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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걸어온 자리 - 비우고 바라보고 기억하는 나의 작은 드로잉 여행
최민진 지음 / 책과이음 / 2024년 5월
평점 :
길을 따라 흐르며, 그 길 너머를 헤아리는 여정
세상에는 글이 주는 감동과 울림이 있습니다. 어떤 글을 읽으면 글에
담긴 이야기와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나도 모르게 울컥하기도 하고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합니다. 반면에
조금 느낌은 다르지만 그림이 주는 감상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글이 주는 이야기보다 더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메시지와 감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큰 시너지가 일어나면서 글과 그림이 주는 감동과 감성이 극대화됩니다. 글을
읽을 때 배경음악이 깔리면 분위기가 더 고조되듯이, 글과 그림이 함께 하면 글이 주는 메시지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이런 장르가 바로 '그림 에세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
<바람이 걸어온 자리>는 바로 이런 울림이 있는 그림 에세이입니다.
길 위에서 가만히 바라본 풍경
이 책 <바람이 걸어온 자리>는
저자가 우리나라 구석구석, 전 세계 여러 곳을 직접 가서 보고 느낀 것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여행기, 혹은 그림일기 같은 느낌이다. 세계 곳곳의 이름난 지역의 그림을
보며 글을 읽으면 마치 그 장소가 눈앞에 떠오르는 듯하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느꼈을 저자의 마음과
감정, 감상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마치 책을 읽으며
세계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 스위스의
루체른, 이탈리아 로마의 포로 로마노, 스페인 바르셀로나
대성당과 같은 명소들을 다녀온 느낌이다.
물론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와 명소도 좋지만, 그 길에서 마주친
이름 모를 카페, 이름 모를 거리에서 느꼈던 감상이 더욱 강렬하다. 결국
더 기억에 남는 건 그 길과 그 카페다. 저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에펠탑도, 센 강도, 샹젤리에도 좋지만 오히려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날 카페에
앉아 따뜻한 한 잔의 커피와 함께 바라본 그 거리가 더 생각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의 글과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떤 느낌인지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바람 불던 날
오후의 햇볕 쬐다
에펠탑에 이르니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 감싸며
거리를 바라본다.
나뭇잎 날리는 길에서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린다.
파리의 기억 속엔
센 강과 샹젤리제보다
그 카페가
그 거리가 있다.
<바람이 걸어온 자리> 중에서
기본적으로 글의 장르가 '에세이'라고는
하지만 책에 실린 글들이 마치 아름다운 시구절과 같아서, 산문이 아니라 운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시화(詩畵)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다. 글과 그림이, 마치 시와 그림이 어우러진
시화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운 책이다.
보통 그림 에세이나 삽화가 들어간 책의 경우, 글을 쓰는 작가분이
있고 그림을 그리시는 삽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가 따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책은 글을 쓴
작가와 그림을 그린 분이 같은 사람인지라 글과 그림이 주는 일체감과 공감이 유난히 크다. 꼭 맞는 옷을
입은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처럼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어서 글을 읽으면서 그림이 그 깊이를 더해준다.
나무와 돌담
마음을 씻고 여는
개심사 어귀 바윗돌 지나
연못 건너 산 안으로
심검당 뜰에 선다.
고요 가운데 지혜를 찾는 집.
들보 휘어 받치고
기둥 굽어 흘러
한 그루 나무 돌에 내린다.
지나는 이 쉬어 앉아
마음속에 한 둘 기와를 쌓는다.
나무 비추던 조용한 담길이
큰 돌 열어 맞닿고,
작은 돌 어울려 오르니
나지막한 담이 하늘을 연다.
<바람이 걸어온 자리> 중에서
글이 주는 힘을 배경이 되는 그림이 증폭시켜 주어, 글을 읽으면 글
속 그림 속의 바로 그곳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쓴 '차의 노래'를
읽고 있으면 산 속 조용한 사찰의 신비한고 평화로운 공기와 숲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쌀쌀한 계절에 따뜻하게 우려낸 향긋한 차 냄새가 나는 듯하다. 읽고 있으면 마음도 몸도 따뜻해지는
온기가 있는 글이다.
