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생각하기 - 손과 몸을 쓰며 사는 삶이 주는 그 풍요로움에 대하여
매튜 크로포드 지음, 윤영호 옮김 / 사이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손으로, 생각하기

매튜 B.크로포드 / 사이

 

- 손과 몸을 쓰며 사는 삶이 주는 그 풍요로움에 대하여

 

이 책에 관심이 갔던 것은 머리로 하는 일들에 대한 지겨움 때문이었다. 저자는 실제로 철학자이면서 모터사이클 정비사이다. 자신만의 샵이 있고 그 곳에서 고객을 상대로 모터사이큰 수리를 한다. 그 스스로 느꼈던 지식노동자로서의 삶에 대한 기대와 실망 속에서 스스로 찾아낸 삶을 생생하게 만드는 방법이 솔직하게 적혀있다. 다만 내용 속에 모터사이클 부품에 대한 이야기는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마치 외국어처럼 들렸고 문장이 가끔 너무 꼬여있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평소 관심이 많던 나였기에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p.8 도구의 사용이 줄어든 것은 물건에 대한 우리의 성향이 더 수동적이고 의존적으로 변했다는 징후인 듯 하다. 실제로 우리가 직접 손으로 물건을 고치거나 만드는 순간에 생겨나는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직접 물건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만들어진 물건을 구입한다.

 

P.21 학교에서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인위적인 학습환경을 조성한다. 아이들도 그것이 인위적으로 조성되었고 자신들의 온전한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 손을 쓰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다면 세계는 여전히 추상적이고 우리와 동떨어진 상태로 남게 되고 학습에 대한 열정은 타오르지 않을 것이다.

- 더그 스토우, 20061116, 손의 지혜(블로그)

 

요사이 나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생각해 본적이 있다. 그런데 일시적인 체험이 아니라 실제가 함께 돌아가는 공간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동물도 기르고 농작물도 돌보고 수확해서 식사 준비와 정리도 하고 만들고 싶은 공간도 만들고 놀이도 하고... 어떤 정해진 프로그램은 최소화 하고 실제와 부딪혀 보는 경험이 많은 공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인위적인 학습환경을 최소화하는 경험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위의 이야기는 내가 지금하고 있는 생각과 많은 부분에서 연결되었다.

P.26 손으로 작업하는 능력을 통해 세상에 자신을 구체적으로 표출하는 만족감을 느끼면 사람이 차분하고 느긋해진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만족감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자질구레한 설명을 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내는 듯하다. 그저 자신이 만든 건물, 자동차, 조명을 가리키기만 하면 된다.

 

P.26 가구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아도 계속 가구를 만들겠다고 말할 것이다. 서로 공유하는 기억이 삶의 기념물 속에 고스란히 간직될 뿐 아니라 그런 물건을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물론 미래와의 일종의 교감이기 때문이다.

 

P.27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 오래 사용하는 물건들은 이 세계의 이치를 일깨우고 인간과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물 간에 교류하는 관습을 생성한다.” “인간세계의 현실성과 신뢰성은 우리가 어떤 물건을 만드는 행위, 그리고 그 물건을 만든 작자들보다 더 오래 존속하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다.”

 

요사이 손으로 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이 생겼다. 요리, 바느질, 목공, 농사 등 손으로 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오신 분들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으셔서 그런지 담백한 느낌이 있으시다. 나도 앞으로 손으로 하는 일을 하고 싶다. 만약 그것만 하기어렵다면 반반이라도 하고 싶다. 경제적 가치를 뛰어넘는 교감속에서 만나게 되는 경험들이 참 소중하다. 오늘도 공용텃밭에서 옥수수를 수확했다. 그 옥수수는 돈을 주고 가게에서 산 옥수수와는 다른 느낌이다. 옥수수밭을 매고 물을 주었던 시간과 정성이 함께 했기에 그런 것이겠지. 이런 소중한 기분을 느끼고 공유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

