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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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1969년에 <말 더듬는 존재>를 발표하며 작가의 길에 섰다. 어린 시절 심하게 앓았던 두 차례의 자폐증과 68혁명의 열기, 실존주의 · 구조주의의 물결 속에서 에마뉘엘 레비나스 · 폴 리쾨르와 함께한 철학 공부, 뱅센 대학과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의 강의 활동, 그리고 20여 년 가까이 계속된 갈리마르 출판사와의 인연 등이 그의 작품 곳곳의 독특하고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18개월 동안 죽음에 가까운 병마와 싸우면서 저술한 <떠도는 그림자들>2002년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은밀한 생>, <로마의 테라스>, <뷔르템베르크의 살롱>,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등이 있다.

3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이슬란드의 혹한><메두사에 관한 소론>은 에세이,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동화다. 3편 다 언어논문 같은 현학적인 언어 탐구를 하고 있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줄거리는 이렇다. ‘디브라는 옛 마을에서 콜브린이 쥔느에게 혼약을 신청했는데 쥔느는 자신의 벨트와 똑같은 벨트를 짜오라는 조건을 걸었다. 콜브린은 결국 완성을 못 시켜서 절망에 빠진다. 마침 집을 방문한 영주는 사정을 듣고 쥔느의 것과 똑같은 벨트를 주고는 1년 뒤에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경우 데려간다는 계약을 제시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때문에 위기에 봉착한다.

글을 쓰다보면 작품처럼 사용할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애먹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 단어는 잊어버린 단어거나 어휘력 부족으로 아예 모르는 단어다. 언어의 기능 부전이 사람을 답답하게 만든다. 언어를 생활에 활용하려면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언어능력을 이용해 사용할 기의에 적절한 기표를 연상하고 단어를 모아 통사론적 구성, 형태론적 구성을 형성해 문장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일부분에 문제가 생기면 <메두사에 관한 소론>처럼 조상처럼 굳어진 자의 모습-갑자기 번쩍 들린 고개, 잃어버린 다너를 불러들이려고 긴장된 육체, 먼 곳으로 떠난 시선, 탈처럼 변해버린 얼굴-이 되는 것이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귀환을 거부하는 단어,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 단어, 입 주위에서 안개처럼 떠돌지만 정작 혀로 들어가 말이 되지 못하는 단어이다. 혀끝에서 맴도는 정도면 거의 완성되다시피 했는데 혀가 작동하지 않고 실패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공포를 준다. 그들의 업무자체가 단어를 현실에 불러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의 혹한>에서 불레즈는 얼음 덩어리로 변한 커피 아이스크림을 칼로 찍는다. 그럼에도 덩어리는 끄덕도 안했다. 얼음 덩어리는 덩어리 상태로 저장된 것들 중에서 단 하나의 정보를 선정, 추출, 소환, 복귀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능 부전의 메타포이다.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얼음 덩어리 앞에서 일시 정지된 칼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고정된 시선과 경직된 자세로 빠져나가는 단어를 향해 두 손을 내밀어 애원하는 비굴한 자가 된다. 언어의 기능 부전의 원인은 기억력이다. 아는 단어를 망각하니까 머리에 생긴 기의가 단어가 되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 망각은 글 쓰는 사람들의 불치병이다. 과학이나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기억은 두뇌에 저장된 데이터가 아니라 망각에서 선별되어 보유하는 것이라고 한다. 원래 기억도 망각했어야했다. 두뇌가 자체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그렇기 위해서는 두뇌에게 기억하려는 정보가 중요하다고 계속 어필해주어야 한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시간을 들여서 어필하는 일이 암기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은 단어에 대한 관심이다. 여러 책을 통해 다양한 단어를 접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데 시간을 들여야 한다. 글쓰기는 산란하기라고 한다. 연어가 모천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 마지막에 죽음을 맞이하듯이 필사적이어야 한다. 글쓰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는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고 익숙하지만 사실 언어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활동은 고등생물만의 전유물이다. 인간의 특권이자 시련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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