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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비밀과 거짓말 - 서양 음악사의 잃어버린 순간들
유윤종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0월
평점 :
이 책을 읽으며, 몰랐던 사실을 꽤 많이 알게 되었다. 이를 테면 '카르미나 부라나'의 작곡가로 유명한 칼 오르프가 작가 루이제 린저의 남편이었다는 사실. 히틀러의 죽음을 가장 먼저 알아맞힌 사람이 '서양미술사'의 그 곰브리치였다는 사실. 핀란드의 국민 영웅 시벨리우스가 알고 보면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사실 등.
그러나 역시 내 흥미를 잡아 끈 것은 뭐니뭐니 해도 음악과 관련된 기술이었다. 그 중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먼저 차이콥스키의 죽음에 얽힌 일화. 차이콥스키의 사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콜레라에 의한 죽음인지, 비소를 삼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그의 염세적 세계관을 집약한 '비창'을 들어보면 그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든, 당시 차이콥스키가 상당한 절망에 휩싸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차이콥스키의 자살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차이콥스키의 죽음이 콜레라에 의한 우연한 일일지라도, 그 자신이 언제 죽음이 다가올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비창'은 차이콥스키가 그 자신의 염세적 세계관과 개인적 슬픔을 집약해 쏟아 넣은 '음악적 유서'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p.29)
이 책이 유익한 건,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차이콥스키의 죽음을 '음악적으로'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차이콥스키가 1악장 전개부에 진혼 성가의 선율을 썼고, 서주부에서는 '비탄과 슬픔의 음형'으로 통하는 '탄식의 베이스'를 썼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그가 남긴 음악에서 죽음을 읽어낼 수 있도록 하는 식이다. 또 제2주제로 들어가면 7개의 8분 음표가 천천히 하강하는 이른바 '하강 7음'이 나오는데, 저자는 이것이 차이콥스키가 지치고 고독할 때 즐겨 썼던 전매특허 선율이라고 밝힌다. 이를 통해 우리는 차이콥스키가 '비창'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
8분 쉼표 하나에 이어 일곱 개의 8분 음표가 천천히 하강하다가 끝이 살짝 들리듯 다시 올라가는 주제다. 이런 선율은 차이콥스키의 팬들에게 낯설지 않다. (…) 비슷한 선율을 가진 작품에 대해 연관된 모든 텍스트가 "나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괴롭고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p.27)
과거 오페라를 얕게 공부하며, 오페라의 상징성에 흥미를 가진 적 있었는데 (등장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음을 다르게 사용한다거나) 그때가 떠올라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음악 속의 암호' 부분도 흥미로웠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곡 안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나 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숨겨두었던 작곡가들의 이야기. 슈만과 브람스가 이런 식으로 작품 속에 의미를 담았고, 쇼스타코비치 역시 자기 이름을 독일어식으로 표현한 D-S-C-H를 여러 곡에 녹였다. (나 역시 책에 나온 프랑스식 음이름 암호법으로 내 이름을 음렬 변환 해 보았다.)
슈만을 깊이 경모하고 본받았던 브람스 역시 슈만 못지않게 작품 속에 특정한 의미를 숨겨 넣기를 즐겼다. 가장 알려진 것으로는 '브람스의 모토'로 알려진 F-A-E(자유롭지만 고독하게)를 들 수 있다. 이 세 개 음의 동기는 원래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이 자신의 표어로 즐겨 입에 올리곤 했다고 전해진다. 요아힘과 친했던 스승 슈만도 이 세 개 음표의 동기에 의한 'F.A.E 소나타'를 1853년 작곡한 바 있다. (p.98)
살리에리의 진면목도 보았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아들부터 베토벤, 슈베르트, 심지어 리스트까지[!] 가르쳤다는 것을 알고 계셨는지? 저자는 모차르트 사후 아내 콘스탄체가 둘째 아들 프란츠 크사버를 살리에리에게 보내 음악 교육을 받도록 했다는 사실부터, 살리에리의 음악적 재능까지를 두루 언급하며 이 음악가에게 붙은 오명의 조각을 하나씩 떼어내 준다. (물론 이 역시 '해석'이기에 소위 '아마데우스식 관점'을 유지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모차르트가 부인 콘스탄체에게 보낸, 오늘날 남아 있는 마지막 편지는 모차르트에 대한 살리에리의 호의와 애정을 분명히 보여준다. "내가 살리에리를 '마술피리' 공연 극장으로 데려갔지. (…) 살리에리는 주의를 집중해 감상했고, 서곡에서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한 부분도 빼놓지 않고 '브라보! 아름다워!'를 외쳤어." (p.144)
전반적으로 매우 즐겁게 읽었지만, 알마 말러에 대한 저자의 서술은 약간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구스타프) 말러뿐 아니라 발터 그로피우스, 클림트 같은 어마어마한 인물과 사랑에 빠졌던 여자이니 그에 대한 뒷말이 무성한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평가가 필요 이상 박한 듯하여. 자유롭게 사랑하고, 틀에 얽매이지 않았던 분방한 알마를 시대가 어떤 식으로든 갉아먹었을 것을 생각하면 그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피츠제럴드와 젤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젤다는 피츠제럴드의 아내로 '규정되는' 내내 여러 가지 이유에서 악녀로 불렸지만, 후에 피츠제럴드 못지않은 재능을 소유한 문장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재평가되는 중이다.)
알마는 자신의 남편과 연인 들을 한때나마 진정으로 사랑했을까. 그가 죽기 전 작가 엘리어스 카네티에게 했던 말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는 두 번째 남편인 그로피우스를 회상하며 "그는 진짜 아리아인이었고 인종적으로 나와 맞았던 유일한 남자다. 나와 사랑에 빠진 다른 사람들은 말러처럼 작은 유대인이었다."고 말했다. 유대인 천재 예술가 두 명과 결혼했고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여인이 나치 인종주의자와 다름없는 발언을 한 것이다. 이처럼 부박하고 편견에 가득 찬 것으로 밝혀진 그의 정신세계는, 알마에 대해 일말의 공감이라도 간직했던 사람들이 그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든 '불편한 진실'이었다. (p.163)
책을 읽으며 레퍼런스가 되는 음악을 찾아 듣는 것도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이제 나의 최애 중 하나, 스메타나의 '블타바'를 들으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