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낚시통신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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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은어를 문장으로 사용하는 은어낚시통신이라는 집단에게 초대장를 받는다. 남자는 삼 년 전, 사진기자 시절에 육체관계를 맺었던 싸구려 모델을 회상한다. 그리고 초대장을 따라 한 여자를 만나고 정체불명의 지하공간으로 이동한다.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은 난해한 문장과 의미 때문에 어려운 작품이다. 작품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남자는 누구인지, 그들이 어디를 갔는지, 그곳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어서 독서에 힘이 들었다. 사전이나 철학서를 뒤적거리며 문장의 의미를 이해해보려고 최대한 노력은 했는데 많이 부족했다.

전체적으로 모호함과 낯선 감각이 뒤섞인 기묘한 분위기에 남성이 한 여인과의 은밀한 만남, 지하공간의 비밀모임처럼 미스터리한 소재를 사용했다. 문장은 미학적이면서 현대적이다. 특히 유채꽃의 바다에서 그녀와 나는 아무 뉘우침도 약속도 없이 급기야는 하나가 되어 달빛이 끄는 대로 조수처럼 떠내려갔다.’라는 문장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은어는 어릴 때 바다로 나갔다가 고향하천으로 되돌아오는 생물이다. 안도현의 <연어>를 읽었을 때 귀소성 생물의 회귀본능이 매우 신기했다. 작중에 설명해주는 태양 컴퍼스라는 과학적 방법을 이용해 항로를 찾는다는 방식은 생명의 신비를 파헤치기 위해 연구가 많이 필요할 것 같다.

작품의 스토리는 남자가 한 마리의 연어처럼 거슬러 가는 이야기다. 중요한 제재가 회귀인데 내가 회귀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구절인 니체의 영겁회귀다. 제목의 의미가 생은 원의 형태를 띠며 반복되기 때문에 개인의 존재는 일회적이고 가볍다는 뜻이라던데 과연 생은 원형인가? 세계는 반복되는가? 에 의문이 생긴다. 자연과학에서 열역학 제 2법칙에서 고립계의 엔트로피는 증가만 하므로 우주 전체를 통틀어 영겁회귀는 부정된다. 실제 생활에서 회귀를 체감할 기회가 없어서 그런지 회귀는 이상적인 단어로 느껴진다. 그런데 문학이나 예술, 과학 분야에서 회귀에 대한 관심이 많다. 인간 또는 세계의 근원에 대한 탐구의 한 방법으로 회귀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CERN의 반물질 연구나 LIGO의 중력파 연구는 우주의 시작인 빅뱅으로 회귀하는 탐구였고 예전에 읽었던 김숨의 <뿌리 이야기>는 인간의 근원에 대한 단편소설이었다. 작중에 회귀는 시간의 역행을 통해 이뤄진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 남자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는 작품인데 두 작품의 방법이 비슷한 부분이 있다.

주인공 남자는 외로움을 가진 인간이다. 집근처에서 산 저녁거리, 외등 불빛의 서글픈 빛, 자신의 그림자를 밟는 걸음걸이, 땅을 잃은 호피인디언 등 쓸쓸한 정서의 소재가 사용되었다. 남자에 대한 특징적인 구절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생멸해간 흑인 가수의 고적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세상의 아주 외진 곳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진저리를 쳤다.’이다. 남자의 반복되는 소소한 삶에서 생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 같다. 여자는 그를 죽은 시신, 사막 같은 남자, 상처에 중독된 남자라고 표현했다. 여자가 대놓고 냉동 시체라고 했고 남자 스스로도 자기가 탄 차를 장의차라고 불렀다. 시신은 보통 땅에 묻게 된다. 고대 철학자들은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땅을 만물의 어머니로 불렀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태초의 어머니이고 영어로 지구를 Mother Earth라고 부르게 된 개념이 고전적 사고에서 나왔다. 아마도 시신이라는 표현은 남자가 정체불명의 장소로 가는 과정이 시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 생명이 생명의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귀소로 보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이 과정은 존재의 죽음과 같다.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남자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남자를 포함한 여자를 따라 간 곳은 현실적 세계로 보기 힘든 언더의 장소다. 지하공간이나 페인트로 덮여진 자동차에 그린 그림은 현실에서 접할 수 없는 것이다. 자동차에 그린 그림을 보려면 페인트를 벗겨내고 지하공간을 알기 위해서 현실에서 지하 속으로 들어가야 하듯이 남자는 죽음의 과정을 통해 자아를 상실 들어온다. 그곳에서 남자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느낀다. 은어낚시통신 집단은 삶에 뿌리박지 못한, 삶으로부터 거부된 사람들로 남자와 비슷한 처지다.

작품에서 하이데거의 사상이 많이 드러난다. 남자의 죽음을 암시하는 표현은 남자를 죽음에 대해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죽음을 향한 존재인 현존재로 나타내고 있다.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이 구절은 남자가 느끼는 불안이다. 하이데거는 세계 안에 있는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세계 내 존재라는 사실에 의한 현존재의 불안 속에서 유한성과 무력함이 알려진다고 했다. 이로써 현존재는 죽을 운명인 존재임을 알게 되고 죽음에 속한다는 전체성을 지향하게 된다고 한다. 후반부에서 남자의 무력한 태도가 연관이 있다. 그리고 남자가 자신의 있는 낯선 곳을 삶의 사막에서, 존재의 외각으로 표현했는데 하이데거가 만든 용어인 바깥에 서있는(ek-sistierend)’을 인용한 것이다. 인간은 존재 자신에 의해 존재의 진리로 던져져 탈자 상태가 되어 존재의 열린 자리에 서게 된다. 지하공간은 잃어버린 존재들의 공간인 듯하다.

존재는 문학과 철학에서 자주 다뤄지는 개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 토마스 아퀴니스의 존재론,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 등 존재가 무엇인지 사상에 따라 정의가 달라서 특정해서 말하기 어렵다. 존재의 시원은 무엇일까? 존재자가 비존재자가 되었을 때 가는 저승? 우주의 시작점?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존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려운 질문들은 인간의 머리로 알 도리가 없다. 존재에 대해서 사유하고 고찰하는 문학가들과 철학자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남자는 마지막 자신이 낯선 곳에 있음을 지각하고 꿈에서 깨어나려는 듯 여자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정신은 기억을 거슬러 회귀한다. 삼년 전, 제주의 밤바다에서 1967년 울진 왕파천으로, 그리고 마지막 원래 있어야만 하는 장소로 가려는데 여자가 흐느껴 운다. 결국 원래 세계로 돌아오고 다른 세계에 있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는다. 차가운 손을 잡았다는 부분은 살아있는 사람이 송장의 손을 잡은 것처럼 서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 같다. 결국 여자는 지하공간에 남자는 현실로 원래 있어야할 곳으로 가서 헤어졌다는 쓸쓸한 결말인데 그 다음에 또 은어낚시통신에서 초대장이 날아온 걸 보면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암시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존재로 가는 길은 언어를 통해 열리며 기술은 존재가 자신을 드러나도록 하는 특정한 역사적 방법이라고 한다. 언어는 의식과 사고를 더불어 존재를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작가의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존재를 경험할 수 있기에 독서는 인간을 탐구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은어낚시통신>에서 나의 부족한 점을 많이 느꼈다. 독서경험을 늘리고 철학적 사고력을 증진하는데 좀 더 힘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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