저자가 남긴 글과 그림을 통해 글 속 그림 속 장소로 가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시간을 넘어 역사 속 그 장소 그 시간으로 들어갔다 오기도 한다. '유배의 땅 '에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강진 유배길을 함께 따라 걷기도 하고, '낮은
슬픔'에서는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 보낸 마을에 들리기도 한다. '울돌목'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던, 울돌목 윗길을
휘어 걷다 돌아선다. '길의 연대표'라는 글에서는 문 닫힌
옛 나주역사에서 일제강점기와 광복의 시간을 들러 나온다.
차의 노래
일지암에서 초의선사는 차를 꽃피웠다.
다산과 추사와 벗하며
맑고 고운 땅 우리 차를 기렸다.
깊은 샘 들여
찻잎 푸르게 피어나니
한 잔의 맑은 세상이어라.
두륜산 대흥사에 이르러 솟을문 안으로,
겹겹의 문으로,
천불 흘러 봉우리로 오른다.
선과 차는 하나라
하나의 맛이라 하였다.
일지암 안으로 숲이 열린다.
<바람이 걸어온 자리> 중에서
저자는 이 책 <바람이 걸어온 자리>에서 글과 그림으로 장소와 풍경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일상과 풍경이 합쳐져 그 너머의 더 깊은 이야기들을 꺼내어 온다. 글과
그림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다. 지금까지 지나온 곳들, 가본 곳들의 이야기를 통해 아직 가보지 못한 곳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과거의 기록이지만 마치 미래를 향하는 메시지가 담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다.
저자가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가장 큰 키워드 중 하나는 '길'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구석구석,
전 세계 각지를 길을 따라 걸으며 눈에 담긴 풍경을 화폭에 옮기고 감상을 글로 남겼다. 그렇게
남겨진 글과 그림은 저자가 지금까지 지나온 길 위에 발자취로 남았다. 그리고 그 길은 저자가 지나온
뒤편을 넘어 그 앞쪽까지 연결된다. 그렇게 '길이 흐른다.'라고 저자는 표현하고 있다. 걸어온 길은 삶을 받아 안고 나아가고, 그 길 너머를 헤아리는 여정은 계속된다. 그렇게 모두의 길이 흐른다.
길이 흐릅니다
들판을 건너 긴 강을 따르고
문득 솟는 깊은 산 둘러
모이고 갈라지며 마을을 지납니다.
굽이 흘러온 길은 깊숙이 들어
먼 시간의 오랜 빛에
지금 여기의 빛을 더하며 나아갑니다.
오늘의 길을 나섭니다.
길 그 너머를 헤아리는 여정에서
바라고 향하며
갈림길에서 엉키어 돌아서며
보이지 않는 길을 에워 돌아 들어섭니다.
걸어온 길은 삶을 받아 안고 나아갑니다.
모두의 길이 흐릅니다.
<바람이 걸어온 자리> 중에서
이 책 전체의 마지막 문장이자, 저자가 책의 마지막에 남긴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인, "모두의 길이 흐릅니다."가
아마도 이 책 전체를 응축한 한 문장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걸어온 길을 글과 그림으로 남기고 그 이야기들을
통해 그 길 너머의 여정을 헤아리는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가 걸어온 길이 있고, 거기에 남은 글과 그림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쳐 온 길을 뒤로하고
우리는 또다시 오늘의 길을 나선다. 그렇게 오늘도 모두의 길이 흐른다.
이렇게 이 책 <바람이 걸어온 자리>는 저자가 글과 그림으로 남긴 여정을 보며 오늘 나의 길과 여정을 돌아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는 책이다. 한 해의 끝이 보이고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이 시기에 한 번쯤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리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