 떨어지는 것을 막고자 하지만, 애초에 그럴 가망이 없는 이들은 '단절'시켜야 한다-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들을 제외한다면, 사실 한국은 생각보다는 이 <인구 위기>에서 지적하는 문제들을 상당수 해결한 국가다. 한국은-사실 동북아 국가들이 대체로 그렇지만-정말 심각할 정도로 사회적인 국가로, 모두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국가의 제도 내에 포섭되어 있으며 보육 시설 및 의료 복지, 교육 시설 등의 문제는 최저한도 이상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며 <인구 위기>를 보면, 현 상황에서 예상되는 문제 예견과 그 해결책이 꽤나 맞아 떨어져 오히려 약간 놀라울 정도다. 그렇다면 왜 한국은 반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을까?



최근까지의 사회경제적 분석들을 보면, 결국 문제는 전혀 다른 영역에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인구 위기>는 이 모든 변화를 결코 막거나 변경할 수 없는 상수로 보며, 이를 전제로 뒀을 때 최대한 피해를 막는 방법으로서 상술한 해결책들을 제시한다. 그 변화의 핵심은, 결국 사람들이 더 이상 결혼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은 00년대부터 저출산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정책들을 시행해왔으며, 이는 유배우(기혼) 출산율을 유지시키는 데에 상당한 효력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유배우 비율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인구 위기>에서 말했듯, 자신의 생활 형편을 떨어뜨리는 결혼과 출산을 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은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하는 고학력/고소득 인구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문제인데, 저학력/저소득 인구의 결혼 및 출산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근현대 변화 과정과는 별개로, 이상의 정책들이 저들에게 어떤 인센티브도 주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이민의 문제도 주목할 만하다. 이따금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문제로 해외 인력을 수입하는 이야기가 자주 들리곤 하는데, 이민의 효과는 대중적으로는 정반대 효과를 줄 확률이 높다. <인구 위기>에서 지적하듯 국내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 경쟁력을 낮출 해외 이민자들을 최대한 막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 연구 결과는 이민 배출국에서는 일반적 불평등이 감소하고 노동 경쟁력이 상승한 반면, 이민 수용국에서는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저출산 및 인구 절벽이 '무엇 때문에' 문제가 되는가를 생각하면, 사실 이 해결책은 오히려 국민 입장에서는 최대한 막고 나서야 할 최악의 방향인 셈이다. 이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정량적인 차원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무언가 보다 추상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문제라는 걸 역설하는 듯싶다.



스웨덴이 이 상황을 극복한 것은 사실 제도 자체의 효과는 꼭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이 제도들을 통하여 국가가 제시하는 어떤 긍정적인 전망,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느끼는 어떤 고양감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활의 안정감이 그것에 기여하였을 수는 있지만, 안정감을 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 90년대에서 현재까지의 흐름을 통해 엿보인다. (아무리 우리의 생활 형편이 상대적으로 악화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IMF 외환 위기의 상황과 비교해 현재가 더 살기 힘들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이것은 매우 심리적인 문제에 가까울 것이다) 복지국가라는 기획 자체가 약간 회의적으로 수용되는 지금,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은 오히려 이 책을 단순히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토대로 바라보는 기회를 준다. 한국은 아마 이 기획의 장점을 최대한 유지하는 한에서, 그 이상의 새로운 국가 비전을 제시해야 할 테다. 그런 것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마 천천히 악화되는 생활 형편 속에서 그것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유지할 만한 빈국의 비전 속에서 안정점을 찾겠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보다는 나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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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 을유세계문학전집 125
버나드 맬러머드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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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인종 분류가 그렇듯(기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인종은 생물학적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회학적 분류에 가깝다) 유대인이라는 분류는 참 껄끄러운 문제다. 흑인의 피가 계보에 포함되는 이들을 흑인이라고 분류했듯, 유대인에 대한 분류 역시 이 막연하게 포괄적인 분류를 통해 가능했고, 현대에 와서는 유대인이라는 집단을 그런 기준으로 묶기에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계보에 유대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에도 유대교를 믿고 그 계율을 따름으로서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칭하는 이도 있고, 반대로 가족이 그렇지 않기에 자신이 유대인이 딱히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애초에 그런 인식 자체가 없는 경우도 빈번하다)



미국에서 수많은 '인종'들이 섞이며 그런 종류의 의식은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고, 유대인스러움이라는 속성은 특수성을 전제하지만 기실 보편성을 추구하는 무언가 괴상한 속성이 되었다. <점원>은 바로 그 유대인스러움에 대해서 파고들며, 유대인이 추구하는 신성한 윤리 의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카프카는 일찍이 <단식광대>에서 유대인적인 신성한 의식을 드러낸 바 있다. '나는 그저 내게 맞는 음식이 없었을 뿐이오' 하는 말로 대표되는 신성하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부는 그러나 현대인에게 도저히 윤리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비록 조너선 하이트와 같은 학자들이 윤리의 폭을 좀 더 포괄적으로 넓히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일반적인 이야기는 아니니 만큼 말이다) 대신, <점원>이 다루는 유대인의 윤리성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그것이다.