 

p.30 장인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유행이 아닌 자기 기술의 객관적인 기준을 따른다. 아무리 적용이 제한적이라고 해도 그런 정신(물건에 대한 사심 없고 철저하고 확고한 신념)은 현대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강력한 존재론은 산자본주의 첨단기관들은 물론 그런 기관들에 적합한 노동자들(하나의 기술에 얽매이지 않는 순응적이고 다재다능한 인력)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의 교육제도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p.51 이런 경우에 정비사는 자신을 믿고 그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이해의 과정에는 종종 문제해결이 아닌 <문제 발견>이 수반되어야 한다. 수학교과서 한 챕터의 끝부분에 있는 문제를 풀 때 학생들은 문제 해결을 하는 것이다. 만약 그 챕터의 제목이 <두 개의 미지수가 있는 연립방정식>이라면 학생들은 어떤 공식을 사용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이처럼 한정된 상황에서는 문제를 바라보는 적절한 맥락이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해석을 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문제가 이처럼 이해하기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대체로 정보가 너무 많은 탓에 무엇이 적절한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이지 알기가 어렵다. 당면한 문제가 어떤 유형의 문제인지 안다는 것은 그 상황의 어떤 특징을 무시해도 되는지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그 상황의 범위조차 애매모호할 수 있다. 적절성을 구분하는 것은 규칙을 적용한다고 실현되는 것이 아니며 경험이 뒷받침된 판단이 필요하다.

 

p.60 하지만 이 시점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간단해 보이는 한 공정을 수행하기 위해 단순한 장비를 모두 체결했을 때 그 재료에서 끊임없는 변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 두꺼운 부분들과 얇은 부분들이 계속 새로운 상황을 만들거나 이전의 해법들을 허사로 만드는데, 그러면 몇 분마다 한 번씩 새로운 문제가 작업자의 창의성을 시험한다. 그는 띠톱도 없이(당시는 1923년이다.) 저항이 생길 때마다 우직하게 힘으로 밀어붙인다. 묵재는 결코 호락호락하게 기계의 먹잇감이나 무력한 희생양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목재는 자신을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자신만의 특별한 가치를 내준다.

 

이 부분의 설명은 신선했다. 유행을 따르기보다 객관적으로 주어진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 안에서의 최선을 찾아나가는 사람이 장인이라는 설명이 그랬다. 나는 장인은 뭔가 경지에 올라서 자기마음대로 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단순한 사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인의 의미가 수행자의 의미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어떤 일을 하던 간에 문제를 스스로 발견하고 그 안의 무궁무진한 정보를 정리해서 적용하며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것!! 그것은 어쩌면 모든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마스터키 일지도 모르겠다.

 

p.65 전문가들의 판단을 배제하는 이유가 항상 이익을 필요로 하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이따금 그것은 공공정책의 문제이기도 하다. 표준화된 시험은 교과과정에서 교사들의 자유재량을 빼앗고, 엄격한 판결지침은 판사들의 판단을 위축시킨다. 이처럼 집중화된 권력으로 우리를 이끄는 동력은 바로 우리의 자유로운 정치적 본능인 듯하다. 우리는 개인들의 수중에 있는 권력을 신뢰하지 않는다. 중립적 절차를 존중하는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무책임의 정치다. 그것은 선의(권력의 남용으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려는 취지)에서 시작하지만 개인들, 특히 공공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행위주체성을 먹어치우는 괴물이 되었다. 민간부문에서 괴물은 권력에 대한 불신이 아닌 이윤의 극대화에 의해 생겨나지만 어차피 먹이는 비슷하다.

 

p.73 물론 창조성은 오랜 연습을 통해 숙달된 전문기술의 부산물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 기술은 복종 submission을 통해 축적된다. (음계를 익히는 음악가나 텐서 수학을 배우는 아인슈타인을 생각해보라.) 창조성과 자유를 동일시하는 것은 신자본주의 문화와 아주 잘 어울리는데, 신자본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융통성은 모든 업무에 대해 진정한 능력을 개발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생각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표준화되고 계량된 시험과 지침이 사람들의 창의성을 감소시킨다는 말에 백분 동의한다. 항상 새로운 상황속에서 자꾸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식의 적용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해결책이니까. 모든 공무원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공무원의 업무태도를 보면서 느끼는 답답함이 이런 것은 아닐지.... 창조성은 복종을 통해 축적된다는 말. 그리고 신자본주의가 오래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참 안타깝게 느껴진다.

p.74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직업적 조언을 할 때 정말로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 가장 믿을만한 대답은 <인간적 가치에 주목하면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는 피하라>는 것뿐이다.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 인간적이고 상식적인 대답은 생각과 행동을 철저히 구분하는 자본주의 핵심요건에는 어긋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p.76 사무실에 틀어박혀 정보시스템의 조작자나 창조성이 떨어지는 단순한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자립적인 기능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더 만족스러울 것이다. 이런 조언을 반아들일 수 있으려면 다른 사람들이 의무적이고 필수적이라고 정해주는 삶의 진로를 거부할 줄 아는 반골기질을 지녀야 한다.

