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에 미쓰비시 탄광에 강제징용된한 퇴직 교사의 자필 회고록!

이 수기에는 노예와 같이 취급받아야 했던 징용 피해자들의 비참한 삶,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민중으로서의 고통과 설움, 생사의 갈림길에서 느끼는 한 인간으로서의 본원적 욕구,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행간마다 잘 묻어 있습니다.

역사는 냉정히 말해 "기억투쟁입니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후안무치가 계속될수록, 지난날아프고 시린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노력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러나 피해자의 경험과 기억이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갖는 일임에도 현실은 녹록지 않은 상황입니다. 아직 생존해 있는 피해자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구십을 훌쩍 넘어 병마에 신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제국주의 실상을 기억할 수 있는 세대마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이 때, 아무쪼록 이 수기가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피는 데 귀한 역사적 자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발간사 중에서

이상업 
1928년 12월 18일 전남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살이던 1943년 9월 징용 영장을 받고 일본 후쿠오카현 가미야마다 미쓰비시 탄광에 끌려가 굶주림과 폭압 속에 지하 막장에서탄을 캐는 광부로 강제노동을 겪었다.

연이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뒤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세번째 시도 끝에 탈출에 성공해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1948년 영암남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영암초등학교와 금정초등학교 등을거쳐 1994년 덕진초등학교 영보분교 정년퇴임까지 군복무와 영암군청 근무를 제외하고 33년 동안 교사로 재직했다. 

서예와 그림 솜씨가 뛰어나학생들을 지도하고 각종 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1951년 결혼하여 3남2녀를 두었으며, 현재 월출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고향 영암 망호리에 살고 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2009년 3월 광주에서 결성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던 여자근로정신대 문제를 한국사회에 알리는데 노력해 왔다.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2012년광주를 시작으로 전남, 서울, 경기, 인천, 전북 등 지방자치단체에서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지원 조례가 제정될 수 있도록 앞장서왔다.

2015년 7월에는 군함도 등 일제 강제 징용 시설이 유네스코 산업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독일 원정활동을 펼치는 등,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회복과 역사정의를 위해 지속적인 목소리를 내 오고 있다.

몸은 춥고 배는 고팠다. 목적지까지는 얼마나 남았을까. 

지금쯤 우리집에서는 아침밥을 먹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일찍 눈 뜬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귓속말로 소곤대고 있었다.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처럼 집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들의 표정도 역시 밝을 수는없었다.
- P17

화물열차임에도 열차는 엄청난 속도로 달렸는데, 그것만으로도 일본이 강대국으로서 우리나라보다 산업 발전이 월등히 앞서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긴 터널을 지나 열차는 쉼없이달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터널은 일본에서도 꽤 유명한 간몬터널이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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