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 자화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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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부터 난 신을 믿지 않았다.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맹목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존재인 신의 실체를 만난적이 없기에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허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믿음이 생길리 없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가끔 마음을 비워내고 싶거나 어딘가에 털어내고 싶을때 가끔 절을 찾긴 하지만 절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진 않다. 종교에 기댄다고 해서 내 삶의 고통이나 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희망이나 기대도 가지지 않는다. 어차피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해야 하고 그 결과 역시 내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임을 떠넘기거나 원망하고 싶지 않다. 사실 그건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편한 방법이지만 살아가다 보면 그런 방식의 삶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고, 스스로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다. 



모든 사람은 같은 협곡에서 나오고, 같은 어머니와 같은 유래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같은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마다의 시도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허나 자신이 지닌 의미에 대한 해명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데미안>은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다. 1919년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창작에 임한 헤르만 헤세는 사실 처음 <데미안>을 출간했을 때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책을 출간했다. 그 당시에 이미 대문호로 불리던 헤세는 작가로서 자신의 소설이 작품성만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헤세의 작품임이 확인되고 다시 헤세의 이름으로 발간되었다고 한다. 작가들이 필명으로 전혀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경우는 많다. 특히 이미 유명한 작가라면 네임밸류만으로도 작품성과는 상관없이 화제가 되고 좋은 평가를 받곤 한다. 헤세라는 이름 없이도 충분히 작품성을 인정 받은 <데미안>은 그런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과 그당시 전쟁으로 인해 지친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절망적인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며 암울한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을 던져주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거야. 그런데도 그 사람이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건 자기를 지배하는 힘을 그 누군가에게 내주어버렸기 때문이야.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싱클레어는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라는 평화롭고 따뜻한 세계만을 경험한 그는 어느날 또래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도둑질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게되고 그로인해 프란츠 크라머에게 빌미가 잡혀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그 일을 계기로 싱클레어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따뜻한 세계 이면의 또다른 사회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싱클레어는 크라머로 인해 매일을 두려움과 고뇌에 빠져 지내게 된다. 그러던 중 전학생 막스 데미안을 통해 크라머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고 데미안을 통해 새로운 시각과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던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지만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을 통해 다시 모범적인 생활로 돌아가게 되고 꿈속에서 본 여인을 그림으로 그려 데미안에게 보낸다. 데미안에게 받은 편지에 써있던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한다.” 라는 내용을 통해 아프락사스에 대해 알게 되고 아프락사스를 통해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스승과 제자처럼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피스토리우스와도 멀어지게 되고 그로인해 그림에 몰두하게 된 싱클레어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신비로운 사람 그림을 그리며 그 인물에 심취하게 된다. 그러던 중 데미안을 우연히 다시 만나고 그의 집에서 데미안의 어머니와 만나게 되는데 자신이 꿈에서 본, 사랑했던 여인이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임을 알게 된다. 그 집을 드나들며 에바부인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1차 대전으로 인해 그들과 헤어지게 된다. 데미안은 전쟁에 나가고 싱클레어 역시 전쟁에 나가 부상을 입게 된다. 부상 당한 병사를 치료하는 곳에서 그의 눈앞에 데미안이 나타나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계속 되지만 그는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발견하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깨달은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는 단 한 가지 그것 말고는 아무런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면을 견고히 하며, 그 길이 어디를 향하든지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더듬어 나이가는 일. 그 이외의 다른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선과 악이 존재할까? 해가 뜨면 달이 지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듯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해서 그 이면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님에도 우리들은 단지 눈에 보이고 자신이 속한 그 세계만이 전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싱클레어가 자신이 속한 따뜻한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는 일련의 과정속에 데미안이란 존재는 절대적이다. 처음 데미안을 본 순간부터 그는 데미안에 끌리게 되고 그를 통해 점점 자신의 진짜 내면을 알아가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모습으로 변하며 끝을 맺는데 사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데미안은 죽었다는 건가? 싱클레어의 상상으로 끝나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찬찬히 다시 읽어나가고 생각하다 보니 결국 데미안이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싱클레어 자신이었고 그의 참된 자아가 데미안이라는 인물로 표현되어 그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싱클레어는 절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 시대에 신이란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종교에 대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잣대가 아닌 선과 악이 공존하는 아프락사스라는 신을 말하며 신보다 인간을 중요시한다. 신에게 의지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은 자신이 이끌어 가야 하고 자아를 찾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한다. 새가 힘겹게 알을 까고 나오듯 자신만의 세계를 찾기 위한 과정은 절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이 두려워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만들어둔 세계에 갇혀 영원히 종교든, 신이든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다. 싱클레어가 긴 시간을 돌아 자신만의 자아를 찾을 수 있었듯, 우리 역시 스스로 치열하게 고뇌하고 부딪히며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가야 한다. 살아가며 마주하게 되는 삶의 모순을 이겨낼 수 있는 힘 역시 스스로에게 있다. 부모로 부터 물려 받은 환경과 신앙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데미안을 읽으며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모든 교파와 모든 구제론은 이미 오래 전에 죽어 버려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가 유일하게 의무로 또한 운명으로 느꼈던 것은 다만 각자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완전히 자기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의지에 뒤따르며 불확실한 미래가 초래하게 될지도 모르는 온갖 일들에 대해서 스스로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느끼도록, 순수하게 살아간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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