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새움 세계문학전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장현주 옮김 / 새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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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것은 슬프다. 해가 지는 순간, 젊음이 저물어 가는 순간, 삶이 저물어 가는 순간... 사양길로 접어든 모습들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은 속이 절로 쓰려오게 만든다. 필사의 노력으로 물불 가리지 않으며 오른 정상에서 더이상 올라갈 곳이 없이 내려오는 일만이 남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 길이 조금이라도 힘들지 않을까. 아마 알고 있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손에 쥔 익숙한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저물어 가는 것은 슬프기만 하다. 붙잡고 싶은 마음, 그저 머물고 싶은 마음. 



아아, 돈이 없다는 것은, 이 얼마나 무섭고 비참하며 구원 없는 지옥인가, 라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닫는 기분에, 가슴이 벅차고 너무도 괴로워서 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다. 인생의 엄숙함이란 이런 때의 느낌을 말하는 것일까, 꼼짝할 수 없는 기분으로, 똑바로 누운 채, 나는 돌처럼 가만히 있었다.


 

이 작품은 초판 발행 부수만 1만 부, 2판 5천 부, 3판 5천 부, 4판 1만 부를 거듭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다자이 오사무를 일본의 대표 작가로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전쟁후 혼란스러운 시대적 상황에서 몰락해 가는 상류계급 사람들을 가리키는 ‘사양족’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고, 국어사전에 ‘몰락’이라는 의미를 더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생가인 기념관은 이 소설의 제목을 따서 ‘사양관’이라 이름 붙여지기도 할만큼 <사양>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랑, 이라고 쓰고 나니, 뒤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아직도 귀족이라는 허울에 둘러싸여 귀부인으로 살다 죽어가는 어머니, 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민중으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결국 마약과 술에 절어 자살하는 나오지, 역시 마약과 술에 중독되어 퇴폐적인 생활을 하는 나오지가 따르는 소설가 우에하라, 그리고 사랑과 혁명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임을 인식하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가즈코. 소설은 가즈코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몰락한 귀족인 가즈코의 집안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도쿄의 저택을 팔고 하녀들도 모두 내보낸채 시골로 내려와 살게 된다. 귀부인의 자태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피는 가즈코지만 어머니는 병으로 결국 죽게 되고 나오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채 스스로 자살하게 된다. 가즈코가 첫번째 만남에서 우에하라에게 사랑을 느끼고 두번째 만남에서 맺은 관계로 임신을 하지만, 우에하라 역시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홀로 남게 된 가즈코는 이혼녀에 미혼모라는 험난한 상황을 맞이하지만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며 살아가고자 한다. 



6년 전 어느 날, 저의 가슴에 아련하고 희미한 무지개가 걸렸는데, 그것은 연애도 사랑도 아니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무지개의 색채는 더욱 선명해져서,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것을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소나기가 걷힌 하늘에 걸린 무지개는 이윽고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만, 사람의 가슴에 걸린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는 듯합니다.


 

가즈코의 생각이 처음엔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한번의 짧은 만남에 연정을 가지고 그 사랑으로 힘든 상황을 버텨내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비록 약한 존재지만 의지하고 사랑했던 어머니의 죽음과 남동생의 자살, 게다가 몰락한 귀족으로 더이상 돈도 없어 물건을 팔아가며 연명해야 하는 상황. 가난이라는 높은 벽과 가족의 죽음이라는 절망속에서 가즈코가 버텨낼 수 있었던건 우에하라에 대한 사랑과 그로인해 가지게 된 아이였고, 이혼녀와 미혼모라는 지금 시대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상황이 되었음에도 그로인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힘을 얻게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래도 어쨋든 그녀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강한 의지를 보이며 소설이 끝나기에 비록 제목은 <사양>으로 저녁 때의 햇빛을 일컫는 말이지만 주인공인 그녀만은 저물어 가지 않는 떠오르는 희망의 빛을 찾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놓아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추악한 짓들을 저지르면서까지 부와 명예를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런면에서 가즈코는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려 노력하고 목표와 대상을 분명시하여 자신만의 의지할 대상을 만들어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만드는 당당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비록 우울한 소설속 상황과 시대속에서도 일말의 희망적인 메세지를 우리에게 던져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무언가 이 사람들은 잘못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내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내야만 한다면, 이 사람들의 이 살아내기 위한 모습도, 미워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는 것. 아아, 그것은, 그 얼마나 견딜 수 없고 숨도 곧 끊어질 것 같은 대사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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