<점원>은 진정한 유대인인 모리스가 마찬가지로 진정한 유대인 프랭크를 빚어나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다와 헬렌은 비록 유대인이지만 피상적일 뿐이고, 모리스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윤리성과 죄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 삶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고, 고통은 그저 고통스러운 것일 뿐이다. 헬렌은 <점원>에서 프랭크의 안티테제 같은 인물인데, 태생적으로 유대인이고 유대인스러움을 체득할 수 있지만 결코 그러지 못하며, 무언가 신성한 것을 꿈꾸지만 기실 그녀가 꿈꾸는 것은 매우 속물적인 환원일 뿐이다. 프랭크에게 책을 들려주며 읽어보라고 했던 그녀는 이후 프랭크에게 "당신은 그 책을 이해하기는 한 건가요?" 하는 질문을 받는다. 그녀는 그 책들, 그녀가 받았고 더 받길 원하던 교육에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 프랭크는 비유대인으로 태어나, 죄를 저지르고, 수난을 받고, 그가 본받아야 할 유대인스러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나가며 비로소 유대인이 된다.



사실, <점원>에서 짚는 유대인스러움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학에서 WEIRD(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Democratic)라고 불리는 집단의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현대 서구의 감수성은 그들의 조상에게도 꽤나 낯선 것이고, 아마 이런 방식을 통해서 그들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조금씩 잡아나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홀로코스트가 현대에서 온갖 전제들을 설명하기 위한, 반드시 피해야 할 어떤 파국의 예시로서 등장하는 것도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모두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어떤 책이 떠오르는 캐치프레이즈처럼) 식의 말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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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심장 가까이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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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것이 문학인가? 만약 문학이 글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문학은 아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글쓰기를 통해서 무언가를 표현하려 하고 있지 않다. 외려, 이것은 일종의 선문답과도 같다. 주아나와 오타비우라는 두 사람의 생각 속에서 피어나는 느낌들을 감각적으로 포착하여 늘어놓음으로서 독자가 이 감각을 자기 안에서 반추하다가 문득, 그녀가 느낀 무언가 신성한 것이 가슴 속에 차오를 수 있게끔 유도하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일까? 물론, 인격화된 신만은 결코 아니다. 비대해진 자의식 또한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오로지 부정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무언가일까? 리스펙토르는 그렇지 않다고 느끼고 있는 걸 테다. 그래서 이 무의미하고 비논리적인 감각들의 묶음 속에서 누군가는 분명 팟, 하고 자기 속에서 피어오른 그 신성한 것을 표현해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를 알려주기를.



서두의 <아버지……>는 이 글쓰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주아나는 <해와 나>라는 시를 짓는데, "'마당의 암탉들이 지렁이 두 마리를 먹었지만 나는 그 지렁이들을 보지 못했지.'"라는 내용을 들은 아버지는 당황스럽게 그녀에게 묻는다. 시 속에는 해와 주아나가 없는데 왜 제목이 <해와 나>인 것이냐고. 그녀는 바로 설명한다. "해는 지렁이들 위에 있고, 나는 그 시를 지었는데 그 지렁이들을 보지 못했으니……." 결코, 결코 그녀가 표현하고 있는 것 자체만을 봐서는 안 된다. 표현된 감각들은 그저 잔향에 불과하다. 문제는 다만 이 감각들을 우리가 읽고 자기 안에서 피워내고자 할 때, 어떤 것들이 이 감각을 피워내고 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리스펙토르는 배경만을 그려내고 있는 작가다. 너무나도 꼼꼼하게 그려, 우리가 그 여백과 지워진 행간으로부터 이 뒤에 숨겨진 신성한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읽고 있으면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생각이 든다. 무언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었을 텐데, 윌리엄 블레이크 역시 이를 결정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늘 실패한다. 광적인 희열과 자만에 가득 차 자신이 느낀 감각과 그 신성한 구조를 득의양양하게 표현하다가도, 결국 그것이 신성한 깨달음이 지나간 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리스펙토르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다만, 그녀는 이 결론을 선취한다. 느낌을 포착해 생각 속의 언어로 탈바꿈시키려고 계속 노력하면서 그 미끄러운 느낌에 손을 덧대고 있자니, 단지 미끄러져서 의식 깊숙히 숨어버리는 것 뿐 아니라 이 언어화하고자 하는 노력이 느낌을 덧칠하고 있음을 깨닫고 경악하며 손을 떼버리고 만다. 아니, 아니, 아니, 그것은 분명히 신은 아니다. 그것은 나는 아니다. 나는 나에게 기도를 올리며, 나에게? 하지만 그렇다면……