 

<인간적 가치에 주목하면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는 피하라> 멋진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의무적이고 필수적이라고 정해주는 삶의 진로를 거부하는 반골기질로 즐겁게 살아가리라!! !!!!!

p.85 초기 모터사이클은 그다지 편리하지 않았다. 아마도 말보다는 편리했을지 모르지만 아주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현재의 바이크보다도 더 탑승자의 지적, 도덕적 자질을 문제 삼았다. 건망증과 소심함은 탑승자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오일의 양을 주입할 때 드러난다. 어떤 사람은 묘하게 애증을 느끼면서 노새처럼 결코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사물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반면 어떤 사람은 차라리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물리학의 특정한 외인적 사실에 맞춰야 했다. 구식 바이크들은 탑승자를 칭찬하지 않고 호되게 가르친다.

 

p.86 모든 면에서 우리는 구세대들이 바이크를 타면서 필요로 했던 것 같은 <자신의 판단을 실행할 기회>가 적어졌다. 그런 판단의 필요성은 인간의 우수성을 이끌어낸다. 일단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지적능력은 후천적으로 훈련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현실과 거리를 둔 사색의 산물이 아니다.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얻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기기의 반동 같은 힘겨운 현실에서의 육체적 몰입을 통해 생겨나는 일종의 <흥미>. 그런 몰입의 결과로 아도덕적 亞道德的 가치가 발달된다. 사용자는 외부적 현실에 책임을 져야 하며 그 현실에서 혹독한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을 감수한다. 결국 노동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기술교육은 도덕교육에도 기여한다.

p.92 예를 들어 내가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다면 존중해야 할 권위적인 체계를 접하게 된다. 러시아어를 배우는 것이 어렵고 목표는 아득해서 어쩌면 완전히 달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가 할 일은 나와 별개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서서히 밝혀내는 것이다. 관심은 실제 지식으로 보상을 받는다. 나는 러시아어에 대한 애정 때문에 내게 맞지 않는 무언가, 내 의식이 장악하고 흡수하고 부정하거나 꾸며낼 수 없는 무언가에 열중하게 된다.

 

p.94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능동적인 참여와 무분별한 소비 간의 차이를 어느 정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 p.96 베티 크로커는 케이크 믹스를 아주 완벽한 상태로 만들지 않는 편이 사업성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빵을 만드는 사람들은 케이크믹스에 자신이 직접 달걀을 첨가할 경우에 케이크를 완성한 후 더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여기면서 살아왔다.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가 나오듯이 어떤 현상이든 아주 단선적으로 사고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불편함 속에서 얻게 되는 경험들은 우리에게 호되게 가르친다. 그런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마 바이크를 다루면서 필자가 느끼는 것은 천연염색을 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목공을 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손으로 하는 일이 우리에게 <나의 판단을 실행하고 또 그 실행을 바탕으로 고민하고 또 실행하는 경험>을 주는 것이다. 그를 통해 나는 자판기에서 뽐은 음료수에 대해 느꼈던 감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주인됨의 느낌, 애정, 만족감을 갖게 된다. 어디서든 주인이다.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

 

있는 곳에서 주인이 되면 그 자리가 진리가 된다.

 

p.116 자동차든 인간의 육체든 간에 무언가를 고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언가를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르다. 정비사와 의사는 비록 전문가일지라도 매일 실패에 직면하지만 시공자는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그들이 고치는 물건들이 그들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닌 탓에 완벽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실패의 경험은 숙달된 전문기술에 대한 자만심을 누그러뜨린다. 의사와 정비사는 날마다 별개의 개상으로서 세계와 소통하고 자아와 비자기 간의 차이를 뚜렷하게 인식한다. 무언가를 고친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도취의 치유책일지도 모른다.

 

p.130 훌륭한 미술품은 평이한 환상의 형태를 거부하기 때문에 종종 우리에게 신비감을 준곤 하는 반면, 조악한 미술품은 인식이 가능한 익숙한 형태의 자기중심적 몽상이기 때문에 전혀 신비감이 없다. 훌륭한 미술품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세계가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를 나타냄으로서 객관성을 지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증명한다.

 

p.139 엄격하고 독자적인 현실을 다루는 모든 분야는 <정직함><겸손함>을 필요로 한다. 나는 특히 우리가 직접 만들지 않은 것들을 치료하거나 수리하는 행위 같은 무언가를 고치는 추계적 기술에 반드시 이런 요건이 적용된다고 믿는다.

p.224 하이데거는 우리가 눈으로 쳐다봄으로써가 아니라 직접 손에 쥐고 사용함으로써 망치를 알게 된다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다.

