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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브르 곤충기 5
앙리 파브르 지음, 김진일 옮김, 정수일 그림, 이원규 사진 / 현암사 / 2008년 9월
평점 :
파브르곤충기. 어려서부터 익히 제목은 알고 있던 책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대로 읽은 적은 없었다. 어린이용으로 부분 번역된 책이 많이 나와있지만 어린시절 손으로 잡아본 곤충은 잠자리와 메뚜기, 개미 정도가 전부이니 나의 관심 분야 밖이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유명한 고전이니 한번쯤은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도서관을 뒤적거렸지만 영 읽히지가 않았다.
그런데 작년 봄,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고 개미의 생태가 알고 싶어 대형서점을 찾았다가 <파브르곤충기1>부터 <파브르곤충기5>까지 5권의 보물을 발견했다. 첫번째 권을 펴드는 순간 놀랐다. 만화 느낌의 곤충 일러스트와 섬세한 곤충 사진들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뿐더러 지루함을 달래준다.
평범한 독자가 전문가의 번역을 평가한다는 것이 우습지만 곤충학자 김진일의 번역은 문장이 길지 않고 적당하게 끊어져 있어 매끄럽게 읽힌다. 또한 간간이 섞인 감탄어법이 내용과 잘 어우러져 파브르가 마치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듯 하다. 옮긴이의 말에서 “파브르의 생각과 의인화가 담긴 문학적 표현을 100% 살리기는 힘들었다기보다, 차라리 포기했음을 밝혀둔다.”고 했지만, 나는 곤충의 관찰 기록 사이사이 있는 파브르의 의인화한 표현과 철학적 사고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렇게 <파브르곤충기>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파브르의 곤충 연구에 대한 열정에 탐복하면서 1권과 2권을 읽고 몇 달이 지났다. 3권과 4권은 건너뛰었다. 책을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새해 들어 <파브르곤충기5>를 펼쳐들었다. 왕소똥구리, 스페인뿔소똥구리, 금풍뎅이, 매미, 사마귀에 대한 내용이다.
왕소똥구리는 마치 기하학자인듯 기막히게 아름다운 똥구슬을 빚어내고 그 안에 알을 낳는다. 알껍질을 벗은 애벌레는 제 집을 먹어나가고 그리고 허물을 벗고 번데기가 된다. 이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 파브르는 번데기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노란색 꿀 빛깔의 반투명한 번데기는… 이 상태로 굳어서 광물이 된다면 찬란한 보석 황옥이 될 것”이라고 했다.
부화해서 성충이 된 왕소똥구리가 경단을 뚫고 나와 햇빛을 받고 가만히 “아무 의식 없이 기쁨”을 누리고 있는 모습을 관찰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어떤 경이감이 느껴졌다. 노아가 홍수가 끝난 후 방주에서 나와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순간 무지개를 보면서 자신의 신을 떠올렸듯이, 여러 번의 과정을 겪고 성충이 된 왕소똥구리도 자신이 살아갈 세상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갖는 것이 아닌가.
물론 파브르가 곤충을 과도하게 인간과 유사하게 묘사하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파브르곤충기>는 곤충의 세계를 통해 인간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계기를 마련해준다.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다며 만물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교만과 욕심 가득한 인간에게 파브르는 경종을 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성애가 강한 스페인뿔소똥구리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 곤충은 알을 낳은 경단 옆에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경단을 지키며 보살핀다. 어미가 깨진 경단을 보지도 않았는데 이미 알고 경단을 수리하는 것을 보면서 “어미는 침묵의 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라고 파브르는 쓰고 있다.
지금보다는 곤충학이 발달하지 않은 150년 전이니 곤충의 감각기관에 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고 잘못된 지식을 얻게 될까 염려는 하지 말자. 역자는 註에서 소똥구리계열 대부분은 애벌레 때 발음기관이 있어 매우 작은 소리를 낸다고 설명해 준다. 곤충학자인 역자의 자상한 주석으로 전문성을 더하고 있다.
<우리곤충도감>(예림당, 2004)에도 뿔소똥구리에 대해 ‘모성애가 강하다’고 설명되어있다. 곤충도감을 찾아가면서 우리나라에 있는 유사한 곤충과 비교해가며 이 책을 읽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한여름을 지내고 죽는 매미가 땅속에서 여러 해를 보낸다는 것은 우리에겐 이미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곤충도감을 가까이 하지 않는 일반인들은 매미 애벌레가 그 긴 시간을 한 곳에서 끈질기게 기다리기만 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브르가 매미 애벌레의 땅 속 생활을 관찰하고 묘사한 것을 읽는다면 그 긴 시간을 참아내는 매미 애벌레의 영리함에 반하게 될 것이다. 매미 애벌레는 성숙해감에 따라 자리를 이동하기도 하고, 자기 방과 이어진 통로를 통해 바깥 기후를 파악하고 적절한 때에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5권의 반 이상은 소똥구리계열 곤충에 대한 것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5권의 하이라이트는 사마귀 관찰 기록 끝부분에 있다. 사마귀는 다른 곤충을 무섭게 잡아먹는 곤충이다. 어떤 종은 짝짓기가 끝나면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기도 한다. 그런데 막 알에서 부화한 새끼 사마귀는 개미들의 좋은 먹이가 된다. 개미들은 사마귀의 알집 밑에서 기다렸다가 새끼 사마귀가 알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먹어버린다.
파브르는 사마귀와 개미의 관계를 생태계 순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마침 파브르의 눈에 보이는 연구실 앞의 벚나무를 예를 들어 생태계의 순환 구조를 부연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사마귀 관찰 기록을 마친다.
“사마귀는 알을 1,000개나 낳는데 조금은 자신의 영속을 위한 것이고 많이는 다른 생물들의 전체적인 회식에 힘껏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다. ... 세상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순환이다. 모두가 다시 시작하려고 모두 끝내고, 모두가 살려고 모두 죽는 것이다.”
생명체들은 모두 다른 생명체의 희생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또한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체에게 줌으로써 세상이 유지되는 것이다. 미물인 곤충들도 이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자연의 순환 이치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데 현대의 인간은 다른 생명을 빼앗아 제 배 불리기만 급급하고 자연에 돌려주는 것이 거의 없다. 도시인을 생각해 보면 매일 다른 생명체를 먹지만, 매일 누는 똥 하나도 자연에게 돌려주지 못하고 깨끗한 물을 더럽히면서 버리고 있지 않은가.
이 책은 곤충생태에 관한 지식을 쌓는데도 훌륭하지만 찬찬히 읽어나가다 보면 인간삶의 행태를 되돌아보게 되고 자연의 이치에 거스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근본적인 삶인지 깨닫게 된다. 이렇게 좋은 고전을 훌륭한 완역본으로 만나니 너무나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