일전, <달걀과 닭>으로 리스펙토르의 글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G. H.에 따른 수난>을. 당시에는 그녀가 이 글쓰기를 통해서 대체 무엇을 표현하려 하는 건지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비로소 이해한 것 같다. 추정하건대, 리스펙토르를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첫 글로 접하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원래 전경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일 때, 누구나 그리 쉽사리 직접 여백을 채워나가지는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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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고고학 1990 - 상상과 우상 한국 팝의 고고학
신현준.최지선.김학선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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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대중음악 듣기에도 일종의 신비평이라는 게 있다면 믿을까? 물론 과장이 다소 들어간 이야기지만. 일반적으로 대중음악은 자연스럽게 그 시대적/지역적 맥락과 함께 수용된다. 2022년의 한국인이 뜬금 없이 1975년 프랑스의 음악을 듣는 일은 그리 없다는 뜻이다. 대중음악에 심취한 사람들은 많지만, 그런 사람들 역시 어떤 음악을 만든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과 만든 어떤 음악을 찾거나, 최근의 다른 음악을 찾거나 하는 식으로 두 경로 중 하나를 따르며 이동한다. 잡지나 라디오를 통하더라도 그러한 정보는 자연스럽게 태그처럼 따라오고, 이를 굳이 매번 환기시켜주지 않더라도 이를 알고서 전제하고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허나 다른 방식의 음악 감상도 있다. 가깝게는 RateYourMusic 등의 음반 평가 사이트의 장르별 추천 차트를 따라가거나, 멀게는 레코드점에서 아무런 음반이나 잡아 계속 쑤셔들으며 뭔가 흥미로운 게 나오기를 기대하는 방식 말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그 음반이 어떤 사회적 맥락을 갖고 있는지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음반이 나오기 전에 어떤 것들에게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때 이 '어떤 것들'에는 오직 음악만이 고려된다. 이 음반의 4번 트랙에서 특이한 코드 진행이 들어간 것을 보면 아마도 비슷한 코드 진행을 선보이는 A 음반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식의. 완전한 분석은 아니지만 취미로는 나쁘지 않다.


나는 후자 쪽의 음악 감상을 하던 사람이고, 지금도 방식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더욱이 자주 듣는 음반들이 상업적 성공을 크게 거뒀다고 보기엔 힘든 것들이라 소위 사회적 영향이나 그 전후 맥락을 크게 따질 만한 것이 없던 것도 한몫을 한다. 다만, 그래서 이러한 사회적 파급력과 당대의 일반적 청중에게 어떤 음악이 미친 영향과 그 음악이 문화 속에서 어떤 자리매김을 하는지 등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고도 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대중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 영향을 줄 때보다 대중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 경우가 많고, 그걸 감안하면 '대중적이진 않은' 대중음악이 아닌 진실로 대중적인 대중음악을 들을 때에는 좀 더 많은 점을 고려해야 할 테다.


<한국 팝의 고고학 1990>은 그런 점에서 내게 이 음악의 수용사 및 발전 과정에 대해 대략적인 지침이 되어줬다. 음반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이 음반들을 주로 향유하던 집단들이 어떤 문화적 동질성을 갖고 있었는지, 어느 음악가들이 어떤 식으로 서로 얽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사회는 어떤 식으로 변화했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읽으며 199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이 어떤 흐름을 거쳤는지 볼 수 있었다. 음악 자체에 대한 분석을 하는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제목의 '고고학'이라는 말에 더 가깝다. 수많은 사료와 실제 음반들, 그리고 인터뷰를 통해 이 십 년과 그 전후 맥락을 그려나가는 식으로 말이다.


약간 아쉬운 점은 그래서인지 9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 인디 음악에 대한 비중은 그리 많지 않다는 부분일까. 양준일 등의 댄스 음악이나 해외에서 베껴온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흑인 음악 등 개인적 관심사에서는 벗어난 것들도 많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에서 한 번 책을 다시 펼치고 그 흐름을 따라 평소에는 관심을 갖지 않으려 했던 음악들을 들어보고 있기도 하다. 나는 음악을 음악 그 자체로만 들었던 세월이 너무나 길어, 소위 '발췌독'으로 안 음악들을 실제로 들어볼 기회를 가진 게 기쁘다. 장필순이나 윤영배의 음악을 자주 들었으면서도 정작 그 음악가들의 관계에 대해 잘 몰랐고, 이들이 다른 음반에 "실질적"인 영향을 얼마나 줬는지 읽으며 실제로 듣고 비교해보는 즐거움도 한몫 한다. 잘 몰랐지만 들어보니 좋은 곡을 알게 된 것도 많기도 하다. (지금은 권혁진의 '날 울게 한 그대'를 듣고 있다.) 집에 두고 자주 들춰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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