 

무언가를 고친다는 행위. 그것이 바이크가 되었던 사람이 되었던 간에 매일 실패에 직면한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만들지 않았으므로 내가 다 알지 못한다는 것과 또 그를 바탕으로 내 노력에 부족함은 없음을 전제한 접근은 <정직함><겸손함>을 동반할 수 밖에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당당함과 겸손함과도 일맥한다. 실상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같은 원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두 가지 태도로 대한다면 어떤 일이든 조금씩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머리가 아닌 손으로 해 나가면서 진짜 그 것을 만나가는 것이리라. 비록 오늘 실패한다고 해도 그것은 끝이 아니니까 말이다.

 

p.225 만약 사고thinking가 행동doing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면, 세계를 지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세계 속에서 우리가 하는 일에 의해 좌우된다. 실제로 신발끈을 제대로 알려면 신발끈으로 신발을 묶어 보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p.264 토머스 홉스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동물은 일단 기대하는 결과에서 시작해 요건을 충족하는 도구를 찾아내는 반면, 인간은 만물을 잠재적인 도구로 여기면서 전혀 다른 목적에 따라 도구가 초래하는 모든 결과를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주장했다.

 

p.264 그는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를 동반하고 추진하는 예리한 가치 식별력이 있으며 그런 행위를 즐겁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가치평가적 주의력이라고 적고 있다. “어떤 행위를 즐긴다는 것은 그 행위를 유익하거나 가치있게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해 기울이는 진지하고 날카로운 주의력에서 비롯된다. ....... 만약 누군가 그 행위의 도구적 가치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그의 가치평가적 주의력은 그 행위 자체가 아닌 기대하는 결과, 즉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아닌 다른 것을 향하게 된다. 이런 부류의 주의력을 지니게 되면....... 아무 생각 없이 행위를 하게 되고 그 행위가 부담스러워진다.”

이런 브루어의 주장을 입증하는 듯한 유명한 심리실험이 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매직을 주고 그림을 그리며 놀게 해주었다. 일부 아이들에겐 사전에 약속을 하고 그림을 그리면 금장과 리본으로 장식된 상장을 주면서 보성을 했던 반면 다른 아이들에겐 아예 그런 보상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몇 주일 후에 보상을 받은 아이들은 그림 그리기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 아이들의 그림은 수준도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반면, 보상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여전히 그 활동을 즐겼고 높은 수준의 그림을 그렸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 지속가능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 행위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 만족감이리라. 결과에 대한 앞선 생각들은 현재 내 손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도리어 흥미를 떨어뜨린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흥미롭다. 학교라는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배움이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알려주는 것 같다. 교사나 부모의 앞선 욕심은 도리어 아이들의 추진력을 방해할 뿐이다. 시간과 공간을 열어두고 아이들 스스로 마음껏 즐기게 하자.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과 만날 수 있도록 하자.

 

p.281 자발적인 행위는 대체로 기분에 따라 선택되는 자아의 의지에 의해 실행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대립은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목적과 자아가 결정하는 목적 간에 일어난다. 전자에 근거한 노동은 소외되는 반면 후자에 근거한 노동은 자기실현이나 성취를 이룬다.

 

p. 283 따라서 기술자의 개성은 공동의 세계에 반응하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는 행위에서 표출된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그가 응대하는 고객들과 그가 수행한 작업의 우수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다른 기술자들이다. 이런 사교적인 개성은 스스로 법칙을 부여하는 자율의 개념에 내포된 자기페쇄와 대비된다. 자율의 개념은 우리가 우리에 앞서 존재하는 세계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 개념은 본질적인 고립을 가정한다. 자율적인 존재가 자유롭다는 것은 다른 모든 존재들에게 시중을 받는 존재가 자유롭다는 의미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을 이런 식으로 여기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게 입은 근본적인 은혜를 져버리는 것이며 배은망덕한 도덕적인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의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모든 개인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 세상에 의존한다.

 

p,284 깨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처한 상황을 충분히 의식하며 산다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상황에 맞게 적응하고 무엇이든 자신의 우수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p.286 내가 극기주의라고 부르고자 하는 혁신의 대안은 단연코 현재의 삶에 대한 것이다. 극기주의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영속적이고 국지적인 실행력을 요구한다. 실제로 이것은 개인의 행위주체성과 지식에 대한 애정이 지금 당장 한 사람의 삶에서 실현될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잘 살아보자!! 우리 스스로 상황에 맞게 적응하고 무엇이든 나의 우수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보